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독특한 음주 문화 중에 술잔 돌리기가 있다. 술잔 돌리기는 자기가 마시던 술잔으로 상대에게 술을 권하는 문화이다. 즉, 그 술잔을 받은 사람은 그 술을 마시고 나서, 권한 사람에게 다시 되돌리거나, 또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도 한다. 다른 나라들처럼 각자 술잔으로 마시지 않고, 왜 그럴까? 술맛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는 각종 모임이 많다. 예를 들면 동창회, 향우회, 직장 동호회 등이 있고, 동창회만 하더라도 초등학교 동창회부터 대학 동창회까지 있다. 또 동창회 내에서는 반창회, 친한 친구끼리 소모임도 있다. 동기들뿐만 아니라 선후배 간 동문회도 있다. 학연 하나를 가지고도 이렇게 많은 모임을 문어발처럼 만들고 있다. 이런 모임의 회식에서 술잔 돌리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술잔을 돌리면 술을 많이 마시게 되고, 모임이 많으면 시간과 비용도 많이 소요되는데, 왜 그런 문화가 성행하고 있을까? 그렇게 해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을까? 모임의 회식이 시작되어 어느 정도 취기가 돌면, 누군가가 술잔을 돌리기 시작하고 그 술잔은 회식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회식이 끝나면 다른 장소로 이동해서 술자리는 계속 이어진다. 이것이 우리의 음주문화이다. 이런 음주문화의 특징에는 술잔 돌리기, 차수변경, 폭탄주 등이 있다. 술잔 돌리기는 우리 고유의 문화이지만, 차수변경은 중국과 일본에도 있다. 차수변경은 술 마시는 장소를 변경해 가면서 여러 차례 마시는 것을 말한다. 1차는 주로 회식형태로, 모든 사람들에게 참여를 권하지만, 때로는 강제성을 띄우기도 한다. 그러나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점점 친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된다. 이때에는 폭탄주를 마시는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짧은 시간에 취하기 위해서이다. 술잔 돌리기는 상대를 대접하는 의미로 자기가 마신 술잔에 술을 따라 상대에게 권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러 사람이 모인 회식자리에서 처음에는 각자가 자작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광경을 생각해보자. 그런데, 누군가 맨 먼저 나에게 술잔을 내밀며 술을 권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아마도 여러 사람 중에서 나에게 우선해서 베푸는 대접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나도 그 술을 마시고 술잔 임자에게 술잔을 되돌리며 답례로 술을 권한다면, 서로간의 대접이 된다. 계속 자작만 했다면 아무 대접도 주고받지 않은 셈이지만, 술잔 돌리기를 하면 서로 대접을 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술잔 돌리기 통해 끈끈한 인관관계 형성 또 술잔 돌리기가 여러 사람을 상대로 여러 번 거듭될수록, 서로 간의 대접은 마치 거미줄처럼 주고받게 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자작만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형성이 안 되지만 술잔 돌리기로는 거미줄처럼 복잡한 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서로간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끈끈한 인관관계가 형성되어 절친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술잔 돌리기는 서로 침을 교환하게 되어, 감기, 헬리코박터균, 간염균 등이 전파될 수도 있는 부작용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끈한 인간관계의 형성을 위해서는 감수하겠다는 사람이 아직도 상당수인 것 같다. 최근 관동대학교 지역보건 및 복지연구센터가 강릉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술잔 돌리기 문화에 대한 지지도 조사에 의하면, 남성은 44.6%, 여성은 24.2%가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술잔 돌리기는 회배(回盃)라고도 하여,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좋은 전통이었다. 회배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에 포석정(鮑石亭)에서 행해졌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에서 회배를 찾을 수 있다. 유상곡수연은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詩)를 짓는 놀이이다. 또 신라 화랑들은 공생공사를 다지기 위해 한솥 차를 나누어 마시기도 했다. 시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목숨을 거는 맹약의 증표로서 짐승피를 한 잔에 부어 돌려가며 마셨다. 술잔 돌리기의 진화론적인 해석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서도 회배의식이 행해졌다. 관공서에서는 철따라 음주모임을 열고, 대포(大匏, 커다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상하 구별없이 술잔을 돌려가면서 일심동체를 다지는 의식이었다. 각 관청마다 음주모임이 열리는 시기를 따서 대포잔에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면 교서관은 열리는 시기가 복사꽃이 필 때이므로 홍도배(紅桃杯), 예문관은 장미가 피는 초여름이므로 장미배(薔薇杯), 성균관은 여름에 열리므로 벽송배(碧松杯), 사헌부는 아란배(鵝卵杯)라고 했다. 아란배는 ‘거위알 술잔’이란 뜻으로 금주령을 어긴 것을 경계하자는 뜻으로 만든 것이다. 민간의 혼례에서도 합근례라 하여 표주박 술잔에 술을 따라 신랑과 신부가 입을 맞대고 마시는 절차가 있다. 제사에서도 조상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로 참석자가 돌아가며 술을 마시는 음복(飮福)풍습이 있다. 이와 같이 술잔 돌리기는 통일신라시대에 여러 사람이 놀면서, 신라 화랑들은 공생공사를 다지기 위해, 목숨을 거는 맹약의 증표로서, 조선시대에는 관공서에서 일심동체를 다지기 위해, 혼례에서 화합을 위해, 제사에서 조상님과 함께 하기 위해 행해졌다. 특히, 현대인은 술잔 돌리기가 비위생적인 것을 알면서도, 상당수가 끈끈한 인간관계를 위해 술잔돌리기를 감수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끈끈한 인간관계는 우리의 의식 속에 중요한 덕목으로 오랫동안 폭넓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현대에서는 인간관계를 이용하여 업무를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분야에 걸쳐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해 놓으면, 친구, 동료, 선후배, 지인에게 자기가 해결하기 곤란한 일을 부탁하기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과거 농업사회에서 예로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풍속이었던 두레나 품앗이에서도 인간관계는 중요했다. 