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지고 부유한 땅, 삼국시대 요충지 “설봉산성은 6세기 전 백제가 쌓았다”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불국토(佛國土)를 이룬 나라 고려, 그 나라가 남긴 절터는 수도였던 개성(松都)과 강화뿐 아니라 남쪽으로도 길게 이어진다. 양주(楊州) 땅 현재의 북한산 주변, 광주(廣州) 땅이었던 하남 춘궁동 일대에 이어 이천(利川)과 여주, 죽산(竹山), 안성(安城)과 남한강 유역에 그 흔적을 넓게 남기고 있다.
오늘은 이천 땅에 남아 있는 고리짝(고려적) 절터를 찾아 나선다. 이천 땅 구석구석에 남겨져 있는 그 흔적들을 한 나절에 살펴보기란 어림도 없다. 할 수 없다. 설봉산(雪峰山)을 중심으로 한 자취에 한정할 수밖에.
이천으로 향하는 버스는 강남고속터미날, 동서울터미날에서 20~30분 간격으로 출발이다. 거기뿐 아니다. 웬만한 도시에서는 이천으로 오는 버스가 있고 수도권에서도 이천으로 오는 버스들이 있으니 굳이 터미널을 경유할 필요가 없다.
버스는 도자기 마을 사음동을 지나 기치미 고개(도자기 언덕)를 넘어 관고동으로 내려간다. 눈 아래로는 이천 시가지가 펼쳐진다. 예전부터 이천 읍치가 있던 땅으로 이천의 중심지이다. 민간의 전설로는 충주 탄금대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신립(申砬)장군의 관(棺)이 이 고개를 넘을 때 장군님하고 부르니 ‘에햄~’ 기침소리를 내었기에 기치미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장군 신립을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를 제수하여 밀려오는 왜군을 막도록 하였다. 얼치기로 선발된 8000명의 군대로 어찌 수많은 전투에서 단련된 왜군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탄금대에서 죽음을 맞고 그도 모자라 문경 새재에서 적을 막지 않아 패배했다는 누명까지 씌워 이제껏 장군을 바보 취급하는 사가(史家)들도 있다.
임진란에서 준비 안 된 조선은 애초부터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준비된 전라좌수영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면 왜군의 침략을 막을 조선의 군대는 없었던 것이다. 신립 그 이는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장군님하고 부르니 울분을 토하지 않고 그저 에햄 하셨다니 쉽게 자신을 변명하며 울분을 토하는 요새 세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관고동(官庫洞)을 지나 버스는 터미널에 닿는다. 관고동의 옛 지명은 관후리(官後里)로 관아(官衙)의 뒷동네라 그리 불렀다 한다. 그러던 것이 관고(官庫)로 바뀐 것을 보면 아마도 미곡창(米穀倉)이 있었나 보다.
터미널 건너편에는 이천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길 건너 작은 숲이 있는 정류장에서 24-1, 24-2, 24-7, 114, 또는 이천시내공영버스를 타면 양정여중고로 갈 수 있다. 걸어도 20분, 택시로는 기본요금도 미처 되지 않는 거리이다. 학교 경비아저씨께 이곳에 있었던 3층탑 자리를 보러 왔다 하면 아저씨는 친절하게 그 위치를 설명해준다.
100년 전 지금의 교정 동북쪽에 해당하는 산기슭에 두 석탑이 나란히 서 있었다.(관고동 442). 절은 이미 무너져 그 터 서리만 남은 곳에 3층탑(어쩌면 5층탑)과 5층탑이 서 있었다. 절의 이름은 잊혀졌다. 하남 춘궁동 동사(桐寺)터에 가면 지금도 3층탑과 5층탑이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아마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 탑에 불행이 찾아 온 것은 1915년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물산(物産)을 장려한다는 미명 아래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요즈음의 엑스포)를 1915년 9월 11일부터 경복궁에서 개최하였다. 이 때 이천 5층석탑도 공진회 장식품으로 경복궁 공진회장으로 옮겨가게 된다. 또한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도 헐려 나갔는데, 세자 내외가 거쳐하던 동궁 내실 자선당(資善堂)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914년 9월 철거되어 1916년 일본 오꾸라(大倉)호텔 마당으로 이건되었다.
신립 장군 관이 지나간 기치미고개(도자기 언덕)에 얽힌 전설
호텔주 오꾸라 가히찌로(大倉喜八郞)는 일본 군부와 결탁하여 큰돈을 모은 상인이었는데 한국 문화재에 대한 탐욕이 극에 달했던 사람이었다. 옮겨간 자선당을 오꾸라 슈고깐(大倉集古館)이라 이름 붙이고 한국에서 쓸어간 귀중한 문화유산을 모아 놓았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 건물을 장식할 한국의 석탑을 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당시 평양정거장 앞에 있던 7층 석탑을 총독부에 요구하였다.
