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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42]강화 고려궁지 ~ 송악사지 ~ 연미정 ~ 진해사지

국운쇠퇴 고려의 한(恨)서린 오읍(五泣)샘물 “하늘과 땅, 왕과 백성, 神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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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54호(창간) 박현준⁄ 2013.11.25 13:50:40

늦은 가을날 바람처럼 가볍게 어디로 가 볼까? 나지막한 산길과 바다를 만나며 옛사람들의 자취가 깊게 배어 있는 곳, 그런 길을 걷고 싶은 날에는 이 길을 걸어 보자. 강화는 걸을수록 정이 가는 땅이다. 수수한 길을 손 안대고 연결해 놓은 강화 나들길은 요란하지 않아서 좋고 더구나 지방재정을 축내지 않아서 좋다. 강화는 곰곰 들여다보면 어쩌면 아직도 고려(高麗)의 땅이다. 특히 강화읍내 땅은 1232년(고려 고종 19년) 이후 39년간 고려의 수도였기에 곳곳에 고려의 숨결이 남아 있다. 오늘은 강화 나들길 1코스를 중심으로 걷기로 한다. 강화행 버스는 터미널까지 가든지 아니면 터미널을 지나 군청을 경유하는 노선이 있다. 터미널에서 내렸으면 길을 건너 뒷길로 들어서서 강화산성 남문을 경유한다. 남문에는 안파루(晏波樓)란 편액이 붙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선원 김상용 선생이 순결한 곳이다. (이곳과 용흥궁에 관한 내용은 졸고 옛절터 가는 길 9 참조) 남문을 지나 대로(48번 국도)를 건너면 강화군청이 있다. 군청 경유 버스를 탔을 경우는 군청정류장에서 하차한다. 군청 좌측(서쪽) 방향 길로 접어들면 강화도령 철종이 왕이 되기 전 살았던 잠저(潛邸) 용흥궁(龍興宮)이 있고 그 앞으로는 용흥궁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과거 강화의 향토기업 심도직물이 자리하고 있던 터인데 공원에는 그 기업의 굴뚝 하나를 남겨 놓아 향토기업을 기념하고 있다. 굴뚝 앞으로는 선원김선생순의비(仙源金先生殉義碑) 비각이 서 있다.

그러나 용흥궁 공원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동편 언덕 위에 선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다. 113년 전인 1900년 성공회의 고요한(Charies Jone Corfe)주교가 경복궁을 건설했던 도편수(都邊手)를 초빙하여 세운 건물이다. 언덕 위에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배 모양의 외관을 갖고 내부는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다는데 나지막한 목탑을 연상케 하는 한식건물이다. 이곳이 어떤 땅인가? 고려의 궁궐이 자리잡고 조선의 관아가 자리했던 중심지 아니던가. 비록 자신들의 신앙을 전하러 왔지만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할 줄 아는 낮은 자세로 임한 건물이다. 거기에 가르침의 말씀도 사찰의 주련과 같이 달아 놓고 범종도 종루에 매달아 주변 환경과 일체가 되게 하였다. 이제 성공회를 떠나 고려궁지(高麗宮址)로 향한다. 궁지에 이르기 전 좌측으로 가톨릭성당이 하나 서 있다. 진무영순교성지(鎭撫營殉敎聖址)에 세워진 성당이다. 숙종28년(1700년) 해상방어를 위해 군영이 설치되었던 곳인데 이곳에서 1868년 5월 천주교인 최인서, 장치선 등이 순교하였다. 발단은 고종 3년(1866년) 병인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에서 비롯되었다. 병인박해에는 프랑스 신부 12명 중 9명이 순교하고 3명만이 살아남았는데 3명 중 리델(Ridel)신부가 청나라로 천진(天津)까지 탈출하여 프랑스 극동함대 출동을 요청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때 리델신부를 도운 이들이 최인서, 장치선 등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충청도 신창현 용당리 포구에서 리델신부를 탈출시켜 9일간의 항해 끝에 산동성 지푸(芝罘)에 도착할 수 있게 도운 것이었다. 이들 등 여러 명이 처형되고 리델신부는 살아남아 다시 조선에 들어 와 투옥되기도 하였다. 리델신부는 이 때 포도청에 갇혔던 일을 옥중기(번역서: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로 남겼고 한불자전(韓佛字典)과 조선어문법 책도 남겼다.

