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새해 날씨가 포근해서 골프 라운드를 결심하고 강원도 삼척 파인밸리를 찾았다.
하고 많은 골프장 가운데 이곳을 찾은 이유는 삼척이 대관령의 팬현상으로 온도가 서울보다 2~3도 정도 높고, 바람이 적어 겨울 골프 최적지라는 믿음 때문이다.
1월 21일 함박눈이 쏟아지는 삼척 파인밸리 골프장은 온통 설국으로 변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갑자기 눈송이가 하늘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온통 골프장 산야는 흰 눈으로 뒤덮여 버렸다. 골프에 대한 기대감으로 온밤을 뒤척이며 잠 못 이루며 기다리던 아침,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백구의 향연을 맛보러 먼 길을 달려 왔것만 아쉬움을 뒤로하면서 설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눈은 금방 발목까지 차오르며 골프코스를 온통 설국으로 바꿔버렸다. 어디가 페어웨이고 벙커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이 쌓인 것이다.
이렇게 많은 눈을 본 것은 내 인생에서 두 번째다. 어느새 무릎까지 눈이 차오른다. 골프 티샷을 날리고 나니 눈발이 너무 날려 걸을 수가 없다. 온몸이 눈으로 뒤덮여 있다. 그렇지만 행복하다.
동양에서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무대인 니가타현 에치코의 유자와 온천에서 본 눈 세상 이후 처음이다.
내리는 눈은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자극을 주어 눈밭을 헤매고 다니게 하는 광기를 불러 일으킨다. 그렇지만 한낮의 고양이 졸음처럼,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처럼 고단한 삶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무명이불 같은 모성의 숨결이 있다.
눈은 자연의 더러운 것, 추악한 것을 모두 덮어버리는 마법의 손을 갖고 있다. 눈 오는 하늘을 쳐다보면 인간의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운 것, 후회스럽던 것, 아쉬웠던 것, 사랑과 미움도 모든 것들이 뒤섞여 내려온다. 한 때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얼굴도 내려오면서 한 토막 즐거웠던 옛날의 전설도 아련히 다가온다.
오늘은 골프에서 얻는 즐거움과 건강보다는 눈으로 얻는 철학 속에 위안을 받으니 더 행복하다.
눈 내리는 날씨를 아쉬워하면서 온천지의 백설을 바라보며 삼척에서 만든 동동주를 사발로 한 잔을 들으키니 몸에 온기가 돌면서 향기로운 찬 맛이 혀를 감싼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지만, 대신 되돌아오기 위한 기대감을 주기 때문에 훨씬 마음이 가볍다.
훨훨 몸을 비비며 내리는 눈의 요정 속에서 인적이 끊어진 산 속에서 조용하게 겨울의 조각배를 타고 얼굴을 스쳐가는 찬바람 속에 그린을 바라보면서 눈의 아름다운 정취에 매료되고 만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 멋있는 하루였다.
골프장을 나와 허기를 달래고 다시 하늘을 올려 쳐다본다. 아름다운 수천 눈송이가 아직도 쏟아져 내린다. 올해는 저 함박눈처럼 모든 일이 힘차고 활기차게 잘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아쉬운 발길을 다시 서울로 돌렸다.
- 김맹녕 골프전문인협회 수석 부회장 겸 골프전문기자 (정리 = 박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