고적조사위원회에서는 한국인의 반감을 우려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거물 오쿠라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1915년 공진회 때 이천에서 옮겨온 석탑을 오꾸라에게 내 주었다. 이로써 이천 5층 석탑(망현산 5층 석탑 또는 이천 향교방 5층 석탑)은 1918년 10월 또 한 번 고향을 떠나 일본 도오꾜오(東京)로 옮겨지는 신세가 된다. 지금도 이 탑은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에 있던 팔각석탑(율리사지 팔각 5층 석탑)과 함께 고향을 그리며 오꾸라호텔 뜰에 서 있다.
한편 동궁 내실 자선당은 어찌 되었을까?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 사라졌으며 그 초석은 1995년 12월 돌아와 지금은 경복궁내 건천궁 청휘문 밖에 놓여 있다. 이천 시민들은 타향에서 100년 가까운 세월을 외로움에 떨고 있는 오층석탑 반환을 일본 측에 요청하고 있으나 아직은 답이 없다.
한국인들이여. 우리 탑이 돌아오기까지는 오꾸라 호텔 체인에서 어찌 편히 다리 펴고 잘 수 있단 말이요. 이 탑이 양정여중고 교정에서 100년 가까이 짝을 기다리다가 작년(1013년) 시립이천 박물관 뜰에 옮겨진 3층탑(혹은 5층탑)과 다시 짝을 이룰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
참고로, 오꾸라 가히찌로(大倉喜八郞)와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또 하나의 한국문화재 사냥꾼 오꾸라가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고리대금업자로 살면서 우리 문화재를 약탈한 오꾸라 다께노스께(小倉武之助)가 그이다. 두 오꾸라 모두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사람들이다.
이제 학교 건물 앞 탑이 있었던 자리의 표지판을 확인하고 뒷문으로 나아간다. 산쪽으로 시립도서관 앞에 이천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1389년(공양왕 1년) 안흥리에 안흥정사(安興精舍)를 열어 학생교육을 시작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좌측 망현산길로 들어서는 오솔길이 있다. 오르는 첫 목에는 자연석 바위 하나가 있는데 오래 전 새긴 글씨가 있다.
봉호탑(鳳乎塔:봉새가 탑에)이다. 향교증축 때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이곳을 떠난 새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선비 박정수, 이면용이 의식을 했던 곳이란 설명판이 있다. 이제는 조용하고 숲도 우거졌으니 새들이 돌아 왔을 것이다.
숲길이 편안히 이어진다. 길을 따라 작은 봉우리 하나 넘으면 도로 터널 위 안부가 있는데 앞으로는 운동기구가 있는 봉우리를 만난다. 다시 두 번째 봉우리 직전 좌측으로는, 철조망을 두른 건물군(建物群)이 아래로 보인다. 다산고등학교 펜스이다. 본 산길을 버리고 이 철조망을 끼고 좌측 방향으로 길을 꺾으면(철조망을 우측으로 끼고 남향)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길이다.
잠시 후 다산고등학교 후문 포장도로에 닿는다. 길을 돌아 큰길로 나서면 3번국도 기치미고개에 닿는다. 고개는 도자기 고장답게 도자고개라 이름 붙이고 도자기 문양을 활용한 장식을 해 놓았다. 고갯마루 육교를 건너 SK주유소 옆길로 들어서면 천태종 소속 사찰 장화사에 닿는다.
장화사는 아직 임시건물에서 향촉을 밝히고 있다. 절을 지키고 있는 보살님 말씀에 이 터가 절터였다 한다. 기록이 없어 어떤 절이였는지는 알 수 없는데 부지 넓고 햇볕 잘 드는 아늑한 자리이다. 불사(佛事)를 시작한 넓은 터 동쪽 끝 검은 비닐농막 옆으로 길을 찾아 설봉산을 오른다.
이렇게 코스를 잡으면 망현산~기치미고개~설봉산으로 이어지는 이천의 북쪽~서쪽을 잇는 종주코스를 잡을 수 있다. 평야지대 이천은 큰 산이 없기에 이렇게 코스를 잡으면 한 나절 3~4시간 충분히 걸을 수 있는 코스가 된다.
양정여중고 교정의 석탑 터에서 본 문화재 약탈의 아픈 기억
약 800m 걸어 설봉산성(관고리산성, 무안산성) 북단에 도착한다. 산성은 사적 423호로 지정되었다는데 둘레 1079m의 포곡식(包谷式: 계곡을 포함하여 넓게 쌓은 형식)산성이라 한다. 서문 자리, 동문 자리, 북문 자리도 발굴하였고 치성(雉城: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튀나오게 쌓은 부분)도 4개소나 찾았다 한다.
