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타게 찾고 싶은 게 있다면 “공주 수원사 터에 가자”
공주행 버스에 오른다. 공주로 가는 차편은 고속터미널이나 남부터미널에서 수시로 있기에 예약이 필요하지 않다. 버스는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아 경부고속도로 천안에서 논산 방향 고속도로를 타고 공주에 닿는다. 이렇게 가볍게 백패킹길에 오르면 휘파람 불듯 가벼운 일탈감(逸脫感)을 즐길 수 있다.
이 길은 조선시대 삼남대로(해남대로)길이다. 지금에야 호남으로 가는 길이 대전을 거쳐 가지만 그 옛날에는 공주를 거쳐 갔다. 장원급제하여 춘향이 찾아가는 암행어사 이몽룡도 이 길을 거쳐 남원으로 달려갔다. 명창 김소희 선생이 자진모리로 몰고 가던 그 사설이 떠오른다.
“남대문밖 썩 내달아 칠패팔패 철패(鐵牌) 배다리 동작 월강, 과천 들어 중화허고 수원들어 숙소허고 천안삼거리 지내어 도리치(道里峙) 등기 역말 원터고개를 넘은 후 팔풍정을 당도허니 퉁소소리 들리거날 퉁소소리 잠깐 듣고 궁원 환원 광정 공주 금강(錦江) 월강(越江) 장기대 높은 행길... ”. 신난 이도령이 이렇게 달려 나갔다. 그런데 내 마음은 두 시간 만에 1500년을 건너 백제(百濟)의 그 날로 훌쩍 넘어가 버린다.
서기 475년(개로왕 21)년 9월의 일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친히 3만 군대를 거느리고 파죽지세로 백제 땅으로 밀고 내려 왔다. 이때 개로왕이 아들(일본서기에는 아우로 기록함) 문주에게 후사를 맡기고 최후까지 전장에 남는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계통을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蓋避難以續國系焉?)”
이 말대로 7일 만에 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생포되어 아차산 아래로 끌려와 죽임을 당하였다.(縛送於阿且城(阿旦城)下 戕之) 이 때 문주가 나라의 계통을 이으려 옮겨 온 땅이 웅진(熊津: 곰나루, 지금의 공주)이었다. 이 곳 웅진 땅에서 백제는 문주, 삼근, 동성, 무녕, 성왕에 이르는 5대 63년을 제2의 서울로 삼아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이 때의 역사의 발자취가 궁금해진다. 버스는 금강(錦江)을 끼고 터미널에 도착한다. 나지막한 건물들, 한적한 거리가 문득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하다. 터미널 앞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 108번(또는 125번)을 이용하여 옥룡동주공아파트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앞쪽으로는 터널이 보인다. 길을 건너 터널방향으로 잠시 나아가면 수원사지(水原寺址)를 좌측으로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수원사(水原寺). 동국여지승람에는 월성산에 있다고 하였다(在月城山). 지금도 수원사지가 있는 동네 이름이 수원골이다. 조선 후기 지도에는 수원사가 눈에 띄지 않으니 임진, 병자 양란(兩亂)을 겪으면서 폐사된 것 같다.
절터는 1990년대에 공주대가 발굴한 이후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 탑이 자리했을 터에는 몇 개의 받침석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특별히 탑재(塔材)도 발굴된 것이 없으니 누군가가 반출해 갔을 것이다. 절은 백제의 절이었건만 백제 패망 후 후기신라 때 세운 탑이라 한다.
이 땅 절터에 서 있던 많은 석물(石物)들이 임진 병자 양란 때 부서지거나 반출되었고, 조선의 유생(儒生)들에 의해 훼손된 것들도 적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빼앗기고 팔려 나간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나마 값어치 없어 보이던 석물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우리 시대에 와서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지금도 어느 큰 집 정원에 서 있는 탑, 부도, 석등, 문인상… 이런 것들은 대부분 이렇게 흘러 나간 장물(贓物)들이다.
삼국시대 수원사는 꽤 유명한 절이었던 것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 항목에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花 美尸郞 眞慈師) 조(條)가 있는데 신라의 승려 진자(眞慈)가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땅 수원사로 미륵선화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자는 매양 미륵불 앞에 나아가서 소원을 빌었다. “원하옵건데 우리 대성께서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나타나시면 제가 항상 가까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願我大聖化作花郞 出現於世 我常親近晬容 奉以周旋)” 그 성의가 지극했는지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났다.
