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의 어느 주말 강원도 W골프장에서 Y선배와 몇 년 만에 라운드를 했다. 우리는 동종업계 선후배 사이로 같은 골프장 회원일 때 늘 스트로크 내기 혈전을 벌이던 골프계의 맞수였다. 그래서 과거 몇 년 동안 자주 라운드를 했을 당시, 필자는 라이프 베스트로 72타 이븐파를 쳤고, Y선배 역시 70대 중반 싱글 스코어를 기록하며 서로 축하패를 주거니 받거니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던 우리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서로에게 뭔가 보여주려고 지나친 의식을 한 탓이었는지, 첫 세 홀에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4번 홀에서 우리는 같이 파를 잡으면서, 이제는 ‘화면 조정이 끝났다’라고 선언했고, 그 다음 파3홀에서도 함께 연속으로 파를 잡으면서 옛 경기 감각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6번 홀은 340미터의 오르막성 파4홀이고 비교적 난이도가 높은 홀이었다. 함께 동행하던 캐디가 그 홀에 대해 “까마귀가 볼을 가끔 물어갑니다. 아마도 골프공을 좋아하나 봐요!”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 홀에서 필자의 티샷은 페어웨이 좌중간에, Y선배의 샷은 페어웨이 우측 끝에 떨어졌다. 경사진 러프에 흰 눈이 조금은 남아 있어 Y선배는 필자가 건네준 볼빅사의 오렌지 컬러 볼을 쓰고 있었다. 선배의 볼이 지면에 떨어지자마자, 어디선가 나타난 까마귀 한 마리가 저공비행하며 볼 쪽으로 날아들었다. Y선배가 “야! 이놈아 저리가!”라고 힘껏 외쳐봤으나, 그 까마귀는 오렌지색 볼을 낼름 물더니 50미터쯤 옆의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아서 ‘재주 있으면 네 볼을 찾아가 봐라!’하며 놀리는 것 같았다. Y선배가 조금은 화가 났는지 “이 놈의 까마귀가 지난번에도 물고 가더니…”라고 푸념하며 원구가 있던 곳에서 제2타(※)를 날렸지만, 그 볼은 그린 앞의 계곡에 떨어지고 말았다.
Y선배는 계곡 앞에서 씩씩대며 4타를 날렸지만, 그린에 떨어진 볼은 가장자리로 굴러가 버렸다. 그런데 까마귀가 또 날아들자 Y선배는 고함을 몇 번 쳤고, 그 후에는 평정심을 잃었는지 가까운 거리에서 쓰리 퍼트로 트리플 보기를 기록했다. 6번 홀의 그린을 떠나며 그는 “너무 많이 떠들고 소리쳤어.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면 볼이 잘 맞지 않는데…”라며 뇌까렸다. 결국 까마귀가 물고 가버린 볼 때문에 연속된 파의 리듬이 깨져, Y선배는 나머지 12개 홀에서 파를 한 번 밖에 못한 실망스러운 라운드로 끝이 났다. 남산의 전통 활터 국궁장인 ‘석호정’에 가면 사대(射臺) 옆의 큰 돌에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이는 활을 쏠 때는 입을 닫으라는 말인데, 골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18홀 내내 주절거리며 플레이하는 명랑(?) 골퍼에게서는 좋은 스코어를 기대하기 어렵고, 그런 동반자와 함께 하는 라운드 역시 모두 ‘봉숭아학당 골프’로 하향평준화 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자 경험이다. 25년 전 골프 입문 시 어려운 프로 선생님께 엄격한 골프 예절을 배웠다. 그 분이 퍼팅할 때에 실수로 그림자를 만들었다가 혼줄이 난 적도 있었고, 프리샷 루틴 들어갈 때 질문했다가 호된 질책도 받았다. 그때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골프는 입으로, 실력도 운도 다 새 나간다”는 것이었고, 그 이야기는 초등학교 골프 선수였던 아들에게도 똑같이 전해졌다. 지금도 필자는 동반자와 함께 걷거나 골프카 안에서는 자주 농담을 하지만, 플레이 도중에는 말을 많이 아끼는 편이다. ※골프 룰에 따르면 “정지하고 있는 볼이 국외자(Outside Agency)에 의해 움직여졌을 때 플레이어는 벌타 없이 다음 스트로크를 하기 전에 리플레이스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 김덕상 골프칼럼니스트협회 명예이사장(OCR Inc.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