특히 서문 자리에서는 6세기 이전 백제 토기를 여럿 발굴하였다 하는데 이로써 백제는 6세기 이후에나 석성(石城)을 쌓았다는 그 동안의 이론을 바꿀 수 있는 근거를 찾았다 한다.
결국 이 성은 백제가 쌓은 것인데 개로왕이 죽음을 맞은 475년 무렵 이후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발굴 결과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고구려, 신라, 백제 것들이 모두 발견되었다. 이천 땅은 삼국이 첨예하고 부딪치던 격전지였던 것이다.
성 안에는 남장대로 여겨지는 건물터가 잘 보전되었고, 자연석 칼바위는 우뚝 서서 꺾이지 않는 기개를 보이고 있다. 또한 봉화대도 어설프게 재현해 놓았고, 팔각의 석단(石壇)도 재현하여 사직단(社稷壇)이라 하였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사직단은 부 서쪽에 있다.(社稷壇:在府西)“라고 하였고, 성황사는 설봉산에 있다.(城隍祠:在雪峰山)라고 했으니 아마도 사직단이라 한 것은 성황사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이제 설봉산 정상을 향한다.
안내판이 1.03km를 알려 준다. 정상으로 가는 능선길은 평탄하다. 오늘 걷는 길은 숲이 우거져 내내 숲속길을 걷는다. 연자봉(硏子峰)이라 쓴 바위 곁을 지난다. 바위 모양이 연자방아의 가는 부위 연자매(硏子磨)처럼 생겨 그렇게 이름지었나보다.
이윽고 정상 도착. 394m를 알리는 설봉산 정상석이 이천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지금의 이름 설봉산으로 그려져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부의 서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 主山)이라 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무학(舞鶴), 부학(浮鶴) 북악(北岳) 등이다. 내려다보이는 이천 땅은 넓고 평탄하다. 조선 초 학자 권근(權近)은 향교기에서 ‘땅은 넓고 기름지며 백성은 많고 부유하다(土廣而腴 民衆而富)’고 했다.
땅이름 이천(利川)도 넉넉하게 느껴진다. 이섭대천(利涉大川:내를 건너니 이롭구나)에서 온 말이라 한다. 어떤 부지런한 이가 세어 보았는지 주역(周易)에 이 표현이 14번이나 나왔다 한다.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는 이섭대천이라는 괘사(卦辭)가 이 지방의 지명으로 쓰 이게 된 내력이 적혀 있다.
“남천(南川): 서목(徐穆)이 고려 태조를 인도하여 건넌 것이 곧 이 내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태조가 장차 백제를 치려하여 군사를 이 고을에 주둔시키고, 점을 쳐서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점사(占辭)를 얻었기 때문에 이천(利川)이라 했다.’ 한다”. 즉 남천을 건너 후백제를 평정함이 좋다는 점괘를 얻어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신검을 무찌를 수 있었다.
하산길에 나선다. 소나무향 짙은 나무층계길이다. 200m 내려오면 부학봉갈림길이다. 좌측은 영월암, 우측은 화두재이다. 영월암(映月庵)으로 내려온다.
설봉산 품에 따듯하게 안긴 예쁜 절이다. 전해지기로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하는데 알 수는 없다. 옛 이름은 한결같이 북악사(北岳寺)였다. 설봉산은 일명 북악산이니 산 이름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18세기 들어 영월 낭규대사가 이 곳에서 주석한 이후 영월암이 되었다 한다.
범종각 아래로는 수령 600년 된 은행나무가 영월암의 나이를 증언하고 있다. 나옹선사가 이곳에 머무를 때 꽂아놓은 지팡이가 노거수(老巨樹)가 되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이 절에는 살펴보아야 할 3가지 진귀한 불교 유적이 있다. 첫째가 보물 822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다. 대웅전 뒤 언덕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키 9m 내외, 어깨 3m 쯤 되는 거구로 동네 씨름선수 같은 느낌을 준다. 부처상이라기보다는 어느 보살이나 아라한을 새겨 놓은 느낌이다. 고리짝(고려적) 때 솜씨이다.
설봉산 품에 안긴 영월암에는 고려시대 진귀한 불교유적 세 가지
그 아래쪽 층계길에는 3층탑이 서 있다. 탑의 모든 부재는 일실되고 옥개석 3개만 남았는데 나머지 부재는 모두 근래에 제작하여 탑을 다시 세웠다. 그 정성이 느껴진다. 역시나 고려적에 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요사채 뒤로 최근에 터를 고루고 자리잡게 한 광배(光背)와 연화대좌(蓮花臺좌)이다. 홍천 물걸리 광배, 좌대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섬세하고 아름답다. 막상 그 자리에 앉아 았어야 할 불상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렇게 사라진 유산들이 많아 가슴 아프다. 이 정도의 솜씨라면 적어도 보물급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산길로 다시 돌아온다. 산길 300m 아래에 삼형제 바위가 있다. 고만고만해 보이는 자연암 3개가 쪼르르 암반 위에 자리한 모습이다. 여름철에는 숲이 우거져 시야가 가린다. 안내판에 전설이 적혀 있다.
