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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잊혀진 이름의 땅 미원장

삼재(三災)도 침입 못한 천혜의 오지…고려 왕사 태고 보우 소설암에 머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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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87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4.07.17 08:51:09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가평(加平)땅 설악면(雪岳面)이라 하면 그 곳이 어디인지 아는 이가 드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北)으로 청평호수가 가로막고 남(南)으로 용문산이 버티면서 양 날개를 펼치며, 서(西)로는 마유산(유명산), 소구니산, 중미산, 통방산, 화야산이 감싸고, 동(東)으로는 폭산, 봉미산, 보리산, 장락산이 에워싸고 있는 숨겨진 땅이었다.

그러기에 외지인들이 설악을 가려면 산 넘거나 물 건너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다. 여행을 즐기는 전문가나 오지(奧地) 산꾼이 아니라면 좀처럼 찾아가는 이가 드문 땅이었다. 그러던 설악이 춘천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인터체인지가 생기자 갑자기 서울 동쪽 30여 분 거리에 있는 천혜의 친환경 지역으로 떠올랐다.

오늘은 설악에서도 가장 깊은 마을 설곡리를 찾아간다. 그 곳에는 잊혀진 옛절터가 있다. 간 김에 절터를 품고 있는 이 마을의 어머니산, 봉미산(鳳尾山)을 오르리라. 오지인데다가 856m나 되는 만만치 않은 산을 오르려니 마음 준비부터 단단히 하고 출발이다.

다행이 설악을 거쳐 가평으로 가는 빠른 버스노선이 생겼다. 잠실역 5번 출구를 나와 150m 전방에 7000번 버스정류장이 있다. 아침 7:10부터 대략 40분 간격으로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에 오르니 춘천고속도로를 달려 35분 만에 설악에 도착한다. 문제는 설악터미날에서 목표지점 설곡리(묵안리 행)로 가는 버스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군내버스는 청평에서 출발하여 이곳 설악을 거쳐 설곡리로 간다. 청평 출발시간이 12:40분, 15:25분, 17:10분, 19:45분이며 아침 일찍 06:00에는 설악터미날에서 출발하는 버스도 있다.

청평에서 설악까지는 20~25분이 소요되니 위 시간표에다 20분 더해 설악 출발시간으로 여겨 잠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간이 맞지 않으면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하차지점(설곡리 중촌마을)까지는 1만3000원이 나오는 거리이다. (설악택시: 031-584-4141)

중촌마을은 설곡리의 중심지이다. 이곳에 있던 미원초교 설악분교도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 버스정류장 앞으로는 말끔한 보건진료소가 자리하고 노인회관도 현대식 건물로 세련되게 자리잡았다. 보건진료소 뒤쪽으로는 산등성이 아래 몇 채의 농가가 보인다. 농가 뒤 산등성이는 밭을 갈아 놓았다. 밭 뒤쪽 능선에는 동래 정씨 무덤 몇 기가 있다. 우측 산기슭에는 조그만 교회도 있다.

▲임도길


고산자 김정호의 청구도(靑邱圖)에도 나오는 소설암(小雪庵)

시멘트로 포장된 마을길을 따라 농가 뒤 밭으로 오른다. 얼른 보아도 범상치 않은 기와편들이 발끝에 밟힌다. 어골문(魚骨紋)과 물결무늬 기와편들이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절터임을 알 수가 있다. 이곳에 있었던 절은 이름이라도 전해지는 것일까?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청구도(靑邱圖)에는 이곳으로 여겨지는 위치에 소설암(小雪庵)이 그려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양근군(楊根郡 현 양평군) 불우(佛宇)조에도 소설암(小雪菴)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미원장 미지산(용문산)에 있다. 보우의 사리탑이 있는데 권근이 비명을 지었다. (在迷原莊 彌智山 有普愚舍利塔 權近撰碑銘)”고 했다.

