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345호 이성호⁄ 2013.09.16 11:23:36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읜 그녀는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섬유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중 보일러를 수리하러 온 기사를 보고 막연하게 저 기술을 배워서 성공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여성이고 몸도 왜소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규모가 작은 보일러설비회사 보조로 일을 시작했지만 막상 다니게 된 건설현장에서도 “여자가 어디서 노가다냐”라는 비아냥거림 등 멸시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간절함이 있었고 이 분야의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게 했다. 결국 손톱에 기름때가 가시지 않았던 그녀에게 대한민국 여성으로 유일하게 ‘보일러 기능장’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현재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이자 포항대학교 전기에너지학과에서 겸임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는 오서영 샤인이엔지 대표를 만나봤다. 보일러 기술자를 동경 “어려운 시절이었죠. 간절한 마음과 꿈이 지금껏 저를 지탱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 오서영 대표(60)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생업에 나서야 했다. 여러 가지 일을 두루 거치다 섬유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옷을 가위로 오려서 샘플 천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이 웅성웅성 거렸다. 보일러가 고장났다. 한마디로 비상이 걸렸다. 같은 온도에서 공정을 해야 똑같은 색상이 나오는데 보일러 고장으로 옷 염색이 얼룩덜룩해졌고 색상이 각기 달리 나온 것이다. 급하게 기술자가 왔고 보일러를 수리하고 돌아간 후 공장은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됐다. 보일러 기술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가정집은 연탄아궁이 시절이었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보일러도 없어 일제에 의존하던 때라 보일러 기술은 사실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100원짜리 지폐를 봉투에 담아 준 3000~4000원이 한 달 치 월급이었는데 공장에 수리를 하러 왔던 보일러 기술자는 반나절 만에 1만2000원을 수리비용으로 받아 갔습니다. 3개월 치 월급을 하루 일당으로 받은 것으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이 기술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술 배우려 취업문 두드려…5년간 문전박대 보일러에 대한 이론도 전혀 없었고 무지했지만 막연하게 시작한 계기가 됐다. 어려서 동네 공사판을 놀이터 삼아 놀 때 안전모를 쓰고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동경했던 탓도 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기에 겁이 없다고 했던가? 무작정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보일러 설비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기술을 배우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수입에 의존한 열악한 구조였기에 보일러 설비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물어물어 수소문 끝에 관련 회사를 찾아가면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황당하다는 반응이었고 아예 말도 꺼내기도 전에 거지 내몰듯이 쫓겨나기도 했다. 열정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금녀의 벽’은 높았고 회사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5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여러 곳의 보일러 관련 설비회사를 찾아갔지만 매번 거절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일단 남자도 힘든 현장 일에 힘이 부친 여자가 하겠다고 하고 경험은 물론 아는 게 없으니 당연했지만 그때에는 왜 안 받아 줬는지 몰랐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겠다고 해도 한계가 분명 있었던 것. 심지어 열관리학원에서 조차 등록을 거부했다. 이유는 파이프 절단시 당시에는 기계가 없어서 순전히 사람 손의 힘만으로 해야 했는데 여자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무보수로 어렵게 현장보조로 취업 좌절하고 다른 일을 알아볼 만도 한데 오 대표는 끈질기게 이를 악물고 힘든 시기를 버티고 또 버텼다. 학원에서는 안 받아줬지만 혼자 공부해서 자격시험을 보려고 서점에서 수험서적을 사기로 했다. 자격증 관련 수험서를 한손에 들고 계산하러 나가는 찰나 이상하게도 칸트의 책이 눈에 띄었다. 칸트의 인생론을 담은 책이었다. “책을 보니 칸트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이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목표가 뚜렷했습니다. 실력이 있었으나 교수로 받아주지 않자 가정교사로 전전하다가 30대에 이르러서 보수를 전혀 받지 못하는 대학 강단에 서게 됐다는 내용을 읽게 됐습니다. 순간 머리가 띵했습니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에서 실력을 인정 못 받았지만 묵묵히 갈 길을 걸어갔고 보수도 안 받고 일을 한 부분이 나를 뒤돌아보게 만들더군요” 금녀의 벽…비아냥거림과 멸시를 견디며 대철학자 칸트에 비해 나는 뭔가? 실력도 없는 주제에 당연히 급여 즉 보수를 바랬던 것이다. 무보수 개념이 없었던 오 대표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한없이 돌이켜보게 됐다. 가지고 있는 기술·자격증도 없었고 체력도 안 돼 이른바 스펙이 전무했다. 이때부터 취업문을 다시 두드릴 때 월급을 안 받겠다고 했다.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하면 금방 들어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안 받아줬다. 여성이고 보험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현장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괜히 시끄러워질 것 같아 다치니깐 가라고 했다. 어떤 곳은 성질을 내고 욕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규모가 작은 보일러설비회사에 취직하게 됐다. 현장 투입은 당연히 안 시킬 요량으로 돈을 안 받겠다고 하니 우선 사무실 일이나 거들게 나와 보라고 한 것이다. 7~8개월 동안 월급 한 푼 안 받고 일을 했다. 출근해서 책상을 닦고 공구에 뭍은 시멘트 등을 씻어냈다. 무시도 많이 당했다. “얼마나 모자라면 나이도 30대 인데 월급도 안 받고 저러고 다니냐”는 빈정거림의 시선이 팽배했다. 바보 같다고 수군수군 거렸다. “한심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하냐”며 멸시도 많이 받았지만 대꾸도 못했다. 이리저리 채였다. 이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 주위 친척·지인들도 등을 돌렸다. 혼자였고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았다. 너무나 힘든 나머지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도 밟고 일어서야겠다며 다시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한 푼 이라도 더 벌어서 자기 앞가림할 나이에 노가다가 좋다고 월급도 못 받고 다니는 모습에 미쳤다고 까지 했습니다. 물론 생활은 고달팠습니다. 그동안 조금이나마 모아놓은 돈도 다 떨어져 밥을 굶기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불렀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5개월 치 월급을 봉투에 넣어서 줬다. 눈물이 났다. 사장이 성실하다며 앞으로 현장에 데리고 가서 기술을 1부터 10까지 전부 가르쳐 주라고 현장기사들에게 지시했다(오 대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보였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일을 시작하게 됐다. 현장보조로 우여곡절 끝에 나가게 됐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책에서 배운 공구 이름 등 현장용어를 못 알아듣고 “예? 예?”를 되풀이해 엉뚱한 것을 가져와 혼도 많이 났고 일도 미숙해서 욕도 많이 먹었다.