“옛날 늙은 어머니와 우애, 효성이 지극한 삼형제가 살았는데, 어느 날 설봉산으로 나무를 하러간 세 아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아들을 찾으러 산으로 가게 되었다. 돌아온 아들들은 어머니가 안 계시자 산으로 갔고 온 산을 헤맬 때 어디선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수십 길 낭떠러지 아래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었다.
삼형제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똑같이 절벽을 뛰어 내렸는데 그 순간 세 덩어리의 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산길 50m 아래 평탄지에는 석탑을 세웠던 기단석(基壇石)이 등산로에 묻혀 있다. 뒤로는 산죽이 무성하고 그 속에 깊은 샘물이 잊혀진 채로 남아 있다. 아마도 망월암(望月庵)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관고동 산65).
이곳에서 잠시 등산로를 내려오면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영월암을 찻길로 오르는 길이다. 그 곳까지는 500m라고 쓰여 있다. 포장도로 건너편은 층을 이룬 넓은 평탄지가 정비되어 있다. 설봉산 산림욕장이다. 여러 번 터를 정비해서 몇 개의 기와편도 찾기 어려운 이 곳 또한 절터이다(관고동 산64-1). 약사암(藥師庵)터로 추정되는 곳이니 영월암, 추정 만월암, 추정 약사암이 500m 거리에 있었던 불국토의 땅이었던 셈이다.
이곳 아래편으로는 설봉서원이 복원되었다. 서희(徐熙)·이관의(李寬義)·김안국(金安國)선생을 모셨고 추가로 최숙정(崔淑精)선생을 모셔 현재는 사현(四賢)을 모시고 있다 한다. 교육프로그램을 보니 현대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하산길에는 시립 월전 장우성화백 미술관이 자리하고 이천 출신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한 현충탑도 세워져 있다. 설봉공원으로 내려오면 설봉호(雪峰湖)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그 앞 도자기센터 우측에 옥신(屋身)부는 없어지고 옥개석(屋蓋石)만 남아 불구가 된 5층탑이 길손을 맞는다. 관고동 오층석탑(향토유적 5호)이라고 이름 붙은 고려초 장대한 탑이다. 탑이 서 있는 자리와 그 뒤 일대가 절터였다 한다(관고동 398). 이름도 이 절과 인연 맺었던 이들도 모두 잊혀졌다.
이제 설봉고원 남쪽에 새로 자리잡은 이천시립박물관으로 간다. 그 곳에는 양정여중고에서 옮겨온 3층 석탑을 비롯한 2기의 석탑이 더 있고 설봉산성 출토품과 안흥사지 출토품도 있으니 다녀오시기를.
이제 오늘의 마지막 절터로 향한다. 설봉공원을 벗어나 3번 국도 서울방향 좌회전 300m 전방에 GS칼텍스 주유소가 있다. 주유소 뒤편에는 해심사란 법왕종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관고동 170). 이 사찰 법당 뒤 언덕에 관고동 석조여래입상(향토유적6호)이 서 계신다. 고려 중기에 제작된 도식적 모습이 강한 불상인데 상호(相好)는 편안하시다. 주유소 뒤쪽 경작지가 옛절터이다. 이름은 잊혀지고 석불만 남았다.
오늘 즐거운 답사길 두 손 모아 석불께 감사드리고 설봉공원 방향으로 다시 내려온다. 코너에 아까 보아 두었던 초밥집이 있었다. 이래(利來)라는 간판이 붙어 있으니 ‘이천에 오세요!’란 말씀이렸다. 고생시킨 내 몸을 위해 초밥에 맥주 한 잔 해야겠다.
교통편 - 동서울/고속터미날~ 이천터미날~ 이천시내버스~ 양정여중고(이천시내버스 :24-1, 24-2, 24-7, 114, 이천시내공영버스) ■ 귀경편: 이천터미날에서 / 미리 시간표 파악
걷기코스 - 양정여중고 ~ 향교앞(봉호탑) 능선길 ~ 다산고 ~ 기치미고개(육교 건너) ~ 장화사 ~ 설봉산성 ~ 설봉산 ~ 영월암 ~ 3형제 바위 ~ 추정 망월암지 ~ 추정 약사암지(산림욕장) ~ 설봉서원~ 관고동 오층석탑(절터) ~ 관고동 석조여래입상(해심사)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박현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