이 절터가 고려 말 왕사와 국사를 지낸 태고 보우의 소설암이 맞는 것일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상태였다. 설곡리 다른 위치에 소설암 터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2001년 7월 장맛비가 씻고 지나간 밭 아래쪽에서 깨진 비석 한 조각이 밭주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깨진 비석에서 확인된 170여 자의 내용은 놀랍게도 권근의 양촌집(陽村集)에 실려 전해지던 원증국사탑비명(태고 보우)의 내용이었다. 게다가 파편 뒤쪽에 음기(陰記) 140여 자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양촌집에도 전해지지 않던 내용이었다. 그러면 태고 보우대사는 당대 나옹대사와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승려였는데 이 구석진 깡촌에 무엇 때문에 절을 짓고 사리탑까지 이곳에 남긴 것일까?

잠시 보우대사의 일생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는 이곳 소설마을 태생이라 한다. (다른 설에는 산 넘어 옥천면 대원리(옥천 냉면 고장) 태생이라고도 한다) 13세에 양주 회암사로 출가하여 불도를 닦았다. 큰 스님이 된 후 46세 되던 1346년(충숙왕 2년) 원나라에 가서 이듬해 임제종(臨濟宗)의 18대 법손(法孫) 석옥(石屋) 청공화상(淸珙和尙)을 후저우(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으로 찾아가 법(法)을 받았다. 이는 달마대사로부터 전해지던 법통을 이어 19대 법손이 되었다는 의미로 불가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봉미산 정상 856m


1348년(충목왕 4년)에는 고향인 미원장(현 설악)을 들렸다가 선대의 늙은 아전의 권청으로 고향땅에 소설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종신(終身)할 곳으로 삼았다 한다. 그는 이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지냈는데 수시로 나라의 부름을 받았기에 이곳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공민왕은 그를 흠모하여 왕사로 모셨고 대사의 고향이며 머물고 있는 땅 미원장(迷原莊)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그 시절 이곳은 소설산(小雪山) 소설마을 소설암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소설(小雪)과 성곡(城谷)을 합쳐 설곡(雪谷)이 되었다.

보우대사는 세수(世數)82세, 법랍(法臘: 출가 해수)69세에 이곳 소설암에서 열반했다. 대사가 남긴 열반송(涅槃頌)이다.

人生命若水泡空 사람 목숨 물거품처럼 빈 것인 것을
八十餘年春夢中 80여 년을 봄꿈 속에 살았다네
臨終如今放皮帒 이제 임종에 가죽부대(몸뚱이) 버리나니
一輪紅日下西峰 덩그러니 붉은 해 서산으로 지는구나


역시나 깨달음이 깊은 분의 말씀은 간단하고 명료하구나. 우리도 언젠가 봄꿈처럼 살다가 갈 것이고 역시나 해는 또 저물 것이다. 그게 사는 일이란 말씀을 이 빈 절터에 와서 다시 새겨 본다.

대사가 세상을 떠나자 당대 거유(巨儒)들이 비명(碑銘)을 썼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쓴 비명은 북한산 태고사에 남아 보물 611호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한 척불(斥佛) 주의자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쓴 비명은 양평 사나사에 있다. 또 하나 양촌 권근의 비명은 사라졌다가 소설암 터에서 깨진 파편으로 발견된 것이다.