고려의 숨결 서린 강화, 걷기 좋은 강화나들길 성당 위쪽으로는 고려궁지가 자리잡고 있다. 고려궁지는 본래 고려 고종19년(1232)년 고려가 천도한 후 궁궐건설이 시작되어 1270년 환도할 때까지 고려의 정궁으로 자리했던 곳인데 몽고와 강화한 후 철저히 파괴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터에 강화도호부 관아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과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유허(遺墟)만 남았는데 1964년 사적(제 133호)으로 지정하고 2003년 일부 건물을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아직은 너무 초라한데 이방청과 외규장각, 강화유수부동헌이 있고, 1711년 제작되어 정족산성에 걸었다는 동종(보물 11-8호)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이곳에서 근래까지 가장 세인의 관심을 모은 것은 외규장각(外奎章閣)이다. 외규장각은 어떤 곳인가? 왕조실록 정조 6년 (년1782) 2월14일자 기록을 보자. “강화 유수 김익이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완성되었음을 아뢰니, 하교하기를, ‘외규장각의 공역이 이제 이미 끝이 났으니, 봉안할 금보·옥보·은인·교명·죽책·옥책과 명나라에서 흠사(欽賜)한 서적, 열조에서 봉안했던 서적, 보관되어 전해 오던 서적과 사고(史庫)에서 이봉한 어제·어필 등의 서적을 기록하여 책자를 만들고서 내각·외각 및 서고에 나누어 보관토록 하라.’하였다. (江華留守金熤, 以外奎章閣成啓. 敎曰: ‘外奎章閣工役, 今已就訖, 所奉金寶、玉寶、銀印、敎命、竹冊、玉冊、皇明欽賜書籍、列朝奉安書籍、流來藏置之書籍及自史庫移奉御製、御筆等書籍, 錄成冊子, 分藏于內閣、外閣及西庫)“

이렇게 임금의 명에 의하여 금은보화와 주요 서적이 보관되었는데 1866년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 때에 은괴와 의궤(儀軌) 등의 서적이 약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약탈당한 의궤는 다행히 재불학자 고 박병선 선생의 노력으로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외규장각은 내각(內閣), 외각(外閣), 서고(西庫)가 언급되어 있는데 현재 재현해 놓은 건물은 너무도 을씨년스럽다. 고려궁지를 나선다. 서쪽 북문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인다. 은행나무 앞을 지나 마을길로 들어선다. 688년이나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인도하는 길은 꼬불꼬불 정감어린 고샅길이다. 궁골길 2번 길 지나 돌담장을 끼고 궁골 길 10번 길을 지나면 북관제묘(北關帝廟)가 마을집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안내판에는 ‘북관운묘’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맞지 않는 표현이다. 이름은 관우(關羽)요 자(字)는 운장(雲長)이니 ‘관운’이라고 쓰는 것은 자(字)의 앞글자만 쓴 것이다. 관운장(關雲長)은 소설 삼국지에서 보듯이 출중한 무장이었는데 중국 송(宋)나라 시대에는 무신(武神) 및 재신(財神)으로 모셔졌다. 우리나라에는 임진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군사들의 요청으로 서울에 동관묘(東關廟)가 세워진 이래 관우신앙이 퍼져나갔으며,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관아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고종 때에는 나라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더욱 관우 숭배를 강화했기에 서울 동서남북에 관왕묘(關王廟)가 서고 지방에도 많은 관왕묘가 세워졌다. 이곳에 세워진 관제묘(關帝廟)도 그 시기인 1892년(고종 29년)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관우의 힘을 빌리려는 희망도 물거품이 되고 조선은 결국 국운을 다하는 날을 맞았으니... 그 뒤로 관우숭배는 종교나 무속의 영역으로 남아 무가(巫家)에서는 장군으로 모시고 있다. 중국에는 부자되고 싶은 이들이 관운장상 앞에 향을 올리려 줄을 서니 관운장께서는 외롭지 않으시리라.