“이때 내가 언젠가 정식기술자가 되면 인간적인 차별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똑같이 동등한 입장에서 대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더군요. 당시 많이 서러웠고 ‘나’ 라는 인격체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몇 년간 보조 일만 하다 보니 경력 인정이 안 될 것 같아 회사를 옮겼다. 특히 손으로 하던 파이프 절단작업이 기계로 대체되자 1992년에 열관리학원에서도 여자를 받아줘 바로 공부를 시작했고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현장을 다니면서 책을 손에서 놓질 않아 보일러 기사시험에도 합격했고 기계특급기술, 품질관리기술 등 8종의 자격증을 보유하게 됐다. ‘축열식 폐열회수난방 시스템개발’, ‘연소장치 밸브기술’ 등 특허도 받았다. 기술과 이론이 해박해지자 현장일 책임자로 근무했다. 현장 사람들은 여자이기에 반말도 하고 얕잡아보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오뚝이 같은 근성으로 돌파해 나갔다. 이 같은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1년 대한민국 여성 1호이자 지금까지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보일러 기능장’이 됐다. 기능장은 관련 분야에서 11년 이상 실무에 종사한 사람에게 응시의 기회가 주어지는 명실상부한 기능시험의 최고 자격이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고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스스로 공부한 집념에 대한 답변이었다. 대한민국 여성 1호 ‘보일러 기능장’으로 이후 학점 은행제로 대학을 마치고 2004년 부산대학교 산업대학원에 입학해 배움을 늦추지 않았다. 기술개발 노력을 인정받아 2003년 행정안전부 신지식인 인증, 2006년 산업자원부 표창까지 받았고 2008년에는 에너지관련 보고서 용역·기술개발 사업 용역·건축기계 설비 공사 용역 등을 하는 기술관련 회사인 ‘샤인이엔지’를 직접 차렸다. 2011년부터는 포항대학교 전기에너지학과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2012년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로 위촉돼 특성화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냉동기계 기초실무교육을 실시했다. 가스안전공학개론, 보일러냉동관리원 직무분석 및 훈련프로그램 등도 집필했다. 올해에는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우수숙련기술인 국민스타 3인방’에 선정됐다. 오 대표는 힘들었던 젊은 시절을 뒤돌아보며 감사해 했다. “어렵게 기술을 배웠고 현장 일을 하게 됐지만 금녀의 벽이 워낙 견고하다 보니 힘들고 끝이 안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내면적으로는 많이 힘들었지만 더 무시당할까봐 외면적으로는 전혀 내색을 안했고 집에 와서 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신의 가르침이 아닌가 싶습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 지금의 제가 다듬어진 것이겠지요” 교수가 돼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경험과 기술을 가르치고 있어 행복을 느낀다는 오 대표. 현장 근무자들이 인정받는 세상을 꿈꾸며 “선 취업을 해 학업보다 먼저 일을 하다 보니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한 동기부여로 작동됐습니다. 이를 악물고 일도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너무 편한 것만 찾게 되면 간절함을 모릅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모두가 반대해도 하고야 마는 청개구리 정신이 있었습니다. 간절함이 억지로 생기겠냐마는 풍족한 생활속에 자란 젊은이들이 좀 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헤쳐 나가길 바라고 이러한 부문을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현재 여성 보일러 기능장은 유일하게 저 혼자입니다. 관련업이 더 발전하기 위해선 섬세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여성의 진출이 보다 많이 이뤄지도록 힘이 되고 싶습니다. 보일러 기능장이 됐지만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기술발전을 위해 스스로를 더욱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경험을 통해 몸에 밴 실무 그리고 이론을 접목해 기술개발을 꾀하고 궁극적으로는 현장 근무자들이 진정으로 인정받는 그러한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 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