“공주 수원사 가면 미륵선화를 보게 될 것”
“웅천주(지금의 공주) 수원사로 가면 미륵선화를 보게 될 것이다.(往熊川州 水源寺 得見彌勒仙花)“ 진자는 너무 감격하여 열흘길을 가면서 일보에 한 번씩 예를 올렸다.(一步一禮) 연전(年前) 환경운동을 하는 어느 스님과 신부님은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했는데 아마도 진자로부터 노하우(Knowhow)를 배웠던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진자는 수원사에 도착하여 미륵선화를 만나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사실은 수원사에 도착했을 때 그를 안내한 동자(童子)가 미륵선화였음을 나중에 듣게 된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 보자.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고 돌아와 보니 파랑새는 우리집 새장에 있고, 봄을 찾아 온 산을 헤매고 왔더니 앞마당 매화가지에 벌써 봄은 와 있었던 것이다(春在枝頭已十分).
살다가 어느 날 무언가 애타게 찾고 싶은 것이 있거든 공주 수원사 터로 가 볼 일이다. 내가 찾던 그것이 이미 내 곁에 있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수원사 터에서 월성산 정상까지는 1.2km의 산행길이다. 오르는 길은 잘 다듬어져 있고 미끄러지지 않게 나무로 정돈해 놓았다. 안내판도 서 있는데 공주는 주위의 산길을 이어 공주대간(公州大幹)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길을 다듬었다. 월성산 오르는 길도 공주대간의 한 줄기로 이어져 있다. 월성산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봉수대(烽燧臺)를 재현해 놓았다. 산벚꽃 흐드러진 정상은 아름답다. 아쉬운 점은 봉수대에 고증(考證)절차는 없었던 듯하다.
월성산봉수(月城山烽燧)는 순천(順天) 돌산도에서 출발하여 서해안 바닷가와 충청을 지나 한양 목멱산으로 이어지는 제5라인(五炬)의 봉수로서 공주를 대표하는 봉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남으로는 이산현 성산(후에 魯城山)봉수에 응하고 북으로는 고등산에 응한다.(南應尼山縣城山 北應高登山)고 하였다.
이제 주미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정상에 세운 안내판에서 서쪽 두리봉 방향이다. 산길은 선명하게 잘 나 있다. 계속 주미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주미산(舟尾山)까지는 산길 4.9km로 표시되어 있는데 오늘 첫 답사 길은 도중에서 갈려 생태공원으로 내려가는 2.6km의 평탄한 길이다. 고갯길 하나 지나 산불초소가 있는 봉우리에서 내려오면 생태공원으로 내려가는 능선길 삼거리를 만난다. 생태공원 1.3km, 주미산 3.6km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에서 갈라지지 말고 다시 100m 주미산 방향으로 전진하면 또 하나 생태공원 갈림길 안내판이 서 있다. 계속 전진하면 주미산에 다녀 올 수 있다. 그 곳에는 공주 혈사(穴寺: 바위굴이 있는 사원) 중 하나였던 주미사(舟尾寺)터가 있는데 아쉽지만 오늘은 이곳에서 생태공원 방향으로 전진.
이윽고 금학동 생태공원 저수지가 나타난다. 산벚꽃 길인데 저수지 물이 말랐다. 저수지 아래쪽으로는 예쁘게 공원을 가꾸어 놓았다. 앞쪽으로는 흰색 전원주택이 동쪽 방향으로 보인다. 집 뒤쪽으로는 오르는 시멘트길 옆 남산 기슭 비스듬한 평탄지가 남혈사지(南穴寺址; 충남 기념물 35호)이다.
절터에는 탑자리 지대석(地臺石) 이외에는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구산선문 희양산파를 이끌던 정진국사(靜眞國師)가 이곳에서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터 앞쪽 기슭에는 민간 여염집 같은 건물이 있는데 남혈사 터 굴 옆에 자리잡은 절이다. 신도가 없는지 법당문은 닫혀 있다. 다행히 백제시대부터 부처님을 모시고 불도를 닦았을 굴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들어가 보니 작은 여래상을 모셔 놓았다.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굴에 묻어 있다.
