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산에 잠든 비운의 두 형제, 광해군·임해군의 통한을 거두다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묘(成墓)를 뒤로 하고 오른 길을 되돌아 나온다. 풍양조씨 시조묘와 성묘는 천마산의 서쪽 산줄기에 자리잡고 있다. 천마산 큰 산줄기가 서쪽으로 달려 관음봉을 이루고 여기서 좌우로 분기하면서 좌로 갈린 봉우리가 된봉이 되는데 이곳 된봉에서 다시 뻗어나간 좌측 산줄기에 두 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른 바 풍수(風水)하는 이들이 말하는 명당(明堂)의 조건을 잘 갖춘 자리이다.
묘역에서 내려오면 규모 있는 오래된 민가가 자리잡고 있다. 터 서리도 넓고 주변에 제법 나무도 있어 툇마루에 앉아 다리를 쉬어가고 싶은 집이다. 다행히 옛날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토종닭을 팔고 있다. 쉬었다 가는 김에 백숙 한 마리 주문한다. 놓아먹인 닭이라 먹을 만하다. 주인장 말씀이 예부터 이 집이 임해군묘에 제사를 모시는 집이었다 한다. 주인장은 이 동네 토박이였는데 임해군의 후손이 아니라서 내력은 잘 모르고 있었다.
버스가 올라갔던 길을 따라 되돌아 내려간다. 잠시 후 ‘영락공원’이라 해서 영락교회 신도들이 영면해 있는 교회묘역을 만난다. 입구에는 광해군묘 표지판이 붙어 있다. 교회묘역 안 포장도로를 따라 1km 정도 오르면 철 펜스 밖으로 나가는 작은 문을 만나고 비탈길 한 켠에 광해군 내외는 잠들어 있다.
한 나라를 호령했던 임금이었건만 유배 간 죄인의 신분으로 적거지(謫居地)에서 명(命)을 다하였다. 묘표(墓表)는 너무도 단출하다. 光海君之墓(광해군의 무덤). 뒷면 음기(陰記)에는 장례를 치른 내용이 소략하게 적혀 있다.
“辛巳七月初 一日 病卒於濟州 命輟朝三日 進素膳五日…王子君例…(1641년 신사년 7월 초하루 병으로 제주에서 사망. (왕)께서 3일간 조정일을 철폐시킴. 5일간 거친 음식을 들이게 함…왕자의 예로 장사지냄…)
그 곁에는 폐출된 왕비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묘표에는 ‘文成郡夫人柳氏之墓(문성 군부인 유씨의 묘)’라 기록하였고 뒷면 음기(陰記)도 광해군묘에 준하여 기록하고 있다. ‘天啓三年癸亥十月初八日病卒於江華…閏十月二十九日 葬于楊洲赤城洞…以王子例…(천계3년 1623년 10월 8일 강화에서 병으로 사망…윤10월 29일 양주 적성동에 장사지냄…왕자의 예로 행함…)’
왕비는 광해군이 폐출되던 해(1623년) 3월, 광해군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 귀양지에서 죽음을 맞아 양주 적성동에 묻혔다. 다행히 왕비는 광해군이 죽은 후 지아비 곁으로 돌아왔다.
왕비와 광해군은 어떤 사이였을까?
2006년 봄, ‘문헌과 정보’라는 학술지에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올라왔다.
제목도 흥미로운 것이 ‘왕비가 왕에게 올린 언문 상소’였다. 왕비는 누구이며 왕은 누구였을까? 바로 이곳에 묻힌 광해군과 왕비 유씨이다. 임치균(林治均)교수가 필사본 조야기문(朝野記聞)에서 찾아내어 소개한 내용이다. 왕비 유씨가 광해군의 북방외교정책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과거 역사의 예를 들어가며 주장한 상소문이다. 이 상소문의 진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세진 명나라를 져버리고 줄타기 외교를 벌이는 지아비의 외교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주장을 한 내용이다.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은 옆으로 미뤄 놓고 그 시절에 왕에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던 여자였다면 멋진 분이 아니었을까? 그런 아내를 내치지 않고 부부로 함께 간 남편이라면 괜찮은 사람 아니었을까? 바람 부는 작은 묘역에서 문득 이 부부가 살았던 날이 더욱 궁금해진다. 광해군은 과연 폭군만이라는 캐릭터가 전부였을까?