▲살만한 땅 설곡리


대사는 도력(道力)이 깊으셨는지 다비(茶毘:화장)를 하자 사리(舍利)가 100과(顆)가 나왔다 한다. 이 사리들은 나누어 부도(浮屠:사리탑)에 봉안하였다. 북한산 태고사, 양평 사나사, 가은 양산사(봉암사), 청송사, 그리고 미원장 소설암이다. 소설암에는 부도(사리탑, 승탑)가 보이지 않았는데 연전(年前) 골짜기 수풀 속에 거꾸러져 있는 작은 석종형(石鐘型) 부도를 찾아 절터 옆 기슭에 세워 놓았다. 밭이 된 절터의 동쪽 기슭이다. 작고 마모되어 초라한 부도인데 사나사의 부도와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너무나 초라해서 격에 맞지 않지만 보우대사의 부도가 맞을 것 같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미원장에 태고 보우의 소설암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미수 허목은 미수기언에서 소설암을 기록에 남겼다. “미지산(彌智山: 일명 용문산)은 서울에서 동쪽으로 150리 지점에 있다. 미지산 정상에 가섭암(伽葉庵)이 있고, 가섭암 북쪽에 미원암(迷源庵)과 소설암(小雪庵)이 있다.


깨진 비석서 확인된 원증국사탑비명, 태고 보우의 일생

추사의 완당전집에도 송양근수(送楊根守: 양근 군수를 보내며)란 제목의 시가 있는데 소설암을 이야기 하고 있다.

“미원현은 본래 미원장인데(迷原縣本迷原莊)
소설암 주변에는 옛 탑이 빛나누나(小雪庵邊古塔光)”

여기에 등장하는 탑은 어디로 간 것일까?

다산(茶山)도 빠지지 않았다. 그 시문집에, “미원의 옛 고을은 소설산(小雪山) 밑에 있는데, 고려 공민왕 때 왕사(王師) 보우화상(普愚和尙)이 소설암(小雪菴)에 거처함으로써 드디어 현(縣)을 설치하여 높여 주었다.”

이제 소설암 터를 뒤로 하고 봉미산(옛 소설산)으로 향한다. 마을 버스길을 따라가 임도를 통해 오르려 한다. 길은 한가롭다. 외지로 연결된 길이 아니라 미원천을 끼고 묵안리 마을 끝으로 가는 길이다. 길 옆 우뚝한 바위절벽에는 한봉 벌통도 있고 옻샘이라 쓴 나무판 아래 바위틈에는 샘물이 가득 고여 있다.

예전에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영험한 샘이었다 한다. 샘물은 옻오름뿐 아니라, 풍이나 다른 피부병에도 효력이 있다는 소문으로 많은 환자가 찾아왔다 한다. 중병 환자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자, 중촌마을은 병자마을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되고 이를 걱정한 몇몇 사람이 샘물을 부정타게 했다는 것이다.

▲소설암지


그 이후로 뜨거운 물은 차가운 물로 변했다 한다. 그러나 아직도 샘은 옻에 효력이 있다 하니 혹시 옻오른 이 있거든 치성으로 씻어 볼 일이다. 관리가 안되어 잊혀진 옻샘이 왠지 안쓰럽게 보인다. 옛사람들이 믿음을 가졌던 것들은 다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리라.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는 나지막한 고개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소설부락이라는 정류장 이름이 쓰여 있다. 둘러보면 주변 풍광은 산 사이에 개울이 흐르는 포근한 마을이다.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사람 살만한 땅(可居地)을 찾는 복거론(卜居論)이 있다. 가거지(可居地)를 정하는 출발점은 바로 주거환경을 꼽았으니 지금 읽어도 멋진 생각이다.


영험한 쾌유로 소문난 옻샘, 전국의 중병환자 몰려

“近處 無山水可賞處 則無以陶瀉性情(근처에 즐길 만한 山水가 없으면 性情을 기를 수가 없다)”라 했다. 사람은 자연의 기운을 타고 난 존재로 보았기에 자연환경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살핀 것이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였던 것이다.

이곳 미원장 소설(小雪) 땅은 어떤 곳이었을까? 태종실록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태종 16년(1416년)에 미원땅에 국가 잠실(蠶室)을 세웠다는 것이다.

“정해년에 조종과 미원에 잠실을 설치하여 각각 잠모(蠶母) 10명, 종비(從婢) 10명, 노자(奴子) 20명씩을 소속시켰다. (丁亥新置 朝宗 迷原蠶室 各屬蠶母十名 從婢十名 奴子二十名)” 이는 서울 송파구 잠실이나 강남구 잠원보다 이전의 일이니 조선 최초의 국립잠실은 미원과 조종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그만큼 자연환경이 좋았다는 뜻이다.