골목길을 나와 나들길 화살표를 따라가면 향교유림회관과 강화여자고등학교를 지나 강화향교에 도착한다. 향교는 잘 정비되어 있다. 대성전 마당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제(祭)를 지내고 있다. 지금도 강화에서는 향교의 기능이 살아 있구나. 새삼스레 느낌이 달라진다. 정조시대에 편찬된 강화부지(江華府誌)에 따르면 강화향교는 상당히 활동적이었다. 학생수로 보면 원안 교생(元案校生) 2백 명, 별안 교생(別案校生) 54명, 동몽(童蒙) 170명이었다. 사내종이 4명, 계집종은 7명에다가 재직(齋直: 상근직원)도 10명이나 되었다. 예전에는 수천명이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가치기준이 혼동되어 가는 시대에 젊은이들도 관심을 갖는 살아 있는 기관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개성을 떠나온 고려인, 궁궐 뒷산을 송악산이라 불러 향교를 나서면 잠시 후 은수물 약수터를 지난다. 잘 정비되어 있는 약수터에서 물 한 잔 마시고 북문을 향해 간다. 숲이 시작되는 길 300m 지나니 갈림길에 북문 1.05km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이제부터는 소나무 숲길이다. 산길 팔부능선으로 편안하게 이어진 길을 걸어 강화산성 북문 진송루(鎭松樓)에 도착한다. 문루(門樓) 밖은 온통 노란 은행잎으로 세상을 덮었다. 강화산성은 본래 고려의 방어성인 외성(外城), 중성(中城), 내성(內城) 중 내성에 가깝게 쌓은 성이라 하는데 숙종 3년(1677년)에 고려의 토성(土城)과는 달리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4개의 대문, 4개의 암문, 2개의 수문이 있다. 성벽을 끼고 산으로 오른다. 정상에는 100년 전에는 북장대가 있었다. 이제는 빈 터만 남았다. 화남 고재형 선생은 1906년 이곳에 올라 감회를 읊으셨다. 石築嵬然北將臺(석축외연북장대) 석축 저 높이 북장대에는 滿山草木有風來(만산초목유풍래) 산 가득한 초목에 바람 불어와 誰能先據宣威武(수능선거선위무) 누가 능히 앞장서 위세를 떨치랴 軍令分明數擧杯(군령분명수거배) 군령도 분명하게 몇 잔 들겠지

강화읍의 뒷산은 송악산(松岳山)이라 불렀다. 개성을 떠나온 고려인들은 개성의 송악산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궐 뒷산을 송악산이라 부른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송악산(松岳山: 在府北一里), 강화부지(江華府誌)에도 송악산, 강도지(江都志)에도 송악산(松岳山: 府之鎭山)이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슬그머니 북산(北山)이 되었다. 조선 초에는 송악산에 봉수대가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는 ‘송악산봉수는 동으로는 통진현 남산에 응하고 서로는 하음성산에 응한다(松岳山烽燧 東應通津縣南山 西應河陰城山)’고 했다. 이 봉수는 후에 남산으로 옮겨갔다. 이제는 북장대도 봉수대도 모두 흔적이 없다.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성벽 길을 따라 간다. 잠시 후 길은 좌측 오읍약수(五泣藥水) 방향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이 평탄해질 즈음 오솔길 좌측 50m 지점에 오읍약수터가 있다. 약수터는 잘 다듬어져 있고 화장실도 잘 갖추어져 있다. 고려 고종 때 강화산성을 쌓으면서 장정들이 목이 말랐는데 청천하늘에 벼락이 치며 깨진 바위 사이에서 맑은 샘이 나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오랜 샘이다. 그 이름 또한 유래가 있는데 피난한 고려시대에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신도 울고 황제도 울고 백성도 울어 오읍(五泣)이 되었다 하니, 나라가 약하면 모두가 눈물 속에서 살게 된다는 교훈을 새기며 마셔야 할 샘물인 듯하다. 오읍 약수를 돌아 나온다. 50m 정도 온 길을 되돌아가면 마을로 내려가는 오솔길과 다시 만난다. 좌측 오솔길로 잠시 내려서면 마을이 나타나고 밭 가운데 작은 당집 같은 한옥이 보인다. 황선신 정려(黃善身 旌閭)이다. 