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전시 - 그래픽 노블]만화, 예술로귀환하다
한중일 대표 작가 3인이 넘나드는 만화와 예술의 경계
▲이동기, ‘여인’. acrylic on canvas, 90 x 160 cm, 2013.
[서울=CNB]왕진오 기자= 게임과 애니메이션, 만화 등을 비롯한 하위문화(sub-culture)를 겪으며 80,9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이동기, 쑨쉰, 코이치 에노모토 작가가 상상의 세계에서 내면의 자아를 형성하도록 만든 만화를 가지고 재미난 전시회를 마련한다.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지칭하는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을 통해서다. 1월 7일부터 2월 20일까지 서울 청담동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만화와 예술을 넘나드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한중일 3인 작가의 작품 30여점이 선보인다.
‘그래픽 노블’은 미국과 유럽의 만화를 통칭하는 용어다. 냉전 이후 자본주의가 급속히 팽창하던 시기에 유행하던 수퍼 히어로물에서 벗어나 문학성과 예술성이 강조된 새로운 양식이었다.
오랫동안 발달해온 유럽의 소설적 상상력과 복잡한 스토리 라인을 바탕으로 회화적인 표현력을 갖춘 그래픽 노블은 하위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애니메이션 마니아 집단의 광적인 취미활동이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발전한 결과물이다. 아이들의 취향과 유치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안해낸 개념이다.
▲쑨쉰, ‘Some actions which haven’t been defined yet in the revolution’.
1970년대 초, 일본에서도 ‘오타쿠(otaku, 御宅)’ 라 불리는 광적인 애니메이션 마니아 집단이 출현했다. 이는 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하나의 문화로 변형되어 한국과 중국으로 확산됐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 3인은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게 만화를 현대 미술의 영역으로 남다르게 지속시켜 온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드라마 장면을 평면 텔레비전 크기의 아크릴 회화로 재구성하는 이동기, 전통적인 목판화 양식으로 애니메이션 영상을 제작하는 쑨쉰, 만화와 추상 회화의 환상적인 혼합을 보여주는 코이치 에노모토는 각기 속한 사회의 현대인의 모습과 대중문화를 신선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아토마우스’라는 미국의 미키 마우스와 일본의 아톰을 합성해 만든 캐릭터로 잘 알려진 이동기(47)작가는 아토마우스를 회화적 화풍을 통해 대중에게 친근한 방식으로 구현하거나 색, 선 등과 같은 추상 회화의 언어들을 의도적으로 충돌시키며 상반된 둘과의 관계를 화면 안에 부각시켜왔다.
다양한 방식으로 팝아트적인 캐릭터와 추상회화라는 같은 이질적인 두 코드가 결합된 결과물은 소통과 융합이 어려운 우리 사회의 일면을 반영한다,
▲코이치 이노모토, ‘around the world + melting square’. oil on canvas, 194 x 130cm, 2010.
이동기는 최근 TV 드라마 이미지를 차용한 회화 작업을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신작과 기존 아토마우스 작품들을 함께 선보인다.
중국 출신의 쑨쉰(34)작가는 1∼2세대 중국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냉소적 사실주의나 정치적 팝아트 성향에서 벗어나 구축된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중국인의 일상적 삶을 다각적 탐색의 틀을 구현한다.
흑백의 톤으로 인해 디스토피아의 서곡처럼 보이는 작품은 상상력이 즉흥적인 연극으로 발화된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마술사를 비롯해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대중, 전염균병을 옮기는 곤충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공포에 반응 하는 인물들은 중국의 의도적 삭제와 망각에 대한 개념을 뒤섞음으로써 시스템에 의해 학습된 개인의 인식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쑨쉰, ‘Some Actions Which Haven’t Been Defined Yet in the Revolution’. 12 minute, 2011.
애니메이션 마니아의 광적인 취미활동이 승화
비디오와 조각, 그리고 집필의 범위를 넘나드는 일본 출신 코이치 에노모토(37)의 대표적 이미지는 기하학적 패턴으로 장식된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관람자를 응시하는 소녀의 희미한 미소는 현실세계에 내려온 천사나 구세주와 같은 비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최근 그는 미국 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업을 통해 기존에 보여주었던 정리된 세계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전체가 혼돈으로 바뀐 장면을 연출한다.
▲이동기, ‘침대에서’. acrylic on canvas, 140 X 240 cm, 2013.
작가가 묘사하는 오늘은 폭력과 잔인함, 그리고 부조리가 만연한 모습이다. 인간의 욕망과 존재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는 이러한 세계의 일면을 화면에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존재의 가벼움을 가진 만화적 캐릭터들의 무게와 오늘을 살아가는 세계의 참담한 현실의 무게와의 차이가 클수록 관람자는 작가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향한 관점을 이해하게 되고, 그 깊이 또한 커진다는 사실을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주지시키고 있다.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