한양 목멱산으로 이어지는 공주 월성산 봉수대
일제 강점기 때 공주고보 한문교사였던 가루베지온(輕部慈恩)은 1928년 이 굴에 들어 와 보살상을 수습했다 한다. 그는 공주에 근무하면서 공주의 고분과 절터를 다니면서 발굴과 유물을 수습한 사람이다. 송산리 6호분은 그가 발굴한 대표적 유적이다. 이런 발굴의 결과를 가지고 그는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하여 그 당시 백제역사연구의 일인자가 되었다. 문제는 그가 과연 백제를 사랑했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의 지식욕과 유물에 대한 물욕(物慾)이 그를 지배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그는 달랑 보잘 것 없는 유물 4점만 반환하였다 한다. 그가 수습해 간 유물이 그게 전부였을까? 되돌려 받아야 할 귀한 유물들이 그 후손들의 손에 있지 않을까? 공주 역사를 풍성하게 할 키(key)는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아쉬움을 묻은 채 남혈사지를 떠나 개울을 따라 내려오면 금학동 주민센터가 있다. 이곳에 들려 금학동사지(절 이름은 잊혀짐) 위치를 물었건만 이미 주택지로 변해 절터는 없다는 답을 전해 듣는다. 공주박물관 뜰에 가면 금학동 절터에 남아 있던 고려의 여래좌상과 백제시대의 광배(光背)가 전시되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아도 광배는 아름답다. 광배 앞에 모셔져 있었을 석불을 만나보고 싶다. 저 수준의 광배라면 불상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또 하나 찾아가 보고 싶은 절터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망월산에 있다(在望月山)’고 한 서혈사지(西穴寺)의 옛터이다. 공주에는 혈사(穴寺)가 많다. 동혈사(東穴寺), 서혈사(西穴寺), 남혈사(南穴寺), 주미사(舟尾寺), 금학동사지, 정지사지. 자연석굴이 있는 곳에 터를 잡아 가람을 일군 것이다. 이 시기 중국의 북위(北魏), 남제(南齊), 양(梁)나라 불교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 유명한 돈황석굴(敦煌石窟)은 북위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혈사는 공주시청 뒤 봉황산, 일락산 줄기 넘어 망월산 중턱에 있다. 남혈사가 있는 남산에서 바라보면 망월산이 건너다보인다. 주민들은 망월산을 굴산, 굴바위산, 서혈산, 쉬엇골산으로 불러 왔다 한다. 모두 산이나 지역 특성을 잘 나타낸 이름들이다.
금학동에서 서혈사 기점이 되는 시어골까지 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다. 특이하게도 시어골은 공주시내 안에 있으면서도 앞은 봉황산 일락산으로, 뒤는 망월산으로 막혀 있는 오지마을이다. 걷자니 산 넘어 마을이요 대중교통을 타자니 오지마을이라 버스가 없다. 택시를 타기로 한다. 거리가 가까워 기본요금 조금 넘는 금액이다. 나올 때를 대비해서 기사님 전화번호를 적어두자. 서혈사 오르는 이정표는 ‘웅천관광농원’이다. 택시에서 내려 웅천관광농원 안으로 닦아놓은 농장 안 포장길을 500여m 오르면 우측으로 절터가 나타난다. 안내판도 세워져 있고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서혈사의 연혁은 분명치 않다. 언젠가 폐사되었는데 1920년대에 일본인 가루베지온(輕部慈恩)이 동경의 고고학잡지에 ‘백제의 구도 공주의 서혈사와 남혈사지’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세상 표면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 때 수습한 기와편에 ‘西穴寺’ ‘三寶’ 명문이 발견되어 이곳이 서혈사 터임이 분명해졌다. 다행히도 이 와당들은 2006년 11월 일본 측에서 공주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고향으로 돌아 왔다. 한편 해방 후 발굴한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은 백제 것이 분명하여 서혈사는 백제시대부터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27년에는 3구(軀)의 석불상(石佛像)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공주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불행히도 백제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후기신라의 유물이라 한다. 두 불상(석가모니, 비로자나불)은 목이 잘려 몸체만 남았는데 그래도 몸의 비례가 아름답다. 온전한 석가모니불상은 보물 979호로 지정되어 박물관 안에 전시되고 있다. 가름한 상호(相好), 균형잡힌 몸매는 요새 시대에 유행의 거리에 나서도 빠지지 않는 스타일이다. 서혈사 부처님들은 한결같이 소식(小食)하며 운동도 게으르지 않으셨던 것 같다.
이제 서혈사의 석굴을 찾아 나선다. 절터 북쪽 끝에서 벗어나 산길로 100m 오르면 평탄지가 나온다. 누군가가 기거했을 무너져 내리는 토담집이 있다. 아마도 근래까지 정성드리는 이들이 살던 흔적 같다. 그 앞으로는 절벽이 있는데 지게문을 달아놓은 석굴이 있다. 석굴은 넓고 석간수도 떨어진다.
