흔히 택시기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무엇일까? 승차거부, 불친절, 각종 범죄 등에 이르기까지 택시기사와 관련해 좋지 않은 내용이 주로 기사화되고 있어 일반 국민들의 인식이 상당히 부정적인 것이 현실이다. 또 택시기사를 한다는 것은 인생의 막장에 와서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심정으로 마지막에 선택하는 직업이라는 자괴감을 가진 채 택시를 모는 기사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오직 택시만의 최고의 서비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신념과 자부심으로 자비를 털어 택시대학을 만들고 세계 최고의 택시기사들을 양성하겠다는 정 총장의 포부는 우리 사회의 훈훈한 미담으로 다가온다. 정 총장은 “택시는 고급 운송 수단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그 수단에 걸 맞는 서비스가 승객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택시업계는 사상 유래 없는 취업난 속에서도 오히려 구인난을 겪고 있습니다. 3개월 이내에 전직하는 비율이 8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 경기침체 장기화 여파로 법인택시의 가동률은 70%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택시가 승객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고 말했다. 통계에 따르면 서울시에서 운행되는 택시는 약 7만3000여대로 인구 142명 당 1대 꼴이다. 런던의 경우는 700명 당 1대라고 한다. 그러면서 정 총장은 서울시의 적정 택시대수로, 500명 당 1대 정도인 2만대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은 택시가 너무 많다보니 수익성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열악한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택시정책을 추진해온 정부책임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정 총장은 지난 1996년에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시련을 맞았다. 자그마했지만 야심차게 추진했던 사업이 부도나면서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다. 설상가상으로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을 앓아오던 딸이 여러 합병증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되면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삶과 죽음! 선택의 기로에서 택시운전 시작 정 총장은 “아내는 딸을 보내고 실성하다시피 했고, 나 역시 아무런 희망도 없고 암담한 현실만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절망에 처하게 되면 말입니다.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더군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하염없이 거리를 걷다가 잠실대교 위를 북단에서 남단으로 지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면서. 남쪽으로 3분의2 쯤 왔을 때 그만 다리가 풀리며 난간을 잡았는데 소름이 돋았습니다. 삶과 죽음의 선택의 기로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딸의 뒤를 따라갈까? 아니면 새로 뭔가를 시작해야 할까?”라고 회상했다. 그가 잠실대교를 건너와서 교통연수원을 지날 때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택시기사들이 교육을 받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서부터 새 출발을 시작해보자’고 생각하며 정 총장은 교통연수원을 찾았다. 그리고 1등으로 연수원 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 1월 23일 유난히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리던 날, 정 총장은 배정받은 택시회사를 방문했다. 배차과장이 정 총장을 안내하면서 신입이니까 나름 신차를 내주겠다고 했다. 5분간의 형식적인 교육을 받고 운전석에 앉아보니, 신차를 배정했다는데 55만km의 주행기록에, 클러치는 매우 뻐근한 상태였다. “택시기사로서의 첫날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처음엔 내가 어느 정도 지리가 익숙한 은평구와 서대문구에서 영업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뜻 때로 안 되더군요. 결국 양천구를 비롯해 강서구와 홍대입구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14시간 운전 후 회사에 와서 정산을 해보니 13만8000원의 실적을 올렸습니다. 당시 사납금이 6만7000원이었는데 신입이라고 해서 4만5000원만 납입하고, 경비를 제한 후 수중에 떨어진 첫날 수입이 8만 원 정도였습니다” 정 총장은 다음날 새벽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벌어온 돈을 모두 내밀었다. 그의 아내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런 식으로 돈을 벌면 곧 빚도 갚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겠다”며 들떠 있었다. 그가 그 돈을 벌기 위해 14시간 동안 식사도 하지 못하고 화장실도 한 번 가지 않은 채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그만 다리가 마비돼 버렸던 사실은 전혀 모른 채. “그 때부터 4년간은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하루 평균 12시간에서 14시간 동안 식사도 안하고 거의 차에서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다보니 치아가 13개나 빠지더군요. 이후 틀니를 하기 위해 생이빨 7개를 더 뽑았습니다”라며 정 총장은 기자에게 자신의 틀니를 내보였다. 그의 현재 나이가 50세라는데 외견상으로 보이는 그는 마치 환갑을 지난 듯 보였다. 드디어 정 총장은 4년 동안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모든 빚을 다 갚았다. 그 동안 아내도 맞벌이를 하면서 거들었다. 그는 “나는 아내가 너무 고맙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전혀 내게 내색하지 않고 끈기 있게 내조를 해왔습니다.
