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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작가의 ‘세종의 독서와 공부’]세종은 의대열풍을 어떻게 이해할까?

세종의 관심은 기초의학과 응급의학, 돈과는 거리 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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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58호(송년) 박현준⁄ 2013.12.23 14:22:33

“명나라 의사 장본립에게 두세 번 약에 대해 물었다. 물품으로 답례하고자 한다. 어느 정도로 인사를 해야 할까.” <세종실록/13/09/18> “어느 대학 나왔어요?” 환자가 병원에서 원장의 출신학교를 묻는 질문이다. 10여 년 전까지는 이런 질문이 왕왕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의사의 출신학교는 거의 묻지 않는다. 어느 학교든 의과대학 입학이 극히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보면 최우수 그룹에서도 일부만 합격한다. 2013학년도 입시에서는 수학과 과학 국제올림피아드에서 메달을 딴 영재가 의과대학 입시에 실패하기도 했다. 공부 국가대표가 의과대학에 떨어진 것이다. 의과대학 열풍은 고성장에서 저성장 사회로 넘어가는 게 큰 원인이다. 직장인들의 급여소득 증가세의 둔화나 감소, 경영의 어려움 등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입이 보장되는 직업군은 인기가 당연하다. 이는 의사 지망생 중에서도 기초의학이나 응급의학 전공자는 부족한 반면 성형외과 안과 피부과 등이 인기폭발인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의사는 중인 계층이었다. 사회적으로 우대되는 계층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종은 의사에 대해 신경을 썼다. 의료 자주를 위해 수준 높은 의사 양성과 질 높은 의료시스템 정비를 서둘렀다. 세종의 관심은 인간의 생명이었고, 기초의학이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성형외과, 피부과, 안과와 같은 돈 버는 의료인 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료발전을 위한 흉부외과나 응급의학과, 외과, 내과 등과 함께 기초의학이 관심사항이었다. “명나라 의사 장본립에게 두세 번 약에 대해 물었다. 물품으로 답례하고자 한다. 어느 정도로 인사를 해야 할까.” 세종이 13년(1431년) 9월 18일 중국인 의원에게 물품 하사할 뜻을 비쳤다. 명나라 사신 일행으로 온 그에게 조선의 의관은 약리에 대해 질문했었다. 사례로 안숭선은 삼베 5필을 건의했다. 그러나 임금은 너무 많다는 의견을 낸다. 예전에 사신을 따라온 태의를 불러 진맥 후 베 6필을 내린 것을 감안할 때, 약만 질문한 이번에 베 5필을 줌은 과하다는 지적이었다. 논의 끝에 장본립에게는 모시와 삼베 각 두 필씩을 주었다. 세종은 의료를 통한 백성 삶의 질 향상을 도모했다. 의약으로 백성을 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료 상황은 열악했다. 권채는 향약집성방 서문에서 “예로부터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여 약을 시기에 맞추어 채취하지 못했다. 사람이 병들면 반드시 중국의 얻기 어려운 약을 구하려고 했다. 이는 7년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나마 약은 구하지 못하고 병은 깊어져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당시 현실을 적었다.

죄수의 건강상태도 관심, 형조에 각별 지시 임금은 이 같은 상황을 안타깝게 여겼다. 우리 땅의 약재로, 중국으로 나가지 않고 치료하는 방법을 찾았다. 권중화가 여러 책에서 발췌해 향약간이방을 짓고, 조준 등과 더불어 목판으로 간행했다. 이로써 약을 구하는 상황과 치료 여건이 다소 나아졌다. 하지만 중국에서 나온 의료서적이 적고 약명도 중국과 다른 것이 많아 큰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의관들도 의료 환경을 탄식할 정도로 여전히 열악했다. 임금은 해결책을 국내와 국외에서 찾았다. 먼저, 우리 산야에 무진장 자생하는 약초에 주목했다. 멀리 떨어지면 풍속과 음식이 달라지듯, 치료도 지역의 약재가 좋다는 인식이었다. 산과 바다에는 무진장한 약재가 있었다. 전국의 약초 실태파악에 나섰다. 6년(1424년) 11월에 8도의 관찰사에게 지역의 약초 분포를 세밀하게 조사하게 했다. 약초의 채집과 재배를 위한 사전지식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노력의 과정에서 각 약초 채취에 알맞은 시기를 정하고, 약초 생산지를 표시했다. 희귀약재는 사용을 엄격히 하고, 남방계 약재는 제주도에서재배를 시도했다. 또 명나라에 의관을 파견해 의서를 구입하고 국내 약초의 약리작용에 대해 알아오게 했다. 이와 함께 중국 의원의 조선 방문을 환영했다. 교류를 통한 학술회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 온 태의 장본립과 요동 의생 하양은 세종을 진맥하기도 했다. 향약의 효능 검증과 당약과의 비교, 향약의 산지 분포 조사, 약초의 채취 시기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자 세종은 13년(1431년)에 행약집성방 편찬을 지시한다. 우리 의학과 약으로 백성을 치료하고 싶어 한 세종은 의료기관을 확충했다. 중앙의료기관인 전의감, 왕실의교기관인 내의원, 일반백성을 위한 혜민서, 무의탁 병자와 전염병 환자를 돌보는 동서활인원 등 네 기관을 설치했다. 의녀제도를 보완해 여자 환자들이 제 때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의관의 선발도 현실화했다. 3년(1421년) 4월에는 의원이 공부에 등한시 하지 않도록 처음으로 궁중에서 의서를 읽게 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의관을 제주도와 함경도 등의 오지에도 보내 전국적으로 의료혜택을 받도록 했다. 특히 감옥의 죄수들의 건강 상태도 신경을 썼다. 침술기관인 제생원과 동서활인원의 의료진이 교대로 죄수들을 진료하게 했다. 또 이의 실효성을 위해 형조에 의료진의 진료에 협조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이 때는 법의학도 발달했다. 형사사건의 공정을 기하는 방편으로 의관들의 협조를 얻게 했다. 세종은 살인사건의 검시를 안내한 신주 무원록을 인쇄하여 관리들에게 배포했다. 죽음의 원인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 6차례까지도 검시를 하게 했다. 세종에게 의학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원한 없이 공정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이었다. 박애주의와 인본주의였다. 요즘 의술은 기초의학보다는 성형외과 등의 미용의학에 의사들이 몰리고 있다. 세종이 이 현상을 본다면 손을 내저었을 것이다. - 글쓴이 이상주 서울시민대학에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을 강의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또 여러 단체에서 ‘조선 명문가 독서 이야기’, ‘부모와 아이가 함께 듣는 세종의 공부법’, ‘CEO책쓰기’, ‘내 삶의 스토리 글쓰기’, ‘합격 자기소개서 작성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위원으로 지은 책은 ‘세종의 공부’,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10대가 아프다’ 등이 있다. 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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