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고행 딛고 ‘길 위에서 읽는 삼국지’ 집필, 실크로드 여행기 준비 중
▲'삼국지 기행'의 작가 허우범. 사진 = 정의식 기자
어린 시절부터 삼국지를 읽으며 꿈을 키운 한국인들은 많지만, 직접 그 현장을 찾아 영웅들의 숨결을 느낀 사람은 많지 않다. 서점에 무수한 삼국지 관련 서적들이 범람하지만, 그 현장을 찾아 제대로 소개하는 책은 찾기 힘들다. 역사기행가 허우범이 5년 전 ‘길 위에서 읽는 삼국지-삼국지 기행’을 집필하게 된 이유다. 삼국지의 매력에 빠져 중국을 100여 차례 방문한 허우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인천 사람이다. 1961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을 나와 교직원으로 25년째 재직하고 있다. 사는 집도 어린 시절부터 쭉 그 대학 인근이니 그야말로 ‘인하맨’이다. 그런 그가 중국을 100번 넘게 방문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곳에 오래 살다보니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원래 여행을 좋아했지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삼국지를 많이 읽었는데,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문학도로서 다시 읽어보게 되고,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그러다 2002년부터 본격적인 삼국지 여행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학교 업무 때문에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가족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을 준비한 것이 시작이었다.
“어딜 가야할까 고민했는데, 가까운 거리라 비용의 이점이 있고, 우리와 같은 문화권인 곳을 고르다보니 중국이 나왔습니다. 사실은 제가 가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굳이 중국으로 여행지를 결정하게 된 이유다. 남들처럼 평범한 여행은 가고 싶지 않아서 베이징, 상하이 등 뻔한 패키지 여행상품이 아닌 테마를 정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삼국지’를 테마로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가족들과 함께 시작했는데, 점점 한명씩 두 명씩 예산 문제도 있고 하니 줄어들더군요. 막내아들이 초등학생 때 처음 같이 여행을 떠났는데, 이제 그 아이가 대학교 1학년이 됐습니다. 10년이 흘렀네요.”
삼국지, 역사와 상상력의 세계
일반적으로 ‘삼국지’라 하면 1800년 전 중원에서 명멸한 위·촉·오 3국과 무수한 영웅들의 쟁패를 다룬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지칭한다. 진수가 지은 ‘정사(正史) 삼국지’와는 다르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는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지만 다른 부분도 많다.
문제는 삼국지연의에 가미된 허구와 상상이 좀 과도한 감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삼국지 기행’은 역사의 현장에서 그 해답에 좀 더 가까이 가고자 하기 위한 책이다.
책을 쓰기 위해 저자 허우범은 관우의 고향 운성부터 도원결의(桃園結義)의 무대가 되었던 탁주, 동탁과 반동탁연합군의 일전이 벌어졌던 호뢰관, 제갈량이 유비를 만나기 전까지 은거하던 융중, 조조가 천하를 호령했던 동작대가 있는 허창, 유비가 세운 촉한의 수도 성도, 제갈량과 맹획의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가 전해지는 대리와 곤명, 적벽대전의 현장인 장강, 제갈량이 병서와 보검을 숨겼다는 전설의 병서보검협 등 중원 곳곳을 누볐다.
‘삼국지평화’, ‘배송지주’, ‘삼국회요’, ‘후한서’, ‘세설신어’, ‘위략’ 등 다양한 삼국지 관련 문헌들도 섭렵했다.
적게는 4~5일부터 많게는 보름까지, 2002년부터 2009년까지 7년간 약 40여 차례 중국을 여행하면서 수많은 문헌과 씨름하며 만들어진 책이 바로 ‘삼국지 기행’이다. 직접 촬영한 수 천 장의 사진이 빼곡히 수록된, 이전에 없던 현장감 가득한 삼국지 서적이다보니 역사관련 서적으로는 드물게 5쇄를 찍었고, 출간 5년째인 현재까지도 독자 문의가 지속되고 있다
사천성 대지진 때 간발의 차로 빠져나와
100번 넘게 중국을 오가다보니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다행히 도둑·강도질은 당하지 않았지만, 소소한 에피소드는 정말 많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8년 중국 사천성 대지진을 간발의 차로 피했던 경험이다.
“책을 쓰다 보니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다시 한번 한중을 가기로 했습니다. 사천성의 중심지이지요. 그런데 비행기표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무한, 창사 등을 둘러보고 무한에서 비행기를 앞당겨 탔는데,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뭔가 전기적으로 합선이 난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놀라서 주위에게 물어봤는데 다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반응이더군요. 2분 정도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기상상황이 안 좋아 인천공항이 아닌 제주공항에 내린 후 집에 전화를 했더니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디냐?”고 묻더군요. 알고 보니 그 이상한 소리가 난 시점에 사천성에 대지진이 났다는 겁니다. 아내는 제가 사천성에 간 줄 알고 있었구요. 만약 비행기를 앞당겨 타지 않았으면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관우를 포함해 삼국지의 모든 영웅들이 저를 보호해준 것 같습니다.”
현지인들 압도적으로 촉한 인물들 선호
이렇게 죽을 고비도 더러 넘기고 소소한 어려움들은 수도 없이 겪었지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삼국지 유적의 편향성’이었다. 책에 소개된 삼국지 관광지는 정말 많지만 그 유적들 중 상당수는 ‘역사적 유적’이 아닌 ‘문학적 유적’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삼국지연의의 무대가 되는 ‘문학적 유적’의 의미도 작지만은 않다. 하지만 후대에 각색된 유적 때문에 정작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 방치되는 사례를 보며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고.
