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예술이 의미가 있을까? 예술은 풍족한 삶의 최후에 누리는 대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죽음 앞에 예술은 무의미할 것이라 치부되곤 한다. 필자조차도 그 생각이 당연하다는 입장에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예술은 어떠한 삶에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론을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철학을 다시금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그래비티는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오기 위한 한 인간의 처절하고도 숨 막히는 과정을 그린 SF 영화이다. 우주라는 신비로운 공간설정과 긴박감 넘치는 구성 면에서 이 영화는 SF장르로 구분되고 그 부분을 초점으로 홍보가 이뤄진다. 일반적인 후기 역시 영상미에 대한 감흥이 위주다. 하지만 이 영화가 훌륭하게 평가를 받는 진정한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우주, 삶에 대한 의지가 가장 아름다운 감동의 예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주인공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블록)는 고장 난 허블 망원경을 고치는 임무를 안고 우주에 갔다가 폭파된 인공위성의 잔해와 부딪히는 사고로 동료들을 모두 잃고 우주미아가 된다. 그녀는 중력이 없어 몸의 움직임을 제어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무산소증으로 갖은 고생을 한다. 무엇보다 두렵고 힘든 것은 교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맷 코왈스키 박사(조지클루니)가 우주의 좋은 점을 물었을 때 스톤은 고요함이라 답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생에 대한 의욕이 없는 스톤의 상태를 말해준다. 그런데 죽을 것 같은 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계속해서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며 최악의 상황을 극복해나간다. 평소라면 혼선으로 인해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인의 대화가 소음으로 들리겠지만 죽음의 문턱에서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노랫소리처럼 느껴진다. 이 과정을 통해 스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180도 변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사랑했던 기억, 고마웠던 기억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맷 박사가 스톤을 살리기 위해 서로를 묶고 있던 밧줄을 놓는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예견된 죽음을 앞두고도 아름답게 펼쳐진 해돋이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예술 같은 장관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유쾌하게 표현한다.
죽기 직전 인간에게 있어 그림 같은 풍경은 살고 싶게 만드는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운다는 사실을 이 대목에서 깨닫는다. 시각적 유희라는 것은 사람의 가슴을 충만하게 함으로써 살아있음에 대한 고마움을 안겨준다. 나아가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에서 예술의 존재감은 확연해진다. 미술전시는 나를 삶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갤러리스트로서 많이 듣는 이야기는 예술은 다가가기 어렵고, 생존 앞에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내용이다. 이제 그러한 통념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새해 첫날 성산일출봉에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의 추운 바람을 가르며 그곳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때 보게 되는 일출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한 해를 살아갈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 속의 풍경이 곧 미술이고, 사람들의 숨소리와 말소리가 음악이라 느낄 줄 안다면 진정 예술 작품에서 얻는 위안은 상상 이상으로 커질 것이다. 영화 그래비티는 생명체로서 지구상에 두발을 붙이고 살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게 한다. 주인공이 죽음의 기로를 거치고 다시 대지를 밟는 장면에서 그녀는 앞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삶을 살아갈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 죽을 만큼 힘들 때 그래비티의 주인공의 상황에 자신을 이입시켜 보는 것을 제안해 본다. 그 이후에 보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미술전시는 나를 삶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같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살아서 볼 수 있는 좋은 것들이 세상에 많다는 생각, 힘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치유는 시작된다. - 신민 진화랑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