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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人 - 최원호 맛대로촌닭 대표]“먹거리로 남북장벽 헐어야”

맨주먹으로 프랜차이즈 일궜다 실패, 모란봉 ‘락원 닭고기 전문 식당’ 아직도 ‘유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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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67호 이성호 기자⁄ 2014.02.24 11:34:07

▲사진 = 정의식 기자


『서울 강서구 방화동 한 아파트 주택가 안쪽 길을 따라 걷다보면 다소 한적한 곳에 ‘맛대로촌닭’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번잡한 유흥가에 자리 잡고 있지도 않지만 이 일대에서 맛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 최원호 사장은 일 년 365일 직접 닭을 튀기고 오토바이로 배달을 한다. 하지만 그가 최초로 북한 평양에 치킨가게를 개점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 사장은 한때 약 150여개의 가맹점을 가지고 있었던 프랜차이즈 대표였기도 했다.

현재는 사업이 어려워져 자신의 소유였던 건물에 세입자로 들어가 있지만 좌절이란 없다. 비록 더디지만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으로 승부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더욱 신명나게 일을 하고 있으며 재기의 시동을 걸고 있다. 가게 위 2층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평양 치킨집은 유효하다며 남북 경제인 교류가 활성화돼 다시 올라갈 날을 기대했다.』


최원호 사장(56)은 혹독한 가난을 경험하며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아버지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 중학교만 겨우 졸업한 상태에서 당시 1500원만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죠. 주유원부터 시작해 노가다(건설 현장일)는 물론 목욕탕 때밀이(목욕관리사)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고생 속에서도 항상 남들보다 앞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지 않던 1980년대에 컴퓨터 장사를 시작했다. 초반에는 장사가 잘 됐지만 영세업자였고 자본이 없었기에 메이저업체가 밀어붙이자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이쪽으로는 살아갈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과감히 사업을 접었고 1992년 닭 업계에 첫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고향친구가 닭 업계에서 5~6년 종사하고 있었고 같이 해보자고 해, 처음에는 닭 기계 즉 전기구이 통닭기계 사업을 했습니다. 8평짜리 가게 얻어 하루도 안 쉬고 일을 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위기도 많았지만 묵묵히 끌고 나갔습니다”


평양에 우리나라 치킨집 1호점 내다

그 결과 사업이 조금씩 번창해지면서 닭 수입업도 하게 됐고 닭꼬치를 개발, 전국적으로 보급시켰다. 특히 신선한 발상으로 통닭 1마리 개념을 탈피해 부위별 치킨도 새롭게 선보였다.

1997년 입맛대로 골라먹는 치킨을 표방하며 ‘맛대로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여, 이후 체인점이 150여개까지 늘게 됐다.

중간에 닭꼬치 프랜차이즈도 했었다. 그러나 유행을 탔고 반짝하는 것은 오래 못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50년이 가고 100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한다고 방향을 잡은 것이 ‘맛대로치킨’이었고 2005년에 ‘맛대로촌닭’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최 사장은 2005년 북한 땅을 밟았다.

“공주 태생으로 북한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북한 길에 올랐습니다. 백범일지를 수없이 읽으며 민족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특히 닭을 취급하면서 수입도 많이 했는데 어차피 외국으로 달러가 나갈 바에는 북한에서 길러서 가져오면 같이 잘 살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죠”

당시 남북 화해모드가 조성됐기에 평양에서 닭을 가져오면 인건비·물류비용 등이 싸기 때문에 현실화만 된다면 대박이었다.

하지만 마침 조류독감이 터지자 수입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고민 끝에 치킨 체인점을 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리 화해 분위기라도 북한에서 치킨집을 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세상은 열려고만 하면 열릴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무작정 덤벼들었다. 결국 북한 ‘락원무역총회사’와 합자해서 시장조사와 점포작업을 거쳐 2007년 100평 규모의 ‘락원 닭고기 전문식당’을 정식으로 오픈했다. 향후 15년간 영업권을 보장하며 이익금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최 사장은 “평양특별시 모란봉구역 개선문동 북새거리 최고의 요지에 입점했습니다. 북한에서 치킨이라는 개념이 처음 들어갔기에 손님들 반응은 대단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지만 워싱턴포스트 동경지국장이 직접 한국으로 찾아와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후 BBC와 산케이신문, 후지TV 등에서 최 사장을 직접 만나 기사를 다룰 정도로 세계적으로 반향이 컸다.