특히 중국인들의 촉한 선호 심리 때문에 유비, 관우, 제갈량 등과 관련해서는 없는 관광지도 만들어낼 정도로 다양한 유적이 있지만, 조조 관련 유적은 거의 없고, 실제 역사적 유적이 있어도 현지인들조차 잘 모른다고 한다.
요즘 들어 조조를 재평가하는 흐름이 있지만 아직 그런 생각은 지식층들 사이에만 머물러있고, 대부분의 서민들 인식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또, 공산당의 교육방침이 확고하게 뿌리내려 있어서 공식 교육 내용만 믿는 경향이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제갈량과 맹획의 ‘칠종칠금’ 고사 같은 것이 대표적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허구였다는 증거가 많지만 현지인들은 압도적으로 맹신한다는 것이다.
“현지를 수소문해 ‘고맹대(古盟臺)’라는 비석을 찾았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제갈량이 맹획을 복종시킨 것이 아니고, 북벌을 위해 후방을 안정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맹획을 다독이고 맹약을 맺었다고 씌어있더군요. 현지인들도 모르는 유적이었습니다.”
조조와 여포, 노숙 저평가됐다
현지에선 유적조차 찾기 힘들지만 허 작가는 삼국지의 첫 번째 영웅으로 ‘조조’를 꼽는다. “난세를 주도하고 통일의 기반을 건설한 조조야말로 삼국지의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재평가가 필요한 두 번째 영웅은 ‘여포’다. “패륜아로 매도당하는 면은 있지만 이는 그가 한족이 아닌 기마민족 출신이기 때문”이라며, “여포는 갑옷을 안 입고 깃털만 꽂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는 무예가 그만큼 출중했다는 뜻”이라고.
마지막으로 허 작가는 ‘노숙’에 주목한다. 오나라의 책사 노숙은 장소, 제갈근과 함께 손권의 패업에 큰 역할을 했다. 많은 삼국지 전문가들이 곽가, 순욱, 가후 등 조조측 책사들과 제갈량, 방통 등 유비측 책사들을 높이 평가하지만, 노숙이야말로 전체 대국을 보며 큰 흐름을 바꾼 진정한 전략가라는 생각이다.
“노숙이야말로 진정한 참모입니다. 흔히 제갈량을 띄우느라 노숙을 낮추는 경향이 있는데 노숙이야말로 노련한 정책가의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노숙은 전체 대국을 읽으면서 국가경영이라는 전략을 제시해 목적을 이뤘습니다. 적벽대전을 통한 ‘삼국정립’은 그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노숙이 죽으면서 촉과 오의 동맹이 와해됐고, 오가 촉을 공격함으로써 결국 촉과 오가 위에 멸망하는 길을 걷게 되는데, 이는 노숙의 역할이 그만큼 컷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봅니다”
장강과 검각산, 잔도 꼭 구경해야…
그에 비해 촉한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조금 박하다.
“관우와 제갈량은 너무 신적으로 추앙당하는 면이 있습니다. 훌륭한 인물들이지만 실제보다는 과장됐지요. 관우도 사실 여자를 밝히는 호색가였다는 서술이 있고, 성격이 그닥 좋은 편도 아니었습니다. 전형적인 장수에 불과하고, 형주를 지키지 못해 촉을 멸망시킨 한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갈량 역시 적벽대전 외에는 크게 이긴 전투나 전쟁이 거의 없습니다. 적벽대전은 사실 오나라와 주유, 노숙의 역할이 더 컷지요.”
허 작가가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삼국지 기행 최고의 절경’ 첫번째는 ‘장강(長江)’이다. 장강은 넓기도 하지만 풍경들이 웅장하고 적벽대전 등 역사적 사건들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추천 이유다.
두 번째 추천 절경으로는 ‘검문관(檢門關)’이 있는 ‘검각산(劍閣山)’을 꼽았다. ‘검문관’은 진짜로 한 사람이 천 명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지다. 대부분 밑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데, 허우범은 모르고 검각산을 올라갔다고 회고한다.
“45도 넘는 더위에 뒤를 돌아다보면 현기증이 나서 앞만 보고 갔습니다. 가이드가 15년 동안 검각산을 넘어간 사람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중국, 일본, 한국사람 다 밑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데 당신 때문에 자기까지 넘어보게 됐다고.”
세 번째 추천 절경은 ‘잔도(棧道)’다. 파촉과 중원을 잇는 절벽에 만들어진 위험한 길 ‘잔도’. 절벽에 박혀있던 나무들은 다 썩어 없어졌지만, 절벽에 구멍은 남아있다. 장강과 사천성에는 강을 타고 가며 볼 수 있도록 관광상품으로 만들어놓은 잔도도 있다.
실크로드 기행문 1월말 출간 예정
2009년 ‘삼국지 기행’을 출간한 후에도 그는 계속 중국을 드나들었다. 최근에는 실크로드 루트를 찾아다니며 여행기를 쓰고 있다.
“원래는 삼국지 관련 서적을 5종만 더 쓰고 싶었습니다. 삼국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독법 서적, 현장에서 느낀 삼국지의 문화를 다룬 서적, 중국인들의 생각 그 이면을 파헤치는 서적, 경제를 기반으로 분석한 물류 삼국지, 뭐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돼서 한 10권 정도 관련 책을 집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여 당분간은 실크로드에 집중하고, 삼국지 기행 수정 증보판을 2019년에 발행할 예정입니다”
‘실크로드 기행(가칭)’은 동서양 교류의 핵심 루트였던 실크로드의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각 지역을 훑으며 역사는 물론 주변의 모든 문물을 살펴보는 ‘삼국지 기행’과 비슷한 맥락의 서적이 될 예정이다. 설이 지나면 초판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 정의식 기자
정의식 기자 es.jung@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