끈질긴 집념으로 MK택시와 블랙캡 유학 나서 또 택시운전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세상으로부터 배웠습니다. 택시를 거쳐 간 수많은 승객들이 나의 진정한 스승이었습니다. 택시기사의 삶이라는 게 긍정적인 측면도 부정적인 측면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긍정만을 찾아보게 되더군요. 그때부터는 몸은 비록 고되어도 마음만은 한껏 자유로워지면서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고 언급했다. 정 총장은 이후 꿈에 그리던 개인택시를 사게 된다. 물론 돈이 없어 빚을 냈지만,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개인택시의 운행방식이 있었기에 하루 평균 16~18시간 운전대를 잡았다. 결국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정 총장은 어느 날 우연히 책을 통해 일본 MK택시의 성장신화를 접하면서 “그 순간 필이 확 꽂혔습니다. 내가 꿈꾸던 택시기사로서의 비전과 가치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거라고 생각됐습니다. 그때부터 일본어를 틈틈이 공부하면서 MK본사에 일어와 한국어로 신입사원 연수교육에 참여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라며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 일본 교토. 재일교포 유봉식·태식 형제는 차량 10대, 운전사 24명으로 MK택시를 창업했다. 이들 형제는 “택시운전사는 파일럿과 같다. 우주보다 더 무겁고, 큰 생명을 맡고 있는 점에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지론으로 언제나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MK택시는 늦은 밤 여성 고객이 하차하면 골목길을 라이트로 비춰주고, 소나기가 쏟아지면 우산을 주는 감동서비스를 제공했다. 장애인 우선 승차 제도·할인, 전 택시기사가 구급원 자격을 획득한 구급택시 등 다양한 고객 서비스도 마련했다. MK택시는 1995년 타임지 선정 ‘서비스 세계 제일의 기업’으로 뽑혔으며, 현재 2000여 대의 택시와 30여 개의 주유소를 거느린 운수기업으로 성장했다. 정 총장은 “MK택시가 한국의 일개 택시기사에 불과한 나를 만나줄리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MK택시와 관계된 명사들의 추천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강보영 안동병원 이사장 등의 추천을 받았고, 한국을 방문해 국회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유태식 MK택시 부회장을 기다리다가 붙잡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고 말했다. 결국 정 총장의 수 년 간의 고집스런 정성에 감복한 유 부회장은 마침내 MK택시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인 그를 MK택시 신입사원 연수교육에 참여시키게 된다. 일본에 건너가 교육을 모두 이수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정 총장에게 유 부회장은 “자네가 한국에 가서 이곳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한다면 수많은 비난과 질시를 받게 될 걸세. 사실 그것이 MK택시의 역사이기도 하지. 우리 역시 MK방식의 택시운영을 시작했을 때 상당기간 택시업계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네. 그래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비전택시가 서울시 누빈다 이후 정 총장은 MK택시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런던의 세계적인 택시회사인 블랙캡을 견학할 기회를 얻었다. 또 고지식한 런던교통공사 관계자를 집요하게 설득해서 정보를 제공받을 수도 있었다. 특히 2011년 런던에서 폭동이 발생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 정 총장은 “나는 이것이 또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비를 털어 견학을 해야 했기에 경비를 최대한 절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런던 폭동으로 인해 대폭 할인된 항공료로 갈 수 있었고, 숙박비 역시 싼 가격에게 런던에 체류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를 상당한 위험들과 함께 생활했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정 총장은 지난 5월 비전택시대학의 문을 열게 됐다. 이 대학은 택시기사를 대상으로 전액 무료로 과정을 진행하고 있으며, 단계별로 과정을 이수하게 되면 서울시에서 ‘비전택시’의 브랜드 마크인 ‘V’를 부착시켜 주게 될 것이다. 현재는 45명의 택시기사가 커리큘럼 과정을 밟고 있으며, 향후에 이들이 운전하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전택시의 모습을 서울시에서도 보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택시대학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은 어떻게 조달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 총장은 “현재는 모두 자비를 털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외부 강사를 초빙해서 진행하고 있는데 그 비용은 주로 내가 외부에 강연을 자주 다니는데 그 강연료를 받아 충당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정부에 도움도 요청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서울시에서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정 총장은 자신의 개인택시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의 택시에는 세계 최초로 이동식 심박제세동기가 장비돼 있다. 이에 따라 만약 승객에게 갑자기 심장발작이 일어나면 그 즉시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도록 자격증도 이미 따 두었다고 한다. 또한 6가지의 방향제를 통해 활기찬 아침시간은 물론 다소 처지게 되는 저녁시간에 이르기까지 시간대별로 방향제를 다르게 뿌린다고 한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4m에 달하는 레드카펫이다. 모든 승객에게 다 해줄 수는 없지만, 특별히 예약된 고객의 경우에는 이 레드카펫을 밟으면서 승차할 때 정 총장이 직접 차문까지 열어주는 서비스를 맛볼 수 있단다. - 이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