황선신은 1637년 청이 침범한 호란 당시 중군으로 패잔병을 이끌고 갑곶진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이를 본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정려를 내리고 배향케 했다는 것이다. 안내판에는 ‘당시 세자였던 효종’이라 했는데 당시 세자는 소현세자(昭顯世子)였으니 수정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정려 뒤 밭 일대가 송악사(松岳寺) 옛터이다. 이제는 옛절터의 흔적조차 희미하여 몇 조각의 기와편만이 풀 속에 남아 있다. 강화는 고려시대 절터가 적어도 수십 곳은 남아 있거나 이름이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송악산에 사왕사(四王寺)가 있다 했으나 잊혀졌고 오늘 가는 길 주변으로도 왕림사(왕림원:汪林院)지, 범머리사지, 묵왕사지(墨王寺址) 등이 있는데 이미 절터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저 주택 가운데나 경작지 곁에 기와 몇 조각 무너진 석축 일부가 보일 뿐이다. 갑곶나루 위 연미정에서 구재생도(九齋生徒) 교육 다시 나들길로 돌아와 앞으로 나아가면 4거리 차도를 만난다. 길 건너 너머언덕 위로 대산리교회가 보인다. 교회 언덕 너머 좌측 마을 산비탈에 ‘대산리 고인돌’이 자리 잡고 있다. 탁자식(북방식)의 큼직한 고인돌인데 참 잘도 생겼다. 예전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 묏부리 가까이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을 것이다. 이 지역의 유력자였을 고인은 고인돌에 묻혀 영원히 바다로 나갈 꿈을 꾸었을 것이다. 다시 4거리로 돌아온다. 길을 오르면 대월초등학교가 있다. 초등학교와 그 곁에 자리한 씨름장을 끼고 좌로 돌면 나들길은 잠시 산으로 이어지다가 마을길로 내려간다. 도로공사로 길이 여의치 않으니 산길을 버리고 길을 돌린 것이다. 공단공사와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번거로움도 잠시 장무공 황형(莊武公 黃衡)장군 유적지에 도착한다. 공(公)은 중종 때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낸 장군으로 삼포왜란을 평정한 분이다. 사당 장무사(莊武祠) 좌측 산기슭에 공(公)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묘소에 인사드리고 뒤 산길로 오른다. 나들길은 마루금(정상 능선)에 있지 않고 뒤쪽 9부 능선길로 이어진다. 안내 표지목이 적소에 세워져 있다. 무덤길도 지나는데 가슴 아프게 잊혀진 묘들도 많다. 깎여 평지도 되고 나무가 자라 거름이 되기도 한다. 산길 끝나는 지점에 옛 방아간집이 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콩을 털고 계시다. 한 폭 옛그림 같다. 멀리 연미정(燕尾亭)이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연미정(燕尾亭)은 갑곶나루 위에 있는데, 작은 산이 있고 그 아래에서 바닷물이 나누어져 흐르기 때문에 연미(燕尾)라 이름하였다. 하도(下道)에서 조세를 나르는 배가 지나가다가 정박하는 곳이다. 고려 고종 31년(1244)에 시랑(侍郞) 이종주(李宗冑)에게 명하여 구재 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여름 공부)를 시켜 55명을 뽑았다.’고 했으니 고려시대부터 있던 정자였음을 알 수 있다. 조강(祖江;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류)과 염하(鹽河: 강화와 육지 사이 물길)가 만나는 곳이니 염하로 올라 온 모든 물산이 정박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정묘호란에는 이곳에서 후금과 강화하여 아우나라가 되었으니 가슴 아픈 장소이기도 했다. 황형 장군에게 하사되어 장군이 은퇴 후 노년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유수부(留守府)에서 돈대를 설치한 후, 건물은 없어진 채 이름만 남아있던 정자를 1744년 (영조 20년)에 유수 김시혁(金始爀)이 다시 세웠다. 정자는 변함없이 아름답다. 연미정 앞에는 화남선생이 지은 연미조범(燕尾漕帆)이란 시가 세워져 있다.

