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작가 윌리엄 피터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길을 가던 한 청년이 100달러짜리 지폐를 주웠다. 너무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길을 갈 때마다 길바닥만 보며 걸었다. 10년 후, 그는 2만9000개의 핀, 12달러, 구부러진 자신의 등을 얻었다. 그가 잃은 것은 눈부신 찬란한 햇빛, 보석처럼 빛나는 밤하늘의 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미소, 가로수의 싱싱함, 푸른 하늘, 그리고 사는 맛이었다. 그대의 시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요즈음은 책을 출간할 때, 작가가 원고파일을 편집자의 손에 닿게 보낸다. 작가의 실수로 생긴 오탈자 이외에는 맞춤법에 어긋나는 글귀가 없어서 따로 교정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옛날에는 작가의 육필원고를 우편으로 보내거나, 타자로 찍은 원고를 팩스 등으로 보내면 타자수가 타이핑을 하고 교정사가 교정을 해서 작가에게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원고가 제대로 재생되었는지 확인해서 책을 만들기 위한 다음단계로 넘겼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필자의 장편소설 한편을 다 타이핑한 직원에게 내 작품이 재미있더냐 아니냐를 물었더니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물며 대답을 피했다. 필자는 남녀 주인공의 이름도 들썩이고 나름 임팩트를 준다고 삽입했던 사건도 실감나게 묘사하면서 그녀의 대답을 유도했다. 소설 속의 에피소드를 몇 가지 더 설명했는데도 그녀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소설의 내용은 전혀 몰랐다. 기억에 남는 구절이나 단락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능한 타자수는 커닝하는 학생처럼, 원고의 글자들을 심지어는 틀린 글자까지도 정확하게 집어 옮기기는 하지만, 글 전체의 내용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보나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은 부분만 보고 전체는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녀는 나무는 보고 숲은 못 보는 수준이 아니라, 나무 밑동 근처에서 자라는 풀 한포기 모래 한 알은 세세히 간파하나, 숲은 물론 나무도 못 보는 완벽한 근시안이었다. 하긴, 그녀는 글자를 옮기는 임무만을 수행하느라 독서까지 할 짬은 없었을 것이다.
골프란 자연을 벗 삼아, 벗과 함께 즐기는 스포츠다.
그런 골프의 샷을 할 때 죽어도 헤드업 하지 말라고 한다. 어느 날 필자가 스승님에게 “어떡하면 헤드업을 안 할까요?”라고 비법을 물었더니, 스승님께서는 “헤드를 뎅겅 잘라버리라”고 하셨다. 필자는 헤드를 뎅겅 자르기 싫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바라본 덕에 공도 잘 맞았지만, 목디스크에 걸릴 뻔도 했고, 페어웨이 풀숲에 코 박고 다닌 덕에 부러지지 않은 티도 주웠다. 그린 위에서도 기어 다닌 덕에 동반자가 마크해놓은 은빛 찬란한 500원짜리 동전도 주웠다가 망신을 톡톡히 당하기도 했다.
골퍼들이여, 디스크 걸린 목에 굽은 등, 부러지지 않은 멀쩡한 티 몇 개와 500원 짜리 동전이 탐나는가. 차라리 헤드업을 하고 눈부신 찬란한 햇빛을 맞으라. 벗의 얼굴에 머무는 미소를 보라, 가슴을 활짝 펴고 밀려드는 바람을 안으라. 자연을, 사는 맛을, 그리고 사랑을 느끼라.
- 김영두 골프칼럼니스트협회 이사 (정리 = 이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