달리 모셔놓은 불상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돈황석굴의 예(例)에 따른다면 아마도 이 굴에는 불경들도 간직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쉽구나. 15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옛 흔적은 없고 흉가 같이 무너져 내린 폐가 속에 버려져 있다니.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듯하다.
다시 농원을 나서서 택시를 부른다. 대통사지(大通寺址)로 여겨지는 절터가 있는 다운타운 반죽동으로 향한다. 공주의료원 앞 중학동에서 하차. 혹시 남혈사에서 서혈사지 답사를 생략하고 대통사지로 막바로 오려고 하면 금학동 공주여고 앞 버스정류장에서 100번 버스로 이곳 중학동에 다이렉트로 오는 방법이 있다. 중학동에서 길을 건너 골목길로 들어선다. 잠시 후 개울을 만난다. 공주 시내 한 가운데를 흐르는 제민천이다.
백제시대부터 존재한 망월산 서혈사지 일화
골목에는 예사롭지 않은 교회가 서 있다. 공주제일감리교회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스크랜튼(Scranton) 선교사가 1892년 시작한 교회라 한다. 스크랜튼 선교사라면 이화학당을 설립한 한국여성교육의 선구자 아니던가. 1931년에 지은 교회건물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고 자세한 자료는 부속박물관에 있다는 안내판이 따로 붙어 있다는데 박물관 개관시간도 안내되어 있다. 다음 번 공주에 올 때는 들려 보리라.
교회에서 골목길로 잠시 들어가면 골목길 사거리가 나오면서 대통1길을 알리는 거리표지판이 나타난다. 좌로는 28번, 우로는 32번을 가리키는데 우측 32번길로 우회전하면 아담한 공원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다. 당간지주 옆으로는 많은 석재(石材)들이 놓여 있다.
남혈사지와 서혈사지를 조사한 가루베지온(輕部慈恩)은 일제 강점기에 이미 이 절터를 조사하여 보고서를 남겼다. 그 보고서에는 어골문(魚骨紋)기와에 대통이라는 글씨가 완연한 기와편을 보이고 있다. 당간지주가 서 있는 이곳 반죽동 중동 지역의 절터가 대통사임이 분명하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기와표면에 원형의 돋움 부위를 만들고 그 위에 대통(大通)이라는 글씨를 새긴 기와편도 대통사지와 부여 부소산성 동문 자리에서 출토되었다. 성왕(聖王)은 대통사를 지을 즈음(525년 또는 527년)에 부여천도를 위한 준비를 이미 진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대통사 창건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신라가 “대통(大通: 양나라 무제의 연호) 원년 정미(丁未)에 양제(梁帝)를 위해 웅천주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통사로 했다.(於大通元年丁未 爲梁帝 創寺於熊天州 名大通寺)”는 것이다. 이 기사대로라면 신라가 백제 땅에 절을 지은 것이 되니 아마도 맞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학자들은 성왕이 부친 무녕왕과 아들 위덕왕을 위해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대통불(大通佛)을 봉안하고 대통사라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대통사는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다. 보물 150호 당간지주 이외에도 공주박물관 뜰에 전시되어 있는 보물 148호 149호 두 개의 석조(石槽)가 그 수준을 말해 준다. 원형의 석조도 특이할뿐더러 표면을 장식한 연화문(蓮花紋)도 격을 달리한다. 석조는 물통으로 쓰이거나 연지가 없는 절에서 연꽃을 길러 부처께 공양하는 용도로 쓰였다 하는데 이곳의 석조는 아마도 연꽃을 길렀을 것이다. 석조에서 피는 연꽃을 상상하면 저절로 상쾌해진다.
당간지주가 서 있는 공원 일부를 제외하고는 옛대통사터는 모두 요새 사람들의 건물터로 잘려 나갔다. 아쉬움을 접고 대통사지를 떠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제민천을 끼고 내려와 먹자골목으로 향한다. 좋은 가격에 괜찮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다음호 계속)
교통편 - 남서울터미널/ 고속버스터미널 ~ 공주터미널 ~ 환승 108/125 버스 ~ 옥룡동 주공아파트
걷기코스 - 수원사지~ 월성산봉수 ~ 금학동 생태공원 ~ 남혈사지 ~ 서혈사지 ~ 시내 중학동~ 대통사지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의식 기자)
박현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