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전시 - 서울미술관, 노벨로 피노티 ‘본 조르노’전]조각으로 그려낸 탄생·죽음·환생
▲‘여행가방’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노벨로 피노티. 사진 = 왕진오 기자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왕진오 기자)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문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길이 12미터짜리 조각 ‘해부학적 걸음’이 탄생-죽음-환생으로 돌고 도는 인연의 연속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존재론적 상황에 대한 성찰이다.
바로 옆에는 아이를 품고 허리를 절반으로 접은 여인의 모습이, 등짝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배가 올라와 있는 야릇한 작품을 대조를 이룬다. 몸통에 모래를 뒤덮어 쓰고 손발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마치 거북이가 모래에서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는 것과 같은 ‘환생’ 작품이다.
이들 조각들은 “모든 것은 탄생, 죽음, 그리고 환생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이탈리아 조각가 노벨로 피노티(Novello Finotti, 76)가 2월 28일부터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이사장 서유진)에서 진행하는 ‘노벨로 피노티, 본 조르노’전에 공개된다. 그의 조각 인생 60년을 꿰뚫는 38점이다.
피노티가 삶이란 무거운 주제를 작품에 투영시킨 이유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부친이 참전해 사망하면서부터다. 당시 겪은 전쟁의 비극과 삶의 모습을 대비시켜 사회 속의 각종 잔혹성을 고발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재료에 생명을 불어넣는 조각 작업을 통해 ‘탄생’이라는 물성의 시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탄생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의 대표작 ‘해부학적 걸음’은 윤회 사상을 담고 있다.
잘라진 신체로 세운 폭력-잔인의 탑
‘환생’은 그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모래무덤 놀이를 하는 엄마와 아이라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이 하나가 되어 새로이 환생하는 제3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과 환생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며, 앞으로도 계속 ‘환생’이라는 모티브로 작품을 이어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화단에 등단했다. 젊고 도전적이었던 그는 1965년 작 ‘무제’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쟁의 폐허로 고통 받은 인간의 파편화된 신체 조각들을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기둥 속에 가둠으로써 전쟁의 폭력과 잔인함을 고발했다.
▲‘체르노빌 이후’ 작품을 설명하는 서울미술관 안진우 팀장. 사진 = 왕진오 기자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86∼87년 작 ‘체르노빌 이후’에서는 거꾸로 솟은 채 고통스럽게 형상화된 인간의 몸을 통해 표출된다.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후 우리가 직면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그리움과 외로움을 보낸 피노티에게 가족은 삶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예술적 영감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깊은 가족 사랑을 보여주는 여러 작품을 선보인다.
‘제노의 긴 밤들’은 아들 제노의 꿈을 소재로, 현실에 국한되지 않고 꿈을 펼치길 바라는 부성애를 보여준다. 또한 그의 딸 페데리카를 소재로 한 ‘페데리카의 꿈들을 위한 곳’에서는 딸이 꿈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담았다.
특히,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 대한 신비로움과 기대감, 그리고 넘치는 사랑을 표현한 ‘소식’에서는 첫 손자를 임신한 며느리의 배와 태동하는 손자의 발을 표현했다.
“내 영감의 근원은 고흐와 셰익스피어”
본래 그림을 그렸던 피노티는 인상주의의 거장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을 예술세계로 인도했다며 그에게 보내는 헌사 작품, 그리고 세계적인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애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헌정 작품도 전시한다.
그는 “작품에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셰익스피어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영감의 매개체다. 그 중 사랑을 위해 비극적 죽음을 맞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에게 예술가로서 헌사를 보낸다”고 밝혔다. 영감을 주는 문학과 신화 등 다층적인 주제들을 결합시킨 이탈리아 현대 조형예술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외에도 전시를 위해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여행 온 작가의 상징물인 ‘여행가방’이 공개된다. 이 작품은 60년의 세월이 깃든 작품들을 가져온 피노티의 비어진 가방을 상징하며, 동시에 76세의 피노티가 예술가로서의 긴 여정의 끝에 본인을 되돌아보는 자화상의 의미도 담고 있다.
대리석을 재료로 가장 곡선을 잘 표현한 이 시대의 조각가 피노티는 “내 삶은 예술이 전부다.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표현할 수 있고, 내 자유를 남들에게 선보임으로써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조각의 시대적인 흐름과 전개·확장되는 양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한 한국 현대 조각과 다른 조형언어를 발견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전시는 5월 17일까지.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