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초월한 과일과 채소, 생동하는 정물은 가상의 실재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정물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채소와 과일이 무말랭이처럼 바싹 말라 가기 때문에 물체의 생동감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그렇기에 생동감을 포기하고 형태만을 재현하는 데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런 전통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수천만 개의 화소(畵素)로 구성된 디지털 카메라로 대상을 실재와 똑같이, 아니 우리가 눈으로 볼 때처럼 생생이 포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화가들은 그런 사진을 참고하면서 정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 결과 ‘생동하는 정물’을 보여주게 되었다는 점은 확실히 종전과 구별되는 부분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햇과일을 주된 모티브로 삼는 최정혁의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최정혁의 과일 그림을 보고 있자면 실재와 혼동을 일으킨다. 오히려 과수원에서 보는 것보다 더 실감나고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사과의 탐스런 색깔과 탱탱한 감촉, 그리고 이슬을 머금은 모습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잡아내고 있다. 사과의 완벽한 재현으로 탄성이 절로 나올 지경인데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과일들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적인 생동감까지 잡아내려는 그의 끈질긴 열정을 엿볼 수 있다.
▲Natural-Topia, 80X130cm, oil on canvas, 2014
그런데 그의 그림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사과에 흰 눈이 수북이 쌓여있거나 봄철에나 볼 수 있음직한 연둣빛 이파리를 목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과가 열리는 계절은 가을이건만 그의 화면에는 겨울과 봄의 풍경이 각각 담겨있어 보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꽃핀’ 사과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사과 꽃이 봄철에 피는 것을 탱탱하게 영근 사과와 함께 나타내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그림일 뿐 실제와는 괴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있을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셈이다.
▲Natural -Topia, 130x80cm, oil on canvas, 2013
작가는 이것을 ‘가상의 실재(實在)’로 부르는데 사과를 충실하게 옮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픽션의 세계에 속한다. 모든 사물들은 그의 머리와 손끝에서 재구성된다. 감쪽같은 사과의 이미지는 마젠타 칼라의 ‘미묘한 버무림’으로 재탄생되며 잎맥의 숨결까지도 포착되는 이파리들도 사실상 과장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예술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운 눈속임이며 이것을 지렛대로 삼아 우리의 상상의 나래를 무한대로 껑충 높여준다.
이런 재구성은 이미지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과나무에는 여러 개의 사과와 이파리가 달려 있는데 어떤 부분은 선명하고 어떤 부분은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사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사실은 마치 우리가 한 곳에 관심을 기울이면 그곳에 시선이 머물듯이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보고 싶은 동선대로” 사물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단순히 객관의 전이라기보다 대상에 작가의 시각과 개성을 접목한 성질을 띠고 있다.
▲Natural-Topia, 97x162cm, oil on canvas, 2012
그가 이런 작업을 시작한 것은 디지털문화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많은 도시인들은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받아들인다. 정보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색깔도 인터넷을 통해 받아들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컴퓨터를 통해 인식하는 이미지는 자연적인 이미지와는 다르다. 다시 말해 사과를 바라볼 때 컴퓨터에 나타난 이미지는 매우 인위적이고 기계적이다. 그러나 실제의 사과는 원색적이지도 인공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컴퓨터가 제공하는 디지털 이미지로 자연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Natural-topia, 100x200cm, oil on canvas, 2013
자연적인 요소를 인위적으로 바꿔
이점은 최정혁의 체리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의 체리는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준다. 마치 컴퓨터 모니터로 본 이미지와 흡사하다.
‘내추럴 토피아’란 타이틀은 자연적인 요소를 인위적으로 바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순수한 자연에 대해서는 낯설어하면서도 디지털 이미지에는 친숙한 아이러닉한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Natural-topia, 100x200cm, oil on canvas, 2014
인간은 꿈을 동경하고 그 꿈이 실현되기를 꿈꾸는 존재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도달하지 못한 세계에 애착을 느낀다. 최정혁이 도전하는 세계도 이와 비슷하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실물같이 보이지만 그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작가는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가 이런 자연 이미지를 고수하는 것은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자연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리라. 실제보다 더 생동감 나는 표현을 통해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마음 설레는 기억을 되살려 준다. 도심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을 보는 방식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연에 속해 있고 싱그러운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있다. 자연을 체험할 기회가 아쉽게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는 그 영향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만약 작가가 자연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면, 가슴 설레는 장면을 캔버스의 강물에 띄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내추럴 토피아’를 통해 아른거리는 뒷동산과 빨간 사과가 익어가는 시골풍경의 기억을 되살릴 뿐만 아니라 고된 타관살이를 끝내고 고향땅을 밟은 듯 한 묘한 안도감마저 안겨준다.
그의 ‘인공적 자연’이란 종이배를 타고 떠내려 온 과일들과 마주하며 자연의 진미를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 글·서성록 미술평론가 (정리 = 왕진오 기자)
서성록 미술평론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