광해군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조가 사랑하던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광해군 3살에 어머니 공빈 김씨가 죽자 어미없는 아이가 되었다. 정황으로 볼 때 마침 친자가 없던 의인왕후 박씨가 보살폈던 것 같다. 사랑하던 공빈 김씨가 죽자 선조는 인빈 김씨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적자(嫡子)가 없는 상황에서 선조는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으로 후사를 잇고 싶어 했다. 공빈의 두 아들 임해군, 광해군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신세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을 돕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영락공원 근방에 잠든 광해군 내외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곧 임진왜란이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조정은 분조(分朝: 만일에 대비해 조정을 둘로 나누는 일)키로 한다. 선조나 조정으로부터 이미 신뢰를 잃은 형 임해군은 탈락하고, 아직 어린 나이의 신성군도 제외되니 자연히 여러 사람의 신임을 받고 있던 광해군이 분조(分朝)의 한 축을 맡게 된다. 이로써 졸지에 광해군은 세자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한 축을 이끌게 된 것이다.
전쟁 중 선조는 애첩 인빈 김씨를 데리고 피난 다니기에 바빴던 반면, 광해군은 의인왕후 박씨를 모시고 각지를 다니면서 병사를 모으고 백성들을 위무하는 등 장래의 임금으로서 훌륭한 능력을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났다. 시기심의 발로였는지 왕권에 대한 위기를 느꼈는지 선조는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이 때 안타깝게도 의인왕후가 명을 다하고 새로 들인 젊은 왕비 인목왕후 김씨가 왕자(영창대군)를 출산하니 선조의 마음은 어린 애기 영창대군에게로 쏠린다.
이때를 놓칠세라 영창대군 편에 붙은 무리들이 있었다. 바로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으로 대표되는 소북(小北)세력이었다. 이들은 병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된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는데도 그것을 거두게 했다. 광해군은 세자이기는 하였지만 형이 있다는 이유로 명(明)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한 상태였기에 정식세자도 아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광해군은 폐세자가 될 위험성이 매우 큰 상태였다. 임금이 지지하고 집권세력 소북이 지지하여 세월만 가면 영창대군이 세자가 될 확률은 아주 높았다. 그 때 선조가 승하(昇遐)했다. 영창대군은 만 2세였다. 소북세력은 인목대비가 수렴청정하며 영창대군으로 대통을 잇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로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문제는 광해군을 지지하던 소수파 대북(大北)이었다. 이들은 정적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결국 이항복 문하의 서인(西人)들에게 반정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반정의 명분은 두 가지였다.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폐한 패륜(悖倫)과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반정의 명분으로는 상당히 궁(窮)한 것이었다. 말은 못하지만 상당한 사람들이 수긍하지 못한 듯하다.
광해군은 귀양살이 18년 중 1637년 6월 16일 제주에 닿아 1641년 7월 1일까지 4년여를 그 곳에서 살다가 67세 나이로 명을 다했다. 이때의 정황이 실록에 전해진다. “이시방(李時昉)이 제주 목사인데 즉시 열쇠를 따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로 염빈(斂殯)하니 조정의 의견이 모두 그르다고 여겼으나 식자는 옳다고 했다 (李時昉爲濟州牧使, 卽掊鎖開門, 斂殯以禮, 朝議皆以爲非, 而識者是之)”. 제주목사도 예로써 염습하였고 사관도 옳다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도 광해군에게는 상당한 팬(fan)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장례절차를 논하는데 예조에서 아뢴다. “임금께서도 한 차례 궐내에서 거림(擧臨: 문상절차)하시고 백관도 각 아문에서 변복(變服)하고 모여 곡하고 그치면 정(情)이나 예(禮)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上或於內庭, 一次擧臨, 百官亦於各衙門, 變服會哭而止, 則其於情禮, 似無所)”. 폐주의 죽음에 온 나라가 정과 예를 표하자고 감히 말하는 예조(禮曹)의 의견을 보면 광해군에 대한 당시 집권파들의 정서도 결코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우리시대에 와서 광해군과 부인 유씨를 추숭(追崇)한 일이다.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하고, 폐비 유씨를 소온사헌혜장왕후(昭溫思獻惠章王后), 능호를 열릉(烈陵)으로 추승하였다. 물론 국가가 한 일은 아니고 인터넷 논객들이 사사로이 한 일인데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우리 시대에 광해군 팬클럽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역사를 대하는 다양한 시각이 있어 재미있구나.
이제 광해군묘를 돌아 나온다. 임해군의 묘소를 찾아가 보자. 온 길을 돌아가지 말고 포장길을 따라 올라간다. 길은 동북방향으로 묘역으로 연결되고 교인들의 묘역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묘역에서 우측 산길을 찾아 잠시 내려오면 민묘 몇 기를 지나 봉인사 가는 길로 다시 내려오게 된다.
광해군 팬클럽이 만들어진 이유는?
