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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 - 구광모]슬픔의 자양분을 거침없는 붓질로 캔버스에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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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18-419호 전상용 미술 평론⁄ 2015.02.24 08:56:41

▲구광모 작가.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전상용 미술 평론) 구광모 작가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본인 인생에 깊게 패인 골짜기들을 형성한 사연과 사념들을 체화시킨 작품들이다. 작가의 과잉 감성에 당황한 나는 한편의 강렬한 모노로그 무대 같던 그의 작품 설명이 끝나갈 무렵, 작품 감상의 공치사 대신 돌을 던졌다.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정성껏 열변하던 그의 진정성이 무색하리만큼 나는 매정하게 비판부터 했다.

그는 피하지 않았고 나는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참 기이한 일이었다. 그에게 이끌려 당도한, 도무지 심미적 냉담함이 개입할 조금의 여지도 없는 혼돈의 공간에서 우물쭈물하다 결국 나는 그의 작품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 애써 기피하던 일종의 ‘과잉’에.

▲To 19670303 KEN, 캔버스에 혼합매체, 245x155cm, 2013


구광모는 화가이면서 광고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의 사무실에 들러 그가 디자인하고 빚어낸 수많은 작업 샘플들을 구경했다. 하나같이 단순하고 세련됐다. 그러나 그 언젠가부터 가슴길이 안에서 막힌 그의 귀와, 바깥으로부터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점점 그 전처럼 생기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예술에 대한 열망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해서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인생을 살아가며 맞닥뜨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긴 시간을 상심과 회한으로 점철된 고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어느 날, 그는 페인트 통에 든 안료에 붓을 담가 캔버스에 페인트 붓을 뿌리고 갈기며 자기 주변의 눈에 띄는 빈 공간에 자신의 이야기, 그 뜨겁고 사나운 것들을 무작정 쏟아내기 시작했다.

▲Radiance7, 캔버스에 혼합매체, 240x120cm, 2014


압축과 정제를 거치지 않고 그냥 담겨 있던 거칠음 그대로 그렸다. 한 번 솟구친 혼잣말들과 비탄은 그 비장한 정서를 타고 황야를 쓸어버릴 바람처럼 거침없이 몰아지경 상태로 달려갔다.

그는 슬픈 사람이다. 슬픔의 무간도에서는 자기학대와 자기연민이 무한 반복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들, 즉 그의 작품들은 자신의 내면에 적체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슬픔이 토해 낸 결과들이다. 상실과 단절, 그것은 연쇄적으로 외로움을 낳는다.

▲Beyond7, 캔버스에 혼합매체, 130x162cm, 2014


우리는 슬픔의 발현으로 인해 우리네 삶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지속적이며 근본적인 국면을 마주한다. 외롭고 슬픈 감정으로 단절되는 건 역설적이게도 자아와 외부세계가 단절이 아닌 한 몸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할 수 있게 해주는 운명적인 모태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 또한 바라보다보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점차 자신의 생채기를 폭로하는 초기의 자기 연민의 울타리를 극복해가는 걸 느낄 수 있다.

자신만이 느낀 슬픔에서 슬픔을 들을 줄 아는 작가로 변모.
빛의 영역에만 안주하지 않고 창작 욕구 풀어내


작가 구광모는 그가 늘 즐겨듣는 음악들도 그의 작품 형성에 일조한다고 고백한다. 그 음악의 힘과 흥망성쇠 하는 자연현상의 이치를 통감하는 한편, 세월호와 같이 사회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집단적 슬픔에의 동참을 통해 한갓 ‘자기의 슬픔’에서 ‘슬픔 그 자체’로 이동한다. 우는 자였던 그가 다른 존재의 울음을 잘 듣는 자가 되는 것이다.

슬픔은 아픔이 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자연스레 내뱉는 탄식, ‘아이고’는 기실애고(哀苦) 즉, 슬픔과 괴로움의 합성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아픔, 고통, 베토벤의 비창을 들으며 간혹 우리는 선율너머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저 이도 나처럼 아팠구나…’ 하고. 시간과 공간을 훌쩍 넘어 간이 아픔, 수난, 고통을 함께 나누고 바로 자비, 동체대비, 연민(Compassion)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다.

▲Beyond5, 캔버스에 혼합매체, 162x130cm, 2014


그렇다. 슬픔은 창작의 자양분이다. 현실에서 모순을 보지 못하는 자, 빛의 영역에만 안주해 그림자를 외면하는 자는 슬픔이 건네는 힘을 얻지 못한다. 구광모 작가는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속살에 더 다가가려 한다. 아이처럼 무모하되 매혹되는 이유 또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구광모 작가는 화단의 통상적 어법과 준칙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그림을 그린다. 그 어떤 것도 살필 필요 없이 오로지 슬픔을 단도직입적으로 상대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자발적 예속(隸屬)을 차마 벗지 못하고 헛되이 갈망만 하는 이들에게 마땅히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하다.

▲Sorrow2, 캔버스에 혼합매체, 97x130cm, 2013


자유로운 그의 그림엔 그 자유로움 속에 회화의 모호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이 풍부하게 담겨있다. 격렬한 열정으로 예술적 에너지를 구축한 남다른 그의 문학적·예술적 소양의 깊이가 작가로서 그를 단련시켜 온 귀결이다.

그런 그를 통해 다시 새긴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아니 우리는 왜 그림을 그리려는가? 응답은 그가 아닌 각자에 달려있다. 그러니 그의 그림을 논하기보다 우선 담담하게 마주해보자.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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