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철이 되면 전국은 수학능력평가시험의 열기로 가득하다. ‘어떤 대학에 진학하는가’라는 문제가 인생을 좌우하는 것으로 믿는 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시류는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도 많은 관심 있는 사회학자들에 의해 현행 입시제도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논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고 고등교육, 즉 대학교육은 선망의 대상이 돼 왔다. 대학의 존재의의는 국가적으로는 국가를 운영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입신양명을 위한 수단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 하겠다. 입시제도가 바뀔 때마다 이러한 뉴스가 전 국민적인 관심을 끄는 이유는 대학교육은 개인의 성공을 위한 과정, 즉 계층이동의 사다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학의 역사가 오래된 유럽의 경우 1500년까지 유럽 전역에 70여개의 대학으로 늘어났다. 오늘날의 한국처럼 아무나 쉽게 대학을 갈 수 없었다.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지배계층의 자녀가 아니면 대학진학은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20세기 교육의 기회균등 정신보급에 힘입어 계층에 관계없이 시험을 통해서 누구나 성적이 좋으면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길이 마련됐다. 영국의 경우 그동안 지배계층에게 유리한 시험제도였던 ‘11+시험제도’도 교육의 기회균등 운동이 한창 전개된 1959년도에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불합리한 교육제도라고 해서 폐지됐다. 11+시험제도란 당시 영국 국민이라면 11살이 되면 누구나 치러야 하는 시험이었다. 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문법학교(grammar school)에 진학하고 낮은 점수를 받으면 기술학교 또는 근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영국의 교육제도는 ‘복선형’제도였기에 우리나라와는 달리 문법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가져도 대학진학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11+시험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여전히 낮은 계층의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은 그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입시제도의 안일한 개선은 교육의 ‘계층이동의 사다리’역할조차 무색케 한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능력사회를 표방한다. 능력사회란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지위와 부(富)가 결정되는 사회이며, 이에 따라 누구나 계층이동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대학교육을 받으면 입신양명의 길이 보장될 것으로 믿어왔고 지금까지도 믿는 이들이 많다.
그러기에 대학입시제도는 국민이 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식적인 제도여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작금의 대학입시 선발전형을 관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선발전형방법이 몇 가지인줄도 모른다고 한다. 전형방법이 대략 2000여 가지는 될 거라고 한다. 시정에 우스갯소리로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려면 할아버지의 재력, 어머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 자녀의 체력이 뒷받침이 돼야한다는 말이 나돈다. 그냥 웃으며 무심코 지나칠 일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작금의 입시전형방법을 두고 이 나라를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입시설명회를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학부모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그러나 먹고 살기위해 수시로 바뀌는 입시제도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확보하지 못한 채 자책하면서 자녀에게 미안해하는 학부모는 단 한명도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한 공정한 제도적 장치만이 ‘대학입시제도는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라는 논쟁의 불씨를 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싶다. 다시금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어야 이 나라는 교육을 통해 희망이 있는 미래를 보장하는,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확고히 존재하는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 구병두 건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