봉인사 방향으로 잠시 나아가면 붉은 간판에 ‘시냇가 사슴농장’이라는 안내판을 만나고 이곳에 ‘임해군묘소 입구’를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여기에서 조심해야 한다. 무심코 이 비석이 가리키는 길로 들어서면 산 속 덩굴 속을 헤맬 우려가 있으니 아예 이 길을 포기하시라. 그대로 봉인사 방향으로 100m 쯤 나아가면 우측 실개천에 걸친 작은 쇠다리를 만난다. 이 쇠다리의 반대편에 불도저로 길을 낸 가파른 산길이 보인다. 이 길로 100여m 오른 능선에 임해군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묘소는 정갈하게 손보아 놓았다. 새로 세운 묘표에는 ‘臨海君之墓’라고 간단하게 쓰여 있고 뒷면을 보면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와 합장했음을 기록하고 있다(配郡夫人 陽川許氏 祔左).
임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을 왕위 승계 1순위 후보였다. 그러나 왕위를 이을 자가 못 이으면 그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우리 시대의 정치권력이나 기업의 승계구도도 이 원리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한지 보름도 되기 전에 임해군을 벌하라는 상소가 올라 왔다. 궁궐지척에다가 집을 지으면서 사사로이 가병(家兵)을 기르고 있으니 귀양 보내라는 것이었다(실록, 연려실기술). 대북(大北)세력은 국청을 열어 임해군을 따르는 자들을 국문하니 100여 명이 죽어 나갔고 목숨을 구걸한 자들은 임해군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했다 한다. 뻔한 스토리 아니겠는가? 광해군은 반대했으나 끝내 임해군은 진도(珍島)로 유배된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명(明)나라는 장자를 두고 차자가 등극한데에 의심을 품고 조선을 괴롭혔다. 명은 요동도사 엄일괴(嚴一魁)를 수장으로 하여 조선에 조사단을 파견한다. 간곡한 설득에도 엄일괴가 임해군 면담을 주장하자 조선 조정은 임해군을 서강으로 데려와 거짓 미친 척하게 하여 일단은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이 일이 화근이었다. 자칫하면 정권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대북(大北)은 임해군 처형을 원했다. 광해군으로서는 어머니의 한 배를 빌어 낳은 형을 죽일 수는 없었다.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임해군이 이듬해(1609년) 5월 교동(喬洞)에서 의문사(疑問詞)하였다. 그 날의 기록이 실록은 단 8자로 남아 있다.
“喬桐別將 以珒死聞(교동별장이 진(임해군)의 죽음을 알려 왔다)”.
같은 산줄기에 형제는 잠들어 있다. 잠시 북새통 같은 세월 뒤, 한 산줄기에 잠든 이 형제는 400여 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건너 산에 잠들어 있는 어머니 공빈 김씨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까? 이곳에도 잔설 속 나뭇가지는 봄기운을 키우고 있다. 문득 술 한 잔 마시고 싶다.
이제 임해군묘역에서 능선 길로 나아가 보자. 길이 보이지 않는데 묘지 뒤로 오르면 조선 후기 묘를 하나 만나고 그 묘를 지나면 천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등산로를 만난다. 길표지가 ‘다산길 13코스’를 알리고 있다.
남양주시는 구역 내 걷기 좋은 길을 개발하여 다산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 13개 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오늘 걷는 천마산 서쪽 줄기 관음봉코스는 다산길 13코스이며 진건면이 이름 붙인 진건둘레길이기도 하다. 그만큼 걸을 만한 코스라는 뜻도 될 것이다.
산길은 조용하고 걷기 쾌적하다. 잠시 산길은 평탄하게 이어지는데 평탄함 끝에는 반드시 가파름이 있는 법, 세게 치고 오르며 ‘된봉’이 된다. 높이는 475m밖에 안되건만 숨 몰아쉬고 오른 이들에게는 몹시도 된 봉우리였나 보다. 된봉 정상에는 갈 길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천마산 4.8km, 진건읍 4.9km. 오늘의 코스는 천마산까지는 아니고 관음봉까지로 잡는다.
1.3km의 쾌적한 산길이다. 봄눈이 산길을 가득 채웠다. 아마도 서울 근교에서는 이 겨울 만나는 마지막 눈이리라. 능선 길에는 바람을 온 몸으로 견디며 자란 청송이 여러 모습으로 세월을 견디고 있다. 그 위에 눈이 쌓였다. 키 작은 나무들에도 가득 쌓였다. 문득 이런 날에는 아직 잘 걸을 수 있게 버텨주고 있는 두 다리에게 감사드린다. 어쩌다가 내게로 와서 하고 한 날 이 수고로움에 시달리느냐? 싸우나 다니고 마사지 받는 이에게 갔더라면 호강할 것을…미안하구나 내 다리야.
