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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45 上]양평 용문사 ~ 잊혀진 절터 ~ 기와가마터 ~ 상원사 ~ 보리갑사지 ~ 연수리

낭만 실린 중앙선기찻길, 역사의 향기도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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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61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4.01.13 14:38:40

중앙선 열차가 전철화되면서 한 발에 다가온 나들이길이 양수리와 양평지역이다. 중년을 넘어선 세대들에게 북한강을 끼고 달리는 경춘선과 남한강 곁을 지나 팔당과 양수리, 양평, 용문, 간현, 문막으로 달리는 기찻길은 잊을 수 없는 낭만의 길이었다. 이제는 전철이 된 중앙선길을 달려 용문역에 내린다.
전철역을 나서면 바로 용문사행 버스정류장이 있다. 터미널에서 매시 정각과 30분에 출발하는 버스인데 역 앞까지는 단 2분이 소요되니 매시 2분과 32분이면 어김없이 용문산행 버스가 나타난다. 참 편하기도 하여라.
그 옛날 용문산에 가려면 용문이나 지평에서 내려, 오지 않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다가 지친 나머지 아예 산까지 그 먼 길을 걸어갔던 기억도 있다. 용문산 가는 길에는 왜 그리 뱀탕집도 많았었는지… 생각하면 요즈음 TV에서 소개하는 동남아 미개발국 어느 시골 같았다.
추억을 곱씹어 볼 시간도 주지 않고 버스는 20분여 분만에 용문산 사하촌에 도착한다. 앞으로는 용문산의 우뚝한 자태가 마주 보인다. 
백두대간 오대산에서 힘찬 산줄기가 서쪽으로 가지를 펼쳐 내려오면서 계방산과 운무산, 대학산, 오음산, 갈기산을 지나 용문산에 이른다. 청계산에서 두물머리로 산 기운을 전하는 한강기맥(漢江岐脈)의 주요 거점산이다.
양근군(陽根郡: 양평의 옛지명) 읍지에 소개된 용문산은 “일명 미지산인데 군소재지의 동쪽 20리에 있다. 횡성 봉복산에서 와서 군의 주맥이 된다. 또 지평현의 경계가 된다(一名彌智山 郡東二十里 自橫城鳳腹山來爲郡之主脈 又界砥平縣)”고 하였다. 지평군읍지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미지산은 현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즉 용문산이다(彌智山在縣西二十里 卽龍門山)”이라 했으니 당시에는 용문산과 미지산이라는 이름을 함께 썼던 것이다. 

▲용문사 일주문


용문산은 산도 유명했지만 절도 많았다. 우암 송시열과 예학(禮學)을 다투었던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眉叟 許穆)은 미수기언(眉叟記言)에 미지산기(彌智山記)를 남겼는데 그 내용을 보면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용문산에 대해 알고 있던 이해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자세하다.

백두대간 한강기맥의 거점 용문산(미지산)엔 수많은 절
“미지산은 서울에서 동쪽으로 150리 지점에 있다. 미지산 정상은 가섭봉(伽葉峰)이며 가섭봉 북쪽이 미원(迷源)과 소설(小雪)이다(현 가평 설악면). 그 북쪽은 옛 맥(貊) 땅으로 지금의 수춘(壽春)과 화산(花山) 지역인데, 산수가 가장 깊다. 가섭봉 아래에는 묘덕암(妙德庵)과 윤필암(潤筆庵)이 있고, 윤필암 아래에는 죽장암(竹杖庵)이 있다. 죽장암 남쪽에는 상원사(上元寺)가 있는데, 옛날에 혜장대왕(惠莊大王, 세조)이 이 절에 거둥하여 도량(道場)을 중건하고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는데 태학사 최항(崔恒)으로 하여금 이를 시행케 했다. 
상원사 아래에 묘적암(妙寂庵)이 있는데, 묘적암 아래에는 고려 때 보리사의 탑비(菩提塔碑)가 있다. 용문사는 미지산에서 가장 큰 가람(伽藍)이다. 혜장대왕 때 용문사에서 범종을 대대적으로 주조하였는데 불사(佛事)가 매우 엄숙하였으며, 왕이 백팔불주(百八佛珠)를 하사하여 삼보(三寶)로 보관하고 있다. 용문사 아래에는 용문은자(龍門隱者: 명종 때 이곳에 은거한 조욱(趙昱))의 사당(祠堂)이 있다.
(彌智山京城東百五十里。彌智絶頂伽葉。伽葉北迷源,小雪。又其北古貊地。今壽春花山。山水最深。迦葉下妙德,潤筆。潤筆下竹杖。竹杖南上元。古時惠莊大王幸上元作逆釐道場。仍圖畫其事。令大學士恒識之。其下妙寂。妙寂下有高麗普提塔碑。龍門最大伽藍。惠莊時。大鑄佛鐘於龍門。佛事甚嚴。賜佛珠百八。藏三寶。龍門下有龍門隱者祠)“

