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가 미래다 - ‘아이패드화가’ 정병길 화백]미술의 틀을 깨다…아이패드 그림이 생활 속으로
언제 어디서든 영감 따라 쉽고 재미있게 미술 세계로
▲‘아이패드 화가’ 정병길 화백. 사진 = 안창현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이진우 기자) 그림 얘기를 하면 십중팔구 “난 그림을 몰라”, 또는 “그림은 너무 비싸”라며 꼬리를 내리기 십상이다.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돈이 없고, 돈있는 사람은 그림에 관심이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래저래 오늘날 한국 그림 시장이 어려운 형편이다.
IMF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그림 시장의 거래가 상당히 활발했다. 하지만 요즘 그림은 난해하고 비싸진 탓에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특수층의 전유물로 전락한 모양새다. 그림을 ‘그들만의 리그’로 몰고가려는 화가들, 또는 화랑들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마당에 ‘아이패드 화가’가 등장했다. 정병길 화백은 “이제 그림을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가는 모색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 속에서 가볍게 즐기면서도 다양한 응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아이패드를 만나고 그림 앱을 소개받은 후에는 지나가던 역에서든, 여행을 가서든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영감에 따라 아이패드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농협에서 30여 년 근무하다 2010년 퇴직한 정 화백은 직장에 다닐 때부터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썼다. 퇴직 후에는 전부터 마음먹었던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2011년 ‘내 아이 이웃과 함께, 더 큰 세상으로’라는 수필집에 이어, 2013년에는 ‘이젠 아빠를 부탁해’란 책을 출판했다. 처음엔 주변에서 상당한 호응을 받았고, 출판사와 협력해 두어 차례 신문에 광고도 해봤지만 비용에 비해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돈이 많이 드는 광고는 더 이상 하기 어려워 시대의 대세인 SNS를 배우고 이를 활용해 직접 홍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중 서울은퇴자협동조합 모임에서 만난 창직(創職) 전문가 정은상 맥아더스쿨 교장을 만나 페이스북 및 유튜브 등을 활용한 제작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코칭 도중에 내가 화가라고 말하자 정 교장은 아이패드의 그림 앱을 소개해 줬다. 코칭을 받으면서 아이패드 그림을 그리고 판화공방에서 출력해 액자에 넣어 활용을 시도해보며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했다.”
▲아이패드 그림 교실에서 강의하는 정병길 화백.
국내 최초로 아이패드 그림 전시회 열어
아이패드 그림 강좌 등 새 분야의 개척을 독려해 준 정 교장은 자신의 SNS 친구를 직접 연계해 주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덕분에 그룹 및 개인 강좌를 통한 그림교실을 운영하게 됐다. 이어 아이패드 그림을 판화로 출력해 선물도 하고 구매주문을 받아 판매도 시작했다.
또한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강강술래 놀봄농원식당 정원에서 1주일 정도 아이패드 그림 전시회를 열었는데, 국내 첫 아이패드 그림 개인전이라고 할 만하다. 이때부터 정 화백에게는 ‘아이패드 화가’라는 수식이 꼬리처럼 따라 붙게 된다.
그림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미술부 활동을 했다. “직장생활 때도 21세기에는 한국 국민소득이 3~4만 달러가 되고, 선진국처럼 문화가 생활화되는 시대가 될 것을 기대하며, 나름대로 글도 쓰고 화실을 찾아다니며 그림 공부도 열심히 했다”는 그는 “전시회에 여러 차례 참여하고 그림 관련 상도 더러 받았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아이패드 그림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늘고 있다. 전문가는 전문가 영역에서 활용이 가능하고, 초보자나 아마추어는 나름의 활용 여지가 있다. 아직은 개척 여지가 많은 미술계의 블루오션이라 할만하다.
“전문 화가가 아닌데도 잘 그리려 들기보다는 나름대로 재미있고 개성 있는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예를 들어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 속의 그림들이 왜 우리 기억 속에 오래 남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그림 실력은 소박해도 개성과 스토리가 있는 그림이라면 우리 기억을 오래 묶어두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아이패드 그림은 기존 미술보다 간편하고 재미있게 그릴 수 있다. 색상도 아름답고 멋있어 예술성이 있다. 또한 실생활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어 앞으로 생활 속의 문화로서 역할을 감당할 것으로 보인다.
