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가 24시]한때는 저항의 상징, 지금 모노크롬 열풍
소격동 국제갤러리서 10월 19일까지 한국 단색화의 진면목 선보여
▲국제갤러리 단색화의 예술전 전시 전경. 사진 =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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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왕진오 기자) 윤형근(1928~2007), 이우환(78), 박서보(81), 하종현(79), 정상화(82) 등 197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크게 유행했던 단색화(모노크롬ㆍ한 가지 색이나 같은 계통의 색조를 사용해 그린 그림) 열풍이 거세다. 단색화가 국내외에서 재조명돼 화랑가는 작가들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다.
모노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우환의 ‘선으로부터’가 홍콩경매에서 19억에 낙찰되면서 해외 미술품 거래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했다. 아트바젤 같은 메이저급 아트페어에서 미국, 프랑스, 독일 화랑이 이 작가의 작품으로 특별 전시 공간 마련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 화백은 “잊혀진 단색화가 이제야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 화백은 한국 단색화의 특징에 대해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면서 “서양과는 달리 우리가 쓰는 흰색은 하나의 흰색처럼 보이는 그림 안에도 보이지 않는 다양한 색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물질을 정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내는 한국적 단색화에 물질 문명에 찌든 현대인들이 갈채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의 단색화는 국전으로 대표되는 아카데믹한 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비롯됐다. 1970년대의 단색화 혹은 백색파 회화는 당시만하더라도 현대미술과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통했다.
19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운동의 주역이었던 단색화 작가들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A.G’와 ‘S.T’로 이어지는 오브제, 설치, 해프닝, 이벤트 등의 실험적 내지는 전위적인 운동에서 빗겨나 있다가 70년대 초반에 이르러 다시 현대미술의 주요한 구심점을 형성했다.
70년대의 단색화가 지닌 회화에 대한 부정의 정신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볼 때 평면성이란 서구적 개념에 한국의 정신성을 접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단색화 작가들의 서구 모더니티의 수용과 절충은 국제적 보편주의를 향한 행진의 서곡이었다. 이른바 회화에 있어서의 현대성이 획득이 이루어지면서 지역적인 한계로부터 벗어나 국제적인 열린 지평으로 나아가게 됐다.
한국 단색화의 흐름을 한 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자리가 9월 1일부터 10월 19일까지 ‘단색화의 예술’이란 타이틀로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전관에서 마련된다.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 받고 있는 단색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거장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단색화를 재조명하는 자리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0년대 단색화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등 일곱 작가들의 작품 40여점이 선보인다. 1970∼80년대에 제작된 초기 단색화를 중심으로 한국 단색화 초기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우환 화백은 “1970년대는 군정이 틀을 잡아 꽁꽁 얼어붙고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제한된 시대상황이었다”며 “표현을 하는 예술가들로선 뜻도 없고 이미지도 없는 작업을 했는데 이는 바로 저항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단색화”라며 “1980년대 민중미술 쪽에서 단색화가들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단색화는 저항이었음을 강조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왼쪽부터)이우환, 박서보, 하종현 작가. 사진 = 왕진오 기자
이우환 ‘선으로부터’ 홍콩경매서 19억
박서보 화백은 “‘저것도 그림이냐’는 소리를 들으며 많은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면서 “겉으론 단순해 보이지만 수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비워냄으로써만 가능한 작업”이라고 밝혔다.
특히 한국 단색화의 요체로 손꼽히는 정신성, 촉각성, 행위성이 일곱 작가의 작품 속에 고르게 스며 있고, 이들이 하나의 장 안에서 서로 겹치거나 스며드는 가운데 궁극의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우환의 반복되는 선과 점의 행렬, 박서보의 반복되는 선묘, 정상화의 반복되는 물감의 뜯어내기와 메우기, 윤형근의 반복되는 넓은 색역(色域)의 중첩, 정창섭의 반복되는 한지의 겹칩, 하종현의 반복되는 배압(背壓)의 행위, 김기린의 반복되는 물감의 분무(噴霧) 행위 등 ‘반복적 행위’는 이들의 작품 속에 고르게 녹아 있다.
이번 전시 ‘단색화의 예술’은 서구사회를 모델로 성장 제일주의를 구가했던 당대 사회상과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순수한 예술적 혁신을 위해 전위정신으로 충일됐던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해외 미술의 현장 속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단색화 운동의 모습은 물론, 세계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한국 단색화의 가치와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왕진오 기자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