▲평양 1호 치킨집 ‘락원 닭고기 전문 식당’ 전경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모든 길이 막히게 됐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소스·재료 등 물자가 우리나라에서 북한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단절된 것이다. 도저히 장사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평양 치킨집을 오픈하고 2008년에 물자가 2번 올라가고 나서 딱 끊어진 것이다.

최 사장은 “락원 닭고기 전문식당은 지금도 살아있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건도 안 들어오고 영업은 해야 되니 어쩔 수 없이 닭은 제대로 못 팔고 회 같은 것을 팔고 있는 상황입니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평양 치킨집이 잘되면 체인점을 늘리고 병아리 100만 마리를 북으로 보내 기르는 등 사업계획도 다 짜놨었지만 허사가 됐다.

“안타까운 점은 정책적으로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야 했는데, 정권이 바뀌자 정책도 바뀌다보니 더 이상 평양에 올라갈 수 없게 됐습니다. 정경을 분리해 정치 부문은 냉각되더라도 경제인들에 대한 교류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만이나 동·서독은 경제인 교류를 오히려 지원해줬습니다. 경제인들이 들어가서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풀어나게끔 해야 합니다”


심각한 경영난 불구 재기를 다짐

먹을거리에서 장벽을 무너뜨리면 먹거리 문화에서부터 통일이 이뤄진다는 것.

“아무리 철천지원수라도 밥상에 강제로 앉혀서 세 번 밥을 같이 먹으면 감정이 다 풀립니다. 자주 만나 밥도 먹고 술도 같이 먹으면서 상대의 앙금을 털어내는 기회가 많아야 마음도 열리고 이해도 되고 배려도 할 수 있습니다. 부부생활에서도 상대의 단점만 보면 싸우게 되는 것처럼 서로 간 단점보다는 장점을 봐야 남북관계가 원활해 질 수 있습니다”

최 사장은 평양에 치킨집을 내기 위해 빚을 져가며 올인 했지만 단절된 탓에 수익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국내서의 사업도 잘 되지 않았다. 프랜차이즈의 장점인 똑 같은 재료, 똑 같은 맛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가맹점주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상생하기 위해 서로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윈-윈 할 길을 찾자고 했다. 가장 기초적인 래시피를 지켜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례로 치킨떡복이를 개발해 시금치 당근 고구마 등이 함유된 컬러 웰빙떡을 사용해야 했지만 가맹점들이 시장에서 값싼 떡을 사용하다보니 광고 효과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소비자들이 시켜보면 웰빙떡이 아닌 일반 떡이 들어있으니 품질을 스스로 죽인 꼴이었다.

2009년 경제위기가 터지자 사업은 더욱 내리막길로 갔다. 모든 수익이 떨어졌다. 심각한 경영난과 평양에 치킨집을 내면서 무리하게 얻은 빚 등으로 인해 본사 건물과 집도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수도 전기도 다 끊겼다. 그렇지만 용기를 잃지 않았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노모를 모시는 등 꿋꿋이 가정을 지켰다. 현재 본인의 건물이었던 곳에서  주인이 아닌 세입자 신분으로 가게와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다.  

“웬만하면 내 건물이었던 곳에 세입자로 있지 않습니다만 나는 여기가 좋습니다. 다시 일어나려면 이곳을 뜨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직원 하나 없지만 사무실 월세를 꼬박꼬박 3년 여간 내고 있는 것은 나를 지탱해온 자존심이자 재기를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북한 방문 당시 최원호 사장


대부분 사람들이 본인이 최고로 많이 가지고 있었을 때를 본전이라고 생각해 내려놓지를 못하지만, 이때가 본전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날 때 어차피 빈손으로 왔기에 오히려 지금이 마음이 편하다고 말하는 최 사장.

넉넉치 않은 생활속에서도 한 달에 1번씩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가게로 불러 닭 잔치를 열고 있다. 또 가게 입구에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목마를 때 물을 마실 수 있게 옹달샘(생수)을 설치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최 사장은 올해부터 프랜차이즈를 활성화 시킬 요량이다. 지난해에 체인점 한 개를 냈다. 이제는 아무나 가맹시키지 않는다. 가맹점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를 개점하더라도 혼이 담긴 체인점을 낸다는 방식이다.