또한 고봉 기대승의 고봉집에는 김굉필의 행장(行狀)을 기록한 ‘김선생 행장’이 있는데 그 기록도 흥미롭다.

“양근군(楊根郡)에 미원(迷原)이라는 좋은 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보고 수석(水石)의 아름다움을 즐기어 집을 짓고 평생을 마칠 뜻이 있었으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聞楊根郡有迷.卜居往訪之. 樂其泉石之美. 有築室終老之志. 竟不果)” 영남 유학자 김종직 문하의 김굉필도 미원 땅을 살 만한 곳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옷샘


왜 오지 미원(迷原)땅을 높이들 쳤던 것일까? 이덕무의 후손이며 실학자였던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그 힌트가 있다.

“양근땅에는 읍치에서 북쪽 40리에 소설촌이 있는데 미원에서 산골짝 깊이 들어간 곳이다. 푸근하고 널찍하며 평온한 땅이다. 임진란 병자호란에도 편안하였고 은거할 만하다. (楊根有小雪村在治北四十里. 入自迷原。最爲深峽。而寬廣平. 壬、丙之亂 此獨晏然可隱)

이런 생각은 이규경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는 비결서(秘訣書) 정감록(鄭鑑錄)을 모방한 비결서들이 많이 나왔는데 정감록처럼 삼재가 침입하지 못하는 좋은 땅 10곳을 선정하여 십승지(十勝地)라 했다.

두사총비결(杜師聰秘訣) 같은 비서에서는 이곳 소설촌(小雪村)을 피장처(避藏處)로 기록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임진란이 터지자 유학자 노경임(盧景任)은 노모를 모시고 소설암에 은거했다고 문집 경암집에 기록하고 있다. 나이 들어 마음 편히 살 곳 찾는 이라면 한 번 들려 볼 땅이다.

이제 버스 종점 성곡을 지나면 설곡교를 건너게 된다. 직진하면 다일공동체로 이정표에는 1.5km를 알리고 있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여기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여긴다. (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는 사기(史記)의 말씀처럼, 우리 시대 이 땅에서 진실되게 배고픈 이들과 밥을 나눈 밥퍼 목사께서 운영하는 영성의 공간인 듯하다. 종교에 가림을 두지 않는다 하니 기회 되면 탁한 정신을 씻으러 기웃거려 보아야겠다.

설곡교 건너 길 따라 오르면 계곡 옆 솔고은팬션을 지나고 비포장길 들어서면서 길옆집 지나면 우측에 작은 다리를 만난다. 직진하면 개인 소유의 비취농원이다. 다리 건너 넓은 공터가 산행기점 주차장이다. 등산지도가 그려져 있다. 1코스(정상 3시간)와 2코스(정상 2시간)가 그려져 있는데 1코스를 택한다. 1코스는 임도 따라 가는 편한 길이며 2코스는 산비탈을 치고 오르는 가파른 길이다. 여름철에는 2코스에 풀이 우거져 오르기에 불편하다.

▲굴참나무 군락


조선 최초 국가 잠실(蠶室)…송파 잠실·강남 잠원보다 앞서

이제 본격적으로 임도 따라 오르는 1코스 등산의 시작이다. 사방땜 안내판을 지나 우측으로 비스듬히 굽어가는 임도길로 오른다. 오래전에 세운 임도시설공사 안내판도 서 있고 등산안내판(봉미산-4)에는 봉미산 정상 3.2km, 비취농원(산행기점) 2.4km를 알리고 있다. 이곳에서 주위 깊게 살피면 좌측 숲길로 들어서는 샛길이 보인다. 이 길로 들어서면 안쪽에 계곡을 만난다.

