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석조 외길 장인, 7년 만에 가나아트센터서 개인전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그는 조각 이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음악도, 영화도, 소설도, 잘 모른다. 그러니 조각가 이외의 사람들과는 만나면 대화거리가 별로 없다. 하지만 조각 이야기라면 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조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작업장은 외국 작가들이 심포지엄 등의 행사로 한국을 방문하면 들르는 답사코스다. 외국인들이 그의 작업장을 보고 나면 깜짝 놀란다고 한다. 세계 어느 유명 작가도 그만한 작업장을 가지고 있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진섭이 선택한 것은 세상의 그 많은 것들 중에서 단 하나, 바로 조각. 겉모습은 평범한 이 작가, 알고 보면 괴상하다.
한진섭(58)이 작업장에 열심히 가는 이유는 그곳에 가면 즐겁기 때문이다. 작업장은 그에게 천국의 놀이터다. 조각은 날마다 호기심이 샘솟는 장난감이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조각이라는 장난감 만들기다.
▲행복하여라, 472×400×110cm, 화강석, 시멘트, 2014
7년 만에 8월 22일부터 9월 17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여는 이번 개인전에서는 특별히 전시를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동안 만들어온 작품들이다. 주제는 크게 인체와 동물로 나눌 수 있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숫자가 새로운 주제로 떠올랐다. 날마다 작업장에 가서 돌을 깨는 이 작가, 도대체 뭘 하며 노는지 궁금하다.
이번 개인전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붙이는 석조’의 등장이다. 외관상으로는 작품의 표면을 돌 조각들을 붙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모자이크 기법과 유사해 보인다. 모자이크는 기원전 로마시대에 등장하여 건물의 바닥이나 벽장식으로 각광받았고, 중세 내내 가장 중요한 회화기법이었다.
▲꿈을 찾아서, 300×230×115cm, 대리석, 테라코타, 2014
한진섭의 ‘붙이는 석조’는 그러나 회화적 장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석조 기법의 하나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원시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석조란 원석을 깨서 만드는 것이었다. 한진섭의 ‘붙이는 석조’는 특수재질로 모형을 만든 후 표면에 돌을 깨서 만든 조각들을 붙이고 그 사이를 메지로 메꾸는 방식이다.(중략)
미술에서 혁신이란 전혀 새로운 것의 발견이 아니라 기존의 것에 하나를 보태거나 새롭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혁신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붙이는 석조’ 역시 기법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석조에 적용한 것은 혁신적이다.
‘깨는’ 석조에서 ‘붙이는’ 석조로
동물은 한진섭의 주요 관심사다. 지금까지 만든 동물들을 보면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말, 닭, 개, 돼지 등이 있다. 바로 12지상이다. 왜 이런 동물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으니 쥐띠 해에는 쥐를 만들고, 소띠 해에는 소를, 호랑이띠 해에는 호랑이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 해의 동물을 만들었다고 했다. 해가 바뀌다 보니 다양한 종류의 동물 조각들이 자연스럽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가득한 사랑, 285×95×160cm, 테라코타, 백시멘트, 2014
그러니 그의 동물조각은 세월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작가들 중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가는 과정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조형요소 외에도 시간을 하나의 중요한 창작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중략)
40년 넘게 석조를 해온 한진섭 역시 언제부터인가 대리석을 공중에 띄워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비행기 타는 생쥐의 경우 대리석이라는 재료 자체의 무게도 있지만, 돌덩어리를 허공에 매달 수는 없으니, 땅에서 지지대로 떠받쳐야 하는데 좌대이기도 한 지지대가 둔탁하면 공중에 떠 있는 효과가 줄어든다.
이 작품의 좌대가 가늘고 긴 이유다. 좌대 속은 작품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구멍을 뚫고 철근을 박아 힘을 보강했다. 아름다운 인체 속에 뼈가 숨어 있듯이 그의 날아가는 비행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철근들이 버티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진섭은 공중을 날고 있는 많은 화강석 조각들을 만들어서 야외에 설치한 바 있다.(중략)
▲하나되어, 145×60×210cm, 화강석, 시멘트, 2014
미술의 역사는 깊고, 영역은 무한하니 조각의 장르도 이제 선택을 요구한다. 한진섭은 전통적인 석조에서 출발하여 45년간 외길을 걸어 왔다. 그가 선택한 작업 방식은 수천 년 전에도 존재했던 망치와 정을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전통적인 방식이다.
한진섭은 작품을 직접 만든다. 명작은 작가의 손끝에서 나오며, 작품의 진가는 디테일이 좌우한다. 역사적인 거장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의 작품을 보더라도 작가가 직접 그린 작품과 제자들의 손을 빌린 작품은 천지 차이가 있다.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변수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작가가 직접 제작할 때 비로소 걸작이 탄생한다. 한진섭은 작가이기 이전에 가장 깐깐한 장인(匠人)이다.
▲봄나들이, 180×113×255cm, 대리석, 시멘트, 2014
한진섭은 작품에 기교가 드러나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는 석조의 베테랑이자 성실함이라는 DNA를 뼛속까지 타고 난 사람이다. 이것은 때로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온다. 그의 작품은 종종 너무나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것이다. 거칠어 보이는 작품이 있다면 아마도 작가의 의도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이 한진섭의 장점이자 한계라고 생각한다.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에서 진정한 작품의 의미와 절대적 가치를 찾아냈듯이, 다듬어진 거침이 아니라 진정으로 놓아 버릴 때 또 다른 차원의 작품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
- 글·고종희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미술사가) (정리 = 왕진오 기자)
글·고종희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미술사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