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人을 만나다 - 히만 청 작가]전시의 상식 깨는 ‘절대, 지루할 틈 없는 전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히만 청 작가. 사진 = 김금영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나의 이 공허함은 채워질 수 없어.” 공간이 (혼잣말을) 말했다. 수많은 물건이 오고 가지만 남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내 안에서 반복적으로 물건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에 따라 규정된다. 만들어지고 뜯겨나가는 전시, 들어왔다가 나가는 작품에 의해 내가 정의된다.(중략)…
중년의 위기를 맞은 한 가상의 전시공간을 의인화한 짧은 소설의 일부다. 미술가이자 이 소설을 쓴 장본인인 히만 청이 소설을 전시장으로 옮겨왔다.
그는 2012년~2014년 로테르담 현대미술 비트드 비드 센터 및 홍콩의 스프링 워크숍과 함께 ‘모더레이션(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컨퍼런스, 세 번의 전시와 레지던시, 단편소설집을 기획했다.
2006년엔 레이프 마그네 탕엔과 함께 더블린의 프로젝트 아츠 센터에서 글쓰기 워크숍을 운영하며 마크 아리엘 월러, 로즈마리 헤더, 데이비드 레인퍼트 등과 함께 공상과학소설 ‘필립’을 공동 저술했다.
그리고 소설에서 시작된 이번 ‘절대, 지루할 틈 없는’전에서 미술과 전시, 전시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전시를 준비하는 것과 소설 집필 과정은 매우 닮아 있다”며 “소설을 읽으며 인식이 변하듯 전시공간도 전시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등 미묘한 연결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히만 청의 ‘절대, 지루할 틈 없는’전 전시장 전경. 전시장에 흩뿌려져 있는 지난 전시의 흔적들이 눈길을 끈다. 사진 = 김금영 기자
“소설은 편하게 집에서도 읽는데, 전시는 굳이 전시공간이라는 하나의 장소에 가서 관람하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궁금했습니다. 또 깨끗하고 정형화된 공간에 일렬로 나란히 전시된 작품 배열 등 전시공간은 천편일률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을 때가 많죠. 전 그 표면을 드러내고 일반적인 인식 속에 만들어진, 틀에 갇힌 전시공간과 전시를 깨고 싶었어요.”
그의 말처럼 이번 전시는 흔히 접하던 깔끔하고 정갈한 전시장 그리고 전시와는 다소 동떨어진 면을 보인다. 전시명과 같이 ‘절대 지루할 틈 없는’ 파격적인 구성과 작품이 눈길을 끈다. 일단 전시장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있다. ‘연기가 (당신 눈에) 들어간다’는 제목의 이 작품은 담뱃재가 들어 있는 양푼 냄비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여기서 담배를 피워도 상관없다.
“전시 오프닝 리셉션에서 손님들이 담배를 피우느라 전시장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전시장과 밖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전시를 흡연장으로 제시했죠. 이 공간에서는 ‘자유롭게 흡연할 수 있다’고 제시된 간단한 지시사항만 따르면 됩니다.”
“전시장은 왜 항상 깨끗해야 해요?
앞선 전시의 자취를 왜 싹 없애야 하죠?”
전시 소개서가 아니라 ‘전시 소설’과 함께 하는 전시
또 주목되는 요소는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흰 파편들과 벽에 남아 있는 못 자국, 낙서 등이다. 일반적으로 한 전시가 끝나고 나면 다음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전시장을 깨끗이 치우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작가는 지난 전시의 흔적 또한 새로운 전시의 연장선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라고 요청했다.
▲히만 청 작 ‘연기가 (당신 눈에) 들어간다’ 작품. 사진 = 김금영 기자
“지금 작품을 보러 걸어 다니는 와중에도 우리는 작품 위를 걷고 있어요. 지난번 전시에서 남은 오브제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데, 이번 전시를 보는 관람객들의 발걸음에 따라 끊임없이 뒤섞이고 자리가 옮겨지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거죠. 전시를 꾸릴 때 항상 끊임없이 새 사물을 추구하는 경우가 주로 많은데, 이렇게 기존 사물에서도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작가의 이 말은 자신이 쓴 소설 중 일부와 맞닿는다. …“아, 나 어젯밤 술집에서 그 작가 또 본 거 있지.” 한 가지 재주밖에 부리지 못하는 조랑말이 말했다. “나한테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던데 저녁 내내 혼자 있더라고.” “아, 그거 정말 기분 구렸겠다.” 공간이 (요란하게) 기침하면서 대꾸했다.(중략)… 그는 전시를 구성하는 과정과 방식을 하나로 규정짓는 걸 지양한다.
이밖에 전시가 이뤄질 때 미관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가, 큐레이터가 숨기기 바쁜 소화기를 전시장 한 가운데 떡하니 배치했다. 전시를 둘러보던 중 이 소화기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소화기가 전시의 일부로 배치돼 있을 것이라는 예상 자체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재미있는 요소들을 전시장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시에 대한 첫인상은 대체로 세 가지 요소에 의해 규정된다. 전시 제목과 작가의 이름, 그리고 전시 개요 텍스트다. 하지만 이번 전시의 작가는 전시 소개 텍스트를 제공하는 대신 500단어 분량의 단편소설을 썼다. 전시 소개 텍스트가 전시의 부속품이 아니며, 전시 텍스트의 공간이 전시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시도다. 전시는 아트선재센터에서 3월 29일까지.
김금영 기자 geum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