▲매월당의 시


이제 용문사 사역으로 들어간다. 이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많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살펴보니 문인 소객(騷客)들이 용문산에 대해 읊은 시(詩)를 비석에 새겨 세워 놓은 것이다. 서거정과 김안국, 유득공, 이식, 이정귀, 매월당, 다산 등 10여 분의 시비가 서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다산의 시 한 수 짚고 가고 싶다.
이곳 비석에 새긴 시는 ‘용문산 바라보며(望龍門山)’인데 다산시문집에 실린 다른 시 한편 읽는다. 아마도 미수기언에 실린 은자에 대해 쓴 것 같다.
- 한촌 조 일인에게 적어 부치다(簡寄閑村趙逸人) 
용문사 아래서 헤어질 제 (龍門寺下別)
가을 나무 쓸쓸하기만 했었지 (秋樹憶蕭森)
초막집 옮기기가 어찌 쉬우랴 (白屋移何易)
푸른 산 더 깊이 은거하였네 (靑山隱更深)
풍속이 순후하니 주갈을 해소하고 (俗淳蘇酒渴)
마을 궁벽하니 시를 넘치게 짓네 (村僻恣詩淫)
부끄러워라, 포류처럼 쇠약한 몸으로(蒲柳慚衰弱)
공연히 오악을 구경하고자 한다오 (空懷五嶽心) (기존 번역 전재)

▲용문사 부도군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제는 용문사 아래가 어디인들 궁벽하며 어디인들 쓸쓸하랴. 은거할 곳은 더 이상 없는 듯하다. 아직도 용문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맑아 반딧불이가 번식하는지 계곡에는 ‘반딧불이 서식지’ 표지판이 붙어 있다.
시비가 서 있는 반대편 쪽에는 양평군환경농업박물관이 있는데 그 옆쪽으로 용문산전투전적비가 아담하게 자리 잡았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63군을 맞아 용문산지구를 지켜낸 6사단과 학도병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이른바 용문대첩이라 할 만큼 수적 열세를 무릅쓰고 이룬 전과라 한다.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제단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 그 이름이 호국영목은행수제단(護國靈木銀杏樹祭壇)이다. 용문사에서 얼마나 1000년 은행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기는지 알 것 같다. 절로 향하는 길은 비록 포장도로이지만 숲도 우거지고 개울도 끼고 있어 상쾌하다. 이윽고 우측 계곡에 걸린 출렁다리를 만난다. 그 출렁다리 건너 산 길 100m 위쯤 되는 곳에 보물 531호로 지정된 정지국사(正智國師)의 비(碑)와 승탑(僧塔:浮屠; 수행승려의 사리탑)이 30m 쯤의 거리를 두고 서 있다. 

▲탑넘어 은행나무가 보인다


세조와 1000년 은행나무 그리고 고승 정지국사의 비
정지국사는 고려말 조선초 고승이다. 비는 이 스님이 입적한 후 기록한 것으로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워 쉽게 읽을 수는 없다. 다행히 봉은사와 그 말사를 기록한 봉은본말사지에 이 비석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지난 날 용문사는 봉은사의 말사였기에 봉은본말사지에 기록이 남은 것이다.
비문은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양촌 권근(權近)이 지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사는 1324년 태어나 19세에 장수산(長壽山) 현암사(縣菴寺)로 출가했고 1395년에 입적하였다. 그러니 춘추는 72요 법랍은 54였다.
1353년에 무학대사와 함께 북경의 법운사(法雲寺) 지공(指空)스님에게 공부하고 오대산으로 가 벽봉(碧奉)스님에게 공부하였다. 환국하여서는 산 속에 들어 수행에 몰두하였다. 같은 유학파 나옹(懶翁)과 무학(無學)은 세상에 나아가 이름이 알려지고 왕사가 되었으나 스님(승명 智泉)은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겨 산간에만 숨어 있을 뿐(韜光晦跡 潛隱雲山)이었다.
천마산 적멸암(寂滅菴)에서 입적하였는데 찬란한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이에 태조가 정지국사(正智國師)란 시호를 내렸고 상좌 조안(祖眼) 등이 미지산 용문사에 부도를 세워 사리를 봉안하였다. 이 부도와 비는 이런 연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승가(僧家)나 속가(俗家)나 이름을 내는 이 있고 감추는 이가 있는 것 같다. 600년 전 그 시절의 승가도 오늘날 우리 속가의 움직임과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용문사는 태조 이후에도 왕실의 지원을 받은 일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 2년(1456년) 기록에는 용문사에 매년 봄 공급해 주던 소금(龍門寺每春秋例給食鹽) 주는 것을 금하자는 신하들의 요청을 세조는 거부하였고, 왕 3년 예조에 전지를 내려 “불법승삼보(佛法僧三寶)의 인(印)을 주조(鑄造)하여 지평(砥平)의 용문사에 보내라(鑄佛法僧三寶之印, 送砥平龍門寺)고 했으니 용문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세조는 용문사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왕 8년(1462년) 기록에 의하면 왕이 용문사에 거둥하였다가 저녁 발산에 묵었다.(幸龍門寺, 夕次鉢) 연산군일기에는 이 때 일어난 에피소드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세조가 일찍이 용문사에 거둥하여 손으로 구름 끝을 가리키며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백의를 입은 관음이 현상(現象)하였다.’(世祖嘗幸龍門寺, 手指雲端, 以示群臣曰: 白衣觀音現象)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신하들은 다 묵묵부답이었는데 노사신만이 맞장구를 쳤다. 후에 사림파가 노사신을 탄핵할 때 이런 일들도 구설수에 올랐다.