비박을 즐기는 이들이 사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혹시 봉미산 정상 산행길이 버거운 이들은 이 곳에서 삼림욕을 즐기다가 원점 회귀하는 것도 훌륭한 하루 일정이 된다. 침엽수림 우거진 숲은 산소탱크와 같은 것이니까.

설악으로 나가는 버스 시간은 09:50분, 13:50분, 17:40분, 19:50이다.

얼마 후 세 갈래 길을 만나는데 그 곳에는 봉미산-5 안내판이 서 있다. 어찌된 일인지 여전히 봉미산 정상이 3.2km라고 쓰여 있다. 좌측길 봉미산 방향으로 오른다. 대략 1.1km 뒤, 설곡과 산음을 가르는 고갯마루 성현(成峴)에 닿는다. 대동여지도에는 이 고개 이름이 성공현(成公峴)이다. 성(成)씨 성을 가진 어느 분의 이야기가 있을 법한 이름이다. 내용을 아는 이는 모두 이 땅을 떠났는지 기록도 아는 이도 없다.

성현에서 바라보는 봉미산은 가파르다. 안내판에 정상 2.1km, 하산길은 계곡길로 산음휴양림까지 1.8km라고 적혀 있다. 가파르게 오른다. 참나무군락이 펼쳐지는데 굴참나무도 많다. 예전 굴피 집 짓던 나무이다. 싸리도 군락을 지어 꽃을 피웠다. 아마도 조록싸리인 듯하다. 땀 한 바탕 내고 봉우리에 오르니 안내판 봉미산-8이 서 있다. 정상까지는 800m 남았다. 이제부터는 거의 평지길 능선이다. 잠시 후 우측으로 넓은 저습지가 나타난다. 수백 평은 족히 넘을 듯하다. 내려가 보니 물이 바짝 말랐다. 비가 오면 물이 차 연못을 이루기에 봉미산을 아랫마을 사람들은 늪산이라고도 불렀다.

이윽고 정상에 도착. 정상석이 서 있는데 856m라 쓰여 있다. 안내판에는 설곡리 4.1km, 산음휴양림 3.9km를 알리고 있다. 봉미산 설명판에 봉미산이란 이름의 내력도 적어 놓았다. 앞산 용문산은 일명 봉황산인데 그 뒤 꼬리 위치에 있어서 ‘봉미산(鳳尾山)’이라 했단다.

눈앞으로는 장대한 산줄기가 펼쳐진다. 앞쪽 폭산 너머에 용문산이 용처럼 틀어 앉았고 좌로는 중원산, 우로는 마유산(유명산), 중미산, 통방산이 어깨를 걸쳤다. 이제 산음휴양림으로 하산이다. 다시 성현으로 내려와 계곡길로 하산. 오랜 가뭄에 계곡이 많이 줄었다. 산음휴양림에 도착한다.

지리산 뒤 산청의 옛 이름은 산음(山陰)이었다. 지리산 뒤 고장이기 때문이다. 이곳 산음(山陰)도 용문산 뒤 마을이라 산음이 되었다.

휴양림에서 1km 내려오면 단월, 용문, 양평으로 나오는 버스 정류장(고복)이 있다. 버스시간은 07:18분, 13:09분, 17:39분, 19:33분이다.


교통편 - 잠실 5번 출구 150m 전방 7000번 버스 ~ 설악 하차 ~ 32-11,  32-20, 32-23  버스 묵안리 행 ~ 중촌 하차.

귀가
 (원점회귀: 설악리 성곡마을) 09:50분, 13:50분, 17:40분, 19:50분 버스
(산음):(고복에서) 07:18분, 13:09분, 17:39분, 19:33분 버스 

걷기 코스 - 중촌마을 ~ 옻샘 ~ 성곡마을 ~ 임도 ~ 성현~ 늪산 ~ 봉미산 정상  ~ 성현 ~ 산음휴양림 ~ 고복 버스정류장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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