이윽고 관음봉에 닿는다. 566m 제법 우뚝한 봉우리다. 사방에 시야가 트인 곳이다. 길은 세 갈래로 나뉘는데 천마산 방향 3.5km, 진건읍방향 6.2km, 온 길 된봉 방향 1.3km이다. 하산길을 진건읍(오남리) 방향으로 잡는다. 잠시 가파른 뒤 평탄한 능선길이다. 1km여 지나면 나무 아래 견성암 갈림길 표지판이 놓여 있다. 이 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 산 중턱에 고즈넉한 절 견성암(見聖庵)이 자리잡고 있다. 절마당에 서면 뒤와 좌우로는 천마산 관음봉의 산줄기가 호위하고, 앞은 트여 편안함과 호연(浩然)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경기 북부 35개 전통사찰 중 유일하게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견성암 연혁에 기록하여 놓았다. 왜 그랬을까? 견성암은 풍양조씨 종친들의 지원을 받는 문중사찰의 성격을 띠고 있다.
봉선사와 그 말사의 일을 기록한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견성암 편에는 이 절의 연혁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초 문하시중을 지낸 풍양조씨의 시조 조맹(趙孟) 공의 후손이 선조의 유적(遺蹟)을 추모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견성암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 무슨 유적이 있는 것일까?
풍양조씨 문중 은혜 입은 견성암 가는 길
견성암편에는 조맹 공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공은 젊었을 때 농사일에만 힘쓰고 세상에 이름 내는 일(聞達)에는 무심하였는데 이곳에 은둔하여 오직 매탄(埋炭: 숯굽는 일)으로 업을 삼고 매일 근 200리나 되는 송경(松京: 개성)을 왕래하였다. 이를 눈여겨 본 고려 태조가 공의 거처를 알고자 사람을 시켜 뒤를 따르게 했는데 천마산에 이르러 홀연히 사라지고 커다란 짚신 한 짝만 개울가에 걸려 있었다.
이 개천을 왕선(往仙)내라 부르며 훗날 태조가 방문하여 공을 만났고 공은 삼한 통일에 일조하게 되었다. 그 후 공은 다시 이곳으로 은둔하여 백세 후에는 천마산신령(天摩山神靈)이 되었다. 공이 이곳에 은둔했을 때 마시던 샘물을 독정(獨井)이라 하며 견성암을 달리 ‘독정이절’로 부른다는 것이다.
한편 공이 이곳에 은둔했던 수양굴(修養窟)이 있는데 그 곳에서 약사성상(藥師聖像)을 친견하였기에 이 절의 이름이 견성암(見聖庵: 약사여래를 친견한 암자)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절 뒷켠으로 돌아가면 이 굴이 있다.
또한 공이 손수 심었다는 기념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조씨 문중에 망중(望重)한 이가 사거(死去)하면 한 가지씩 말라 죽는다 하더니 말라 죽었나 보다.
이렇게 조맹 공과 관련이 깊던 견성암은 조씨 문중을 큰 시주로 하여 은혜를 입으며 독립된 절로 수 백 년 유지되어 왔는데 일제의 토지령(土地領; 1910~1918)이 내려지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견성암 산신각 석벽에는 철종 9년 풍양조씨로부터 시주받은 땅의 내용을 보월선사(寶月禪師)가 기록해 놓은 것이 있었다 한다. 내용인즉: 觴字 二負五束 盃字 一負一束 同字 三束 擧字 八束(상자 이부오속 배자 일부일속 동자 삼속 거자 팔속)라 한다.
토지령이 내려지자 풍양조씨는 이 기록을 기화로 절의 모든 땅 40여 두락을 위협 또는 무마하여 자신의 소유로 했다는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은 소유권이 문서화 되지 않은 토지를 조사하여 등록하는 일이었다. 봉은본말사지 기록자는 한탄하고 있다. 당시 주지 이엽하(李渫河)는 멍청한(沒分曉) 천치로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진위야 이제 알 수 없으나 봉은본말사지 기록자의 가슴 아픈 울림이 생생하다. “千年古刹을 危機一髮에 付케함은 僧俗을 勿問하고 痛惜不已云也 (천년고찰을 위기일발에 처하게 함은 승속을 물을 것 없이 통석을 그칠 수 없다)“ 이렇게 하여 견성암은 문중 절이 된 것 같다.
다행히도 견성암은 오늘도 고즈넉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소유의 탐 넘어 가르침은 여여(如如)하구나.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이한성 동국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