이제 염하에 세워진 철책선을 따라 남쪽으로 길을 잡는다. 철책 너머는 염하의 물길로 비무장지대이다. 그 뒤로는 김포의 문수산이 보인다. 800m 지나면 우측으로 다리가 보이는데 다리를 건너면 옥개방죽길이다. 개울을 끼고 걷는 방죽길은 상쾌하다. 방죽길 약 1km 걸으면 길은 우측 논 사이 반듯한 농로길로 접어든다. 농로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로 꺾으면 갑룡길로 이어지면서 좌측 산길로 다시 접어든다. 산길 끝나는 지점에 몇 개의 공장이 있고, 길은 염하를 낀 큰길로 다시 이어진다. 고갯마루에 서면 6.25참전유공자비가 서 있다. 고개 넘어로는 강화대교가 보인다. 대교 방향으로 내려오면 우측 당산(만수산) 안쪽으로 해운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다. 옛 진해사(鎭海寺)가 자리하고 있던 절터이다. 진해사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82년(숙종 8년) 서울 방어를 위해 금위영에 소속시켜 승려 일초(一哨)를 총섭(摠攝)으로 삼은 호국사찰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진해사 사적보존위원회’가 1995년 ‘진해사 호국승군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그 앞으로는 진해사의 돌 잔해들이 가득하다. 진해사 앞 성문으로는 복파루(伏波樓)가 있었다 하나 흔적을 찾을 수없다. 복파루에 결려 있었다던 유수 신후재(申厚載)가 읊은 시(詩)만이 전해진다. 붉은 망루 흰 성곽은 청산을 두르고(丹譙粉堞繞靑山) 아름다운 경치는 강화도의 으뜸이네(形勝江都第一關) 방비에서 벗어나 감히 편안함 누리며(敢狃晏安忘備豫) 휴가라도 얻으면 빼어난 경치 즐기네(或因休暇辦奇觀) (강화부지 번역 전재) 나라를 지키는 망중한에 읊은 유수의 객기처럼도 들린다. 1758년에 읊은 시인데 100년이 조금 지나 이곳은 프랑스함대에 의해 불바다가 되었으니 그 시가 빛을 잃었다. 교통편 영등포, 송정역 : 김포 88번 버스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신촌, 홍대, 합정 : 김포 3000번 버스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일산 : 김포 96번 버스 타고 강화군청 하차 부평 : 김포 90번 버스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걷기 코스 버스터미널(군청) ~ 성공회강화성당 ~ 진무영순교성지 ~ 고려궁 지 ~ 북관제묘 ~ 강화향교 ~ 은수물약수 ~ 북문 ~ 북장대지 ~ 오읍약수 ~ 송악사지/황선신 정려 ~ 대산리지석묘 ~ 대월초교 ~ 황형장군묘소 ~ 연미정 ~ 옥개죽방길 ~ 6.25참전유공자비 ~ 진해사지/해운사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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