“무턱대고 체인점을 해보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돌려보냅니다. 내가 22년간을 닭 장사를 해도 아직 닭이 안 보이는데 오픈 시켜놓으면 가맹점주들이 1년도 안 돼서 다 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망하는 겁니다. 이는 외식업 종사자의 실패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론만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할 수 있는 것을 안다고 해야 합니다. 본 것과 들은 것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직접 해봐야 하며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의 사무실엔 ‘주향불파항자심(酒香不怕巷子深)’이란 중국속담이 현액으로 걸려 있다.

“주향불파항자심은 술의 맛, 음식 맛이 좋으면 찾기 어려운 깊숙한 골목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으로 맛으로 승부해야하고 맛이 좋으면 손님들이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브랜드 간판만 내세우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기본 즉 맛을 안 갖추고 껍데기만 가지고 가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자신의 혼을 바쳐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목계(木鷄)의 경지에 오를 때 까지…

최 사장은 외래어인 치킨을 우리말인 촌닭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메뉴도 개발해 어머나·맛돌이·맛순이 등 우리 음식 맛으로 바꿨다. 외국 사람에게도 우리나라말로 우리 음식을 주문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KFC 등 메뉴를 보면 다 외래어고 무슨 뜻인지 알고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디더라도 제대로 가자. 확실히 가자하는 신념이었다.

“맥도널드의 경우 전 세계에 3만개 매장, 중국에 3000개가 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치킨브랜드는 왜 그렇지 못한지 답은 뻔합니다. 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내 치킨브랜드나 외국 브랜드나 메뉴가 다 똑 같습니다. 남의 것을 카피한 사람은 잘해야 2, 3 등이죠. 하지만 내 것이 있으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한번 뿌리를 내리면 오래갑니다. 각종 브랜드들이 떴다 죽었다 하는 이유가 다들 잘된다 싶으면 카피만 해 뿌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진짜 우리의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진짜 우리의 것을 만들자. 그래서 평양에 가서 만들어 놓은 대표적인 메뉴가 칠향찜닭이다. 7가지 향이 있다고 해서 칠향이다. 우리 전통요리를 개량해 4~5년의 테스트를 거쳐 만든 것으로 평양칠향계는 ‘맛대로촌닭’의 주메뉴이기도 하다.

그의 명함에는 이름 옆에 목계(木鷄)라는 호가 적혀있다. 목계는 원래 싸움닭으로 장자 달생편에 나온다.

“한 왕이 조련사에게 투계 훈련을 맡겼는데 처음에 싸움을 시켜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직 멀었다고 했고 열흘 뒤에 물어봐도 소리만 나도 싸우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열흘 뒤에 물었을 때 적의 눈동자만 봐도 분을 삭이지 못해 싸우려고 해 싸움에 나갈 수 없다고 했고 이후 또 물어보자 이제는 어떤 적이 싸움을 걸어도 나무와 같이 전혀 미동도 없어 천하무적도 두렵지 않게 됐다고 했습니다.

즉 덕이 충만한 사람은 무적이 된다는 것으로 매일 책상위에 친구가 선물해준 나무 닭을 보며 가르침을 되새김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에서 열흘씩 3번 즉 30년을 해야 목계의 경지에 갑니다. 현재 22년차로 8년을 더 훈련을 해야 30년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뭔가 이뤄지고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며 실력이 안 갖춰져 있기에 수양을 하는 단계죠”

이 같은 마음을 갖고 있기에 현재 사업이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닭을 팔다가 돼지 장사를 했으면 망한 것이지만 닭 업계에 지금도 종사하고 있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평양에 내 식당이 있고 언젠가 갈 수 있습니다. 돈을 까먹은 것이 아니라 투자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직 살아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이뤄지는 일은 없습니다. 4년 전 아내를 업고 63빌딩 계단을 완주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 계단씩 밟아 나가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다보면 꽃이 피고 뿌리가 있는 것은 태풍이 불어도 뽑히지 않게 됩니다. 꿈은 크게 갖되 시작은 밑바닥에서부터 하면 반드시 꿈은 이뤄질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돈을 쫒아 많이 벌어야겠다는 욕심은 없습니다. 즐겁게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살아있는 동안 사회에 다 쓰고 가는 것이 진짜 내 돈이지 물려주는 것은 내 돈이 아닙니다. 닭으로 세계최고가 되고 후손들에게 자랑할 만한 국산 닭 브랜드를 만들어 외국으로부터 로열티를 받게 만들고 싶습니다”

- 이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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