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아티스트 - 박현수 작가]존재의 그림자와 실재의 반영
구멍은 실체, 벽면에 투사된 이미지는 실체가 만든 반영이자 그림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박현수의 그림은 추상이다. 흔히 추상으로 치자면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핵심 개념이며 형식논리로 알려져 있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원인을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찾는, 형식주의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은 추상이면서, 동시에 이런 순수 형식적인 요소며 논리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추상이면서, 동시에 이러저런 의미며 내용을 탑재하고 있다. 추상이라는 말이 원래 압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감각적 실재든 관념적 실재든 그 실재를 압축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에서 받는 추상의 인상은 추상의 원래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추상과 형상을 종횡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CS-G, Oil on Canvas, 72.7x50.3cm, 2013
작가의 그림에서의 추상은 그런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러저런 의미내용을 탑재하고 있는 추상회화, 이러저런 의미내용의 메타포로서의 추상회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고, 그 자체를 일종의 상징추상으로 부를 수 있겠다. (중략)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 내지 과정은 크게 드리핑 기법과 디깅 기법으로 이뤄진다. 흘리기 기법과 발굴 기법이다. 발굴 기법? 도대체 뭘 어떻게 발굴한다는 것인가. 발굴은 작가의 그림에서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의 그림을 들여다보자.
▲CS14-W, 91.0x72.7cm, Oil on Canvas, 2014
작가는 우선 흘리기 기법을 통해 바탕화면을 조성한다. 그렇게 현란한 원색들이 난무하는 것 같은 화면이 만들어지고 나면, 원색과는 대비되는 중성적인 색채로 화면을 덮어서 가린다. 그리고 이러저런 기하학적인 형태를 변주한 이미지를 그려서 중첩시키는데, 주로 원 형상을 변주한 이미지들이다. 화면에서 원 형상은 단독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큰 원 속에 작은 원이 포함되는, 원과 원이 중첩되고 포개지는 형태로 그려진다. (중략)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기하학적 형상 내지 도상으로 치자면 단연 원을 꼽을 수가 있다. 이러저런 정형 비정형의 원 형상이 그림의 기조가 되고 있는 것. 작가가 이처럼 유독 원 형상에 천착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작가의 작업을 그리고 보다 본질적으로는 작가의 전작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형식논리를 이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CS14-B, 60.6x60.6cm, Oil on Canvas, 2014
원 자체는 일종의 에너지원으로 볼 수가 있겠고, 그렇게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에너지를, 그리고 그 운동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며 맥락에서 근작에서의 세도우 곧 그림자 시리즈는 사물형상이 최소단위의 원소로 환원될 때 드러나는 원 형상의 희뿌연 가장자리 라인을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말하자면 일종의 존재의 그림자 내지 존재의 에너지를 그린 그림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중략)
▲CS-R, Oil on Canvas, 72.7x50.3cm, 2013
존재의 에너지를 그린 그림
작가의 그림에서 빛은 그라데이션 기법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중첩된 원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미세한 파동이나 흐릿하게 지워진 원 형상의 가장자리에서처럼 암시적으로 다가온다.
빛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양이 없는 음은 생각할 수가 없다.
빛은 그림자와 대비될 때 실제보다 더 빛나 보이고, 그림자는 빛의 반영으로 인해 존재의 이유를 얻는다. 작가는 세도우 곧 그림자 시리즈에서 세포로 환원되고 우주로 확장되는 존재의 모나드를 형상화했다면, 일련의 커팅 시리즈에선 빛의 질료며 질감이 그 뚜렷한 실체를 얻는다.
▲Oval 13-YB, 182x122cm, Oil on Canvas, 2013
그날그날의 일상 내지 인상을 써내려간, 마치 일기와도 같은 심정으로 제작한 작업이며, 검은 종이에 커팅 한 작업이다. 커팅 된 모양새로 치자면 작가가 다른 그림에서 스퀴지로 긁어내 만든, 발굴된 이미지들의 변주로 보면 되겠다.
세도우 연작과 커팅 시리즈가 서로 별개이면서 통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커팅 한 종이들을 연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하나의 전체 화면을 조성한 연후에 공간에다 설치한다. 그리고 전면에서 조명을 가하면 커팅 된 구멍을 투과한 빛이 벽면에다 커팅 된 모양 그대로의 형상이며 이미지를 투사한다.
▲Circle14-BB, 200X200cm, Oil on Canvas, 2014
그렇게 투사된 이미지는 실체가 있는 것인가. 비록 가시적이지만 실체로 치자면 오히려 종이에 커팅 된 구멍이 실체에 가깝고, 벽면에 투사된 이미지는 다만 그 실체가 만든 반영이며 그림자가 아닌가. 이렇게 커팅 시리즈(실체의 그림자)는 재차 세도우 시리즈(존재의 그림자)와 통한다. 서로 부연하는, 상호 주석 관계로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 특히 근작에서의 세도우 연작과 커팅 시리즈는 실재와 그림자의 문제며, 실체와 반영의 문제로 건너가는, 아님 이를 본격화하고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 고충환 미술평론가 (정리 = 왕진오 기자)
글·고충환 미술평론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