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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사업이사) 작년에 모 신문사 기자가 물었습니다. “변호사 생활하시는 동안 가장 안타까웠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건엔 사연이 있고, 안타깝지 않은 사건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 기억에 남는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도박 빚’ 사건입니다.
도박으로 돈을 잃어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로 한 계약은 민법 제103조에 의하여 무효가 됩니다. 민법 제103조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도박자금을 빌리고 이를 갚기로 한 행위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행위’이므로 무효라고 봅니다.
즉 도박자금을 빌리면서 차용증을 작성한 경우, 도박자금을 빌려준 사람이 소송을 제기해오면 도박 빚을 원인으로 빌린 것이라고 변제할 수 없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도 도박 빚 때문에 의뢰인의 집에 근저당이 설정된 사례였습니다. 상대방은 도박 빚을 받으려고 이 근저당을 실행하기 위해 경매절차에 들어갔고, 의뢰인은 어떻게든 이를 막고 싶었습니다.
도박자금을 빌리면서 자신의 부동산에 근저당권 설정등기를 해준 경우가 있습니다. 도박자금을 빌린 사람은 근저당권 설정등기를 말소해달라고 청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법원도 “도박자금으로 금원을 대여함으로 인하여 발생한 채권을 담보하기 위한 근저당권 설정등기가 경료되었을 뿐인 경우와 같이 수령자가 그 이익을 향수하려면 경매신청을 하는 등 별도의 조치를 취하여야 하는 경우에는, 그 불법원인급여로 인한 이익이 종국적인 것이 아니므로 등기설정자는 무효인 근저당권 설정등기의 말소를 구할 수 있다”고 판시하여, 근저당권 설정등기 말소청구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대법원 1995.8.11. 선고 94다54108 판결).
그런데 문제는 ‘도박자금’으로 돈을 빌린 것인지를 증명해야 하는데, 증거가 별로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도박을 드러내 놓고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도박 빚과 관련된 사건은 관련된 증인의 진술과 돈을 빌릴 때의 정황이 핵심입니다.
차용증에 ‘도박 빚’이라고 적어 놓는 경우는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형법은 ‘도박죄’라는 것을 규정해 놓고 있기 때문에, 증인들이 처벌이 두려워 자신들의 도박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이 사건을 맡았을 때는 이미 1심에서 패소를 한 상태였습니다. 1심에서 드러난 증거들과 증인의 진술은 우리에게 불리한 상태였고, 더구나 2심에서 추가로 필요한 증인들이 우리 쪽에 우호적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저는 의뢰인에게 이런 사정을 충분히 설명 드리고, 패소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패소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다행히 의뢰인도 이에 동의하시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달라는 주문만 하셨습니다.
보통 2심에서는 1심에서 이미 출석했던 증인을 다시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2심에서는 변호사나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소송행위가 1심보다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의뢰인과 함께 몇 달 간 치열하게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패소였습니다.
비록 패소했지만, 의뢰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며 후회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그 이후 본인이 농사지은 쌀을 2년째 보내주고 계십니다.
증인 진술과 정황 등으로 도박자금 증명 필요
도박 빚으로 인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이미 상당부분의 원금이나 이자상환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즉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원금보다 많은 이자를 갚아나가다가 더 이상 못 갚겠다고 포기하면서 분쟁이 일어납니다.
보통 분쟁이 발생하기 전에는 가족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분쟁이 발생한 후에는 가족 간의 관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도박 빚으로 법률분쟁이 생기는 경우들 중 사기도박이 의심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사기도박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일어납니다. 도박을 하는 당사자는 도박장의 분위기에 휘말려서 자신이 당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도박판이 끝나고 자신이 거액의 빚을 졌음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습니다. 더구나 도박판이 사기로 의심이 되더라도 사기를 증명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정리 = 안창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