두레나 품앗이는 우리 농촌사회에서 모내기나 김매기 때와 같이 단기간 내에 대규모의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투입해야 할 때 관행(慣行)으로 되어 왔다. 이때에도 폭넓은 인간관계는 위력을 발휘했을 것 같다. 두레나 품앗이를 친한 사람끼리 먼저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조직의 단합력 강화가 또 하나의 기업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의 100대 기업이 글로벌 100대 기업보다 1인당 경제적 부가가치(EVA)가 16% 더 높다”고 한다. 북방형의 사냥에서 보면 폭넓은 인간관계가 사냥팀에 참가하는 것과 팀워크 맞추기로 이어져 생존과 직결되었을 것이다. 술잔 돌리기는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북방형이 술잔 돌리기에 더 적극적일 것이다. 북방형이 동물사냥으로 먹이를 구하는 반면, 남방형은 열매따기와 조개잡이로 먹이를 구했기 때문이다. 이런 해안채집은 소수 인원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대규모 인간관계 형성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모임 등에서 식대를 “내가 낼께”하며, 서로 지불하려고 경쟁하는 진풍경이 자주 벌어진다. 이 또한 우리 고유의 풍습인 것 같다. 이렇게 경쟁하는 사람들은 매우 부유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손해인지 모르는 사람들일까? 이런 광경은 더치페이(Dutch pay) 문화에 익숙한 일본인, 서양인 등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자기 식대만 내면, 서로 부담이 없고 합리적일 텐데”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장면만 보면 그럴 수 있다. ‘식사하고 가라’ ‘자고 가라’ 그러나 모임의 횟수가 거듭될 때마다, 식대를 내는 사람은 달라진다. 우리는 대접을 받으면, 대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임의 횟수가 거듭되어 모임에 속한 사람들이 거의 한 번씩 식대를 지불했다고 가정한다면, 1인당 지불한 식대는 거의 균등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식대지불문화와 더치페이문화는 무엇이 다른 것인가? 장기간으로 보면, 두 문화 모두 1인당 지불하는 평균금액은 거의 유사하지만, 인간관계의 형성과 만족감은 크게 다를 수 있다. 대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배려했다는 흐뭇한 생각이 들어 만족스럽다. 여러 번 하면 만족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한편, 대접받는 사람은 잘 먹어서 고맙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서로 주고받게 된다. 이런 모임에서는 마음을 주고받아, 인간관계가 한층 더 끈끈하게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술잔 돌리기의 또 다른 형태로 보인다. 집에 온 손님에게 ‘식사하고 가라’ 또는 ‘자고 가라’고 권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룩해 놓은 독특하고 좋은 문화라고 생각된다. 이런 문화로 점점 개인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에서 훈훈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치페이문화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문화를 어떻게 생각할까? “인적 네트위크 중시한 회식문화의 단면” 1000명당 음식점수 미국의 7배, 일본의 2배 이상 우리나라에는 동창회, 동호회, 향우회 등 학연지연과 취미를 통한 모임이 많이 구성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직장 내에서도 같은 해에 입사한 동기회, 같은 학교 출신의 동문회, 취미가 같은 여러 종류의 동호회도 있다. 또 지방출신이라면, 향우회도 있고, 별도의 연고는 없지만 지인들끼리의 동호회도 상당수 있다. 이들 모임에서는 이제까지 많이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친숙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기 쉽다. 개인에 따라 가입되어 있는 모임의 수는 다르지만 대충 짐작해 보면, 동기동창회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4개, 반창회와 동호회 등 2 ~ 3개, 동문회에서는 1 ~ 2개, 직장에서는 2 ~ 4개, 향우회에서는 0 ~ 2개, 지인동호회에서는 1 ~ 3개 등으로 10 ~ 18개에 이른다. 이들 모임은 성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1년에 2 ~ 3회의 저녁회식을 갖는다고 가정하면, 1년에 1인당 참석해야 할 회식의 수는 20개 ~ 54개 정도에 이른다. 또 직장에서 부서별, 퇴근 후 소모임, 업무관계, 번개팅, 친분관계, 돌잔치, 결혼식 등을 합하면 1 주일에 0.5회 ~ 2회 정도는 회식을 가질 것으로 추산된다. 인적 네트워크가 다양한 사람은 저녁도 모자라 조찬을 갖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들 회식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못해도 가족들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 서양에서는 동창회는 모든 학교가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명문대학, 명문고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회식도 별로 하지 않는다. 또 회사에서 회식도 1년에 1 ~ 2회 정도라고 한다. 이로 인해 직장인들은 퇴근 후에 곧 바로 가정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문화이다. 한국에는 이렇게 모임이 많기 때문에, 음식점수도 많은 모양이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1000명 당 음식점 수는 한국은 12.2개로, 미국 1.8개의 7배, 일본 5.7개의 2배 이상이다. 그만큼 우리의 인간관계는 미국과 일본보다 끈끈하고 복잡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최창석 명지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얼굴은 답을 알고 있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