유화를 그린다면 그림물감, 캔버스, 이젤 등 값비싼 그림도구를 장만하고, 짐도 커진다. 또한 공항 검색대에서는 유화물감의 인화성 시비 때문에 홍역을 치르기 십상이다. 유화 기름은 아예 비행기에 싣지 못하고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데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정 화백의 아이패드 그림 작품들. 왼쪽부터 ‘성산포 서정’, ‘서해안의 낭만’, ‘환희 마이산’.
반면 아이패드 그림은 아이패드와 터치펜만 가방에 넣고 다니면 가능하다. 시화전의 컷, 책 속 삽화, T셔츠용 디자인, 더 나아가 전시회용 그림까지 활용도도 매우 다양하다. 물론 단점도 있다. 유화처럼 대작을 만들거나 깊은 맛을 내기에는 역부족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유명 사진작가 중에 스마트폰 사진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을 새겨들을만 하다.
아이패드 그림의 또 다른 장점은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유화의 경우엔 숙련도나 작업 과정을 고려해 10호(가로 53cm x 세로 41cm) 기준으로 100만 원 정도는 받아야 수지타산이 맞는다. 또 화가의 인지도에 따라 고가가 형성된다. 반대로 아이패드 그림은 작업과정이나 공정이 간편하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이 가능하다.
“이런 장점 덕에 내 아이패드 그림은 주로 행사 때 시상품이나 대회의 우승상품으로 팔린다. 또 지난 전시회 때는 조카 결혼식 선물용으로 사가는 부부도 있었다. 예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에 나는 아예 ‘예술문화상품’으로 예술에 상품 이미지를 결합해 편하게 접근하려고 시도한다.”
너도 나도 싼 그림을 내놓는다면 가뜩이나 어려운 미술시장이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정 화백은 “미술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우선 그림을 좋아하는 인구가 늘어나야 한다”고 반론을 폈다.
광화문에서 자하문터널을 지나면 부암동에 ‘서울미술관’이라는 규모가 제법 크고 멋진 미술관이 있다. 설립자 안병광 회장은 초년시절 세일즈 외판을 나갔다가 비를 피해 들어간 화랑에서 1만 원짜리 이중섭의 ‘황소’ 그림을 만났다. 유명화가의 작품이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들어 “왜 이리 싸냐?”고 물었더니 “유화가 아닌 사진액자라 그렇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는 이를 깎아 7000원에 샀다. 그 뒤 안 회장은 그림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웬만한 집값보다 더 비싼 진품들을 많이 소장했고 미술관까지 개관했다. 그림에 대한 조그만 사랑이 거대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림 좋아하는 사람 늘어야 미술시장 활성화
정 화백은 그간 농원식당 정원과 지하철역 등 생활공간에서 아이패드 그림 개인전과 그룹전을 몇 차례 가졌다. 앞으로도 일상 생활공간에서 아이패드 그림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지속적으로 높여 나갈 계획이다.
아이패드 그림 강좌도 계속 열어가고 있다. 초보부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까지 참여하다보니 수준차가 커 집중이 되지 않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각 개인에게 맞춤 강좌를 하면서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해 가을에는 전문 화가를 비롯해 아마추어 및 어린이들까지 약 10여 명이 참여한 그룹전을 열어 참여자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직접 그린 그림을 T셔츠에 넣어보고, 도자기에 입혀보는 등 실생활과 연계하는 실험도 이어나가고 있다.
“미술사를 보면 시대의 흐름과 함께 간다. 고대 미술은 자연과 인간 중심이었다가 중세에 이르러 신이나 권력에 예속됐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고전과 인문주의가 부활하면서 미술 역시 거의 완벽한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보니 근세에는 강한 개성들이 드러나면서 시대상황이 반영된 미술사가 펼쳐졌다.”
현대미술은 어떨까? 이 역시 시대상황을 반영한다. 질서 속의 무질서, 자본과 권력에의 예속 현상 등이 나타나고 있다. 수많은 미술 이론들이 펼쳐지지만 수학이나 철학처럼 어려워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경향도 있다.
정 화백은 “미술은 나와 내 가족이 즐기는 문화생활이 되어야 한다. 자기 그림을 액자에 넣어 집에 걸어 놓고 감상하며, 나중에 자녀들이 결혼할 때 선물로 주면 비싼 패물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아이패드 그림을 널리 확산시켜 ‘내 집에 내 그림 한 점 걸기’ 및 ‘생활 속의 즐거운 미술 활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진우 기자 voreol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