▲18나한 비전 무공수련장


왕권이 강했던 세종 때까지는 조용하였는데 문종 때에 이르자 유학을 숭상하는 신하들이 슬슬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1450년) 정인지가 아직 정치경력이 일천한 왕에게 견제를 시작한다.
안양사·용문사 두 절은 다 황폐된 지 오래 되어서 초막(草幕)으로 조금도 건물은 없었습니다.(安養、龍門兩寺盡廢, 久爲草幕, 暫無間架) 소문에 들으니, 그 초기에 한 늙은 중이 있어서 이 절 아래에서 죽었는데, 그 제자들이 절의 골짜기에서 시체를 불태우고, 이어 부도(浮屠)를 세워서 향불을 받들고, 드디어 초막을 지어서 거처하였습니다. 무식한 무리들이 영이(靈異)하다고 생각하여 다투어 미포(米布)를 내어 중창하여, 이로 인하여 거찰이 되었습니다. 비록 옛터에 따라 수창하였다고 하더라도 새로 창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雖因舊基修創, 與新創無異). 만약 금지하지 않는다면 절을 창건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한갓 형식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의 부도란 정지국사 부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렇게 절의 수리 중창도 금할 것을 주장하는 정인지에게 문종은 부정적으로 응답한다.
첫째는, 공사가 이미 끝났으니 다시 철거하지 말 것(功已訖矣, 不可復撤) 둘째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빌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내 세종께 여쭈었었는데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옛터에 수창하는 것은 이제 금지하지 말라.(予親聞於世宗, 嘗曰: ‘古基修創者, 令不禁也)’는 것이었다. 만일 문종이 정인지에게 밀렸다면 지금의 용문사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승탑을 떠나 절로 내려온다. 길은 오르던 길 반대편 내리막 오솔길이다. 잠시 후 돌무더기로 구획을 구분한 공지가 나타난다. 흥미로운 글씨들을 쓴 나무판이 걸려 있다. 山寺武功(산사무공), 十八羅漢秘傳武功(십팔나한비전무공), 武達心身何事不成(무달심신하사불성: 마음과 몸 무술로 통달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랴?) 승가에 비전되어 오는 무술을 연마하던 공간 같은데 아쉽게도 요즈음에는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오솔길을 내려오면 은행나무가 내려다 보이는 절 마당이다. 천연기념물 30호인데 신라 경순왕이 천년 사직을 지킬 수 없어 고려 왕건에게 넘기자 세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떠났다 한다. 가는 길에 이 곳에 들려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가 자라 지금의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고목이다. 세워놓은 설명판에는 세종 때 정3품 이상의 벼슬인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란 속에서도 죽지 않아 천왕목(天王木)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봉은본말사지에 기록된 이 은행나무의 이름은 공손수(公孫樹)이다. 이제는 부르는 이 없는 이름이 되었다.

▲가마터의 기와


용문사에 시주한 고려 말 대장경 어디로 갔을까?
은행나무 앞쪽으로는 6각의 불당 관음전이 있다. 조선시대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정좌해 계신데 금니(金泥)가 찬란하다. 새로이 보물 1790호로 지정된 수작(秀作)이다. 6각전 아래로는 부도밭이 있다. 사적비 곁으로 여러 형태의 부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 가람에서 수행하다 육신을 버린 수행승들의 삶의 흔적이다. 봉은본말사지에도 이 부도들이 기록되어 있다. 칠층부도, 오층부도, 오층부도, 오층부도, 단층부도, 문성당공사탑(聞性堂空師塔), 사층탑, 석종형팔각관부도, 부도 5좌… 혹시 일실된 것은 있지 않은지?
그 위로는 범종각이 있다. 미수기언에 주조했다는 종은 없고 근래에 종이 걸려 있다. 아마도 옛종은 영험(靈驗)하였던 것 같다. 숙종실록을 보자.
“지평현 용문사의 범종이 땀을 흘리며 저절로 울렸는데, 땀 빛깔은 약간 노랗고 소리는 마치 벌떼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같았다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砥平縣龍門寺梵鍾出汗自鳴, 而汗色微黃, 聲若蜂鬧, 道臣以聞)” 이제 이처럼 신령스러운 종은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용문사에 오면 또 다른 안타까운 일이 떠오른다. 동문선(東文選)에는 고려말 이색(李穡) 이 지은 ‘지평현 미지산 용문사 대장전기(砥平縣 彌智山 龍門寺 大藏殿記)’라는 글이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고려 대장경 한 부를 강화도 용장사(龍藏寺)에 두었는데 왜구의 강화 침입이 잦아지므로 개풍군 부소산(扶蘇山) 경천사(敬天寺)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개풍군도 바다에 가까워 위험하였으니 대장경을 시주했던 분의 손녀딸인 재신 오자순(吳子淳)의 부인은 안전한 곳을 찾아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이 때 마침 미지산 지천(智泉: 정지국사)스님이 대장경 시주를 받으러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그 대장경을 용문사에 시주하였기에 대장전을 짓고 봉안하게 되었다. 이 때의 일을 목은 이색이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대장경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대장경도 대장전도 기억하는 이 없고 글로만 이 사실이 남아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더구나 대장전기 내용 중에는 그 ‘자손들은 비록 백세가 되어도 대장경에 대한 근심이 없게 되었다.(子孫雖百世 無復有憂於大藏)’ 했거늘 생각할수록 아쉽구나.
이제 용문사를 떠나 상원사(上元寺)로 향한다. 길은 용문산 등산로로 오르다가 300m 지점에서 갈린다. 119표지목 1-2 지점인데 안내판 방향이 좌측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용문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은 용문산 등산로 중 가장 쉬운 길이다. 노약자나 어린이도 다니는 길이라서 힘들 것은 없다.
길을 갈려 300m 정도 오르다 보면 발밑에 기와편이 자주 눈에 뜨인다.
이 지점에서 우측 경사면을 살피면 위쪽으로 평탄지가 확인된다. 올라서면 아담한 절터가 낙엽 속에 펼쳐져 있다. 낙엽을 헤칠 때마다 깨진 기와편이 얼굴을 내민다. 절의 샘물은 돌로 쌓여 있는데 아직도 돌 틈 사이에 맑은 물을 흘리고 있다. 언제 폐사되었으며 절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봉은본말사지에는 사라진 절들에 대한 이름이 남아 있다. 죽장암지(竹杖庵址), 보리사지(菩提寺址), 상견성암지(上見性庵址), 중견성암지, 하견성암지, 폐사지1,2,3… 참 절도 많았다.
능선마루에 오르면 119표지판 2-1이 서 있고 거리표지판에는 온 길 910m, 갈 길 상원사까지 1780m를 알리고 있다. 능선길 허리를 끼고 내려간다.
계곡부로 내려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넓은 길이 나타난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를. 상원사 가는 길은 계속 능선길 허리를 끼고 산을 돌아가는 길이다. 다시 능선길 허리를 감싸며 길은 오른다. 그런데 다시 발밑에 기와편이 밟힌다. 잠시 오르막이 끝나면 평탄지가 나오고 나무평상과 벤치가 놓여 있는 휴식공간에 닿는다. 그 앞쪽(남쪽) 조금 낮은 곳에 산죽이 우거진 평탄지가 길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는 많은 기와편이 산재한다.
그런데 그 기와편들은 온전한 것보다 휘어진 것, 과열된 것, 변색된 것 등 사용할 수 없는 기와들이 많은 게 특징이다. 왜 이런 기와편들이 산재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곳은 기와를 굽던 가마터였을 것이다.
눈여겨보면 둥글게 솟아오른 지형들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래 전 무너져내린 기와가마의 흔적처럼 보인다.
다시 산허리를 끼고 몇 구비 돌면 드디어 상원사(上元寺)길을 만나면서 119표지판 2-7이 나타난다. (계속) 

교통편 
중앙선 전철 용문역 하차~ 역 앞에서 용문사 행 버스 환승
(귀가) 연수리에서 버스 ~ 용문역 하차~ 전철 

걷기 코스
용문사 경내(시비, 정지국사 부도, 은행나무, 관음전, 부도밭..) ~ (상원사 방향) ~ 잊혀진 절터~ 기와가마 ~ 상원사 ~ 보리갑사지(현 선운사) ~ 연수리(성공회)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이한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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