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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전형구 전박사의 독서경영연구소 소장) 우리가 예술을 논하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을 할 수 있고, 우리 삶에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을 만나는 인문학자의 강의실’이라는 부제가 있는 ‘예술수업(오종우 저, 어크로스)’은 예술적 상상력을 깨우는 아홉 번의 강의를 통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유했던 천재들의 빛나는 통찰과 남다른 감각을 온전히 읽어내고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도스토옙스키와 체호프의 소설, 피카소와 샤갈의 그림,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타르콥스키의 영화,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과 피아졸라의 탱고가 흘러넘치는 인문학자의 강의실에서, 예술가의 창조적 영감이 폭발했던 순간으로 떠나는 황홀하고 신비스러운 여행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아홉 번의 수업을 통해 그동안 현실에 치이고 일상에 매몰돼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감각과 사고가 깨지고, 내 안의 예술적 상상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눠져 있다. 1부는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주제로 고정 관념과 기성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이 탄생하는 예술적 상상력의 촉발을 도와준다. 2부는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면’을 주제로 연극, 음악, 회화, 영화를 넘나들며 예술 작품 속에서 우리가 알아봐야 할 가치를 찾도록 안내한다. 3부에서는 ‘삶을 창조하는 것’을 주제로 삶을 창조해나갈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찾아본다.
▲ 예술은 늘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세상의 문을 열지만, 그러기 위해서 모든 예술가는 기존에 확립된 규범을 학습하고 수련합니다. 작곡가는 기존 음악의 복잡한 악보를 손쉽게 읽어내면서 자기 음악을 짓기 시작하고, 연주자는 오랜 시간 악기를 타며 훈련합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그러다가 저절로 기존의 것을 넘어서서 창의력을 발휘합니다. 예술이 문화를 형성하는 근본 동력이면서도 문화에 갇히지 않고 문화를 새롭게 일궈내는 핵심이 되는 원리가 이러한 이치에서 나옵니다. [수업에 앞서; 피카소의 ‘춤’과 예술적 상상력] 중에서
▲ 예술을 다루는 학문인 미학을 가리키거나 심미적이라는 뜻의 단어 aesthetics에 부정(否定)의 접두사 an-을 붙이면 마비, 마취(anaesthetic, anaesthesia)라는 뜻이 됩니다. 예술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무감각인 것이죠. 뛰어난 예술 작품은 무엇보다 우리의 감각을 되살려줍니다. 그래서 그런 예술 작품을 접하면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입으로는 좋은 가치를 말하면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보게 되는 이유도 그들이 그 가치를 머리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강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와 만물박사] 중에서
▲ 세상을 창의적으로 해석해서 이해하는 일, 기성의 질서에 단순히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주체로서 살아가는 일, 바로 이것이 예술의 근본 성질입니다. 예술은 늘 그러한 일을 합니다. 예술이 인류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생명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술은 정치 혁명처럼 어떤 거창한 구호를 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소소한 것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술은 그 사소한 것들에 새로운 무늬를 그려나가 전체에 스며들게 하죠. 거창한 구호보다 큰 감동을 주는 작은 울림들로 세상을 움직입니다. [2강 예술은 어떻게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가; ‘톨스토이의 초상’의 비밀] 중에서
▲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뿐인 생명의 유니버설한 가치를 버리고, 흔한 제너럴에 묻혀 근근이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삶인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허영이 열정을 대신하고, 짝퉁이 브랜드라고 속이며 범람하는 세상을 향해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는 차원에서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뜻이고, 진실을 지키며 제대로 된 삶을 산다는 차원에서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뜻입니다. [4강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한 비극; ‘햄릿’의 재해석] 중에서
▲ 시가 잘 읽히지 않는 까닭은 우선, 독자가 시인의 상상력을 좇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지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듯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더 그렇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현실을 시간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적 사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인데, 무엇은 어떻게 되고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따지며 전개됩니다. 이러한 인과적인 사고방식은 논리적일 수는 있지만, 자칫 생각과 이해가 자기 논리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방식이나 시의 의미가 형성되는 방식은 주로 공간적입니다. [5강 꿈과 현실의 이중주; 가구 같은 음악 ‘짐노페디’가 아름다운 이유] 중에서
▲ 미술사는 바로 시선의 변화사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는 것을 미술의 흐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술사는 곧 문화사이기도 합니다. 시선에는 세계관이 담기니까요.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시선을 말합니다.
따라서 미술 작품은 단순히 무엇을 가리키거나 전달하는 텍스트는 아닙니다. 혹시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부수적인 효과일 뿐입니다. 수련이나 사과를 가리키려고 그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것이 예술 작품이니까요. 예술은 무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무엇인 것입니다. [6강 그림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샤갈의 ‘손가락이 일곱 개인 자화상’이 그린 것] 중에서
▲ 우리는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그것이 가리키는 어떤 정보뿐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상태까지 듣습니다. 말하자면 언어가 특정한 뭔가를 대리해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발화(發話) 자체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말은 탄생하는 순간 자신의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교감을 위해 기능합니다.
2차 언어가 관습에 따라 굴절된 세상이 사람의 인식으로 들어오는 언어라면, 원초 언어는 세상을 곧바로 인식하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미지에는 상상력이 포함된 풍부한 해석과 사유가 함유돼 있죠. 이미지는 시각적인 영상이 아니라 그것에서 유발돼 울리는 근원적인 사유인 것입니다. [7강 경험했지만 말하지 못했던 것들; 타르콥스키의 ‘희생’이 남긴 것] 중에서
▲ 우리 현대인은 제대로 생각할 틈조차 없이 바쁘지요. 물질문명의 전광석화 같은 변화에 정신을 잃을 정도입니다. 그 변화를 따라가자니 시대의 조류에 가볍게 자신을 맡겨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듯하니까요. 그런데 그러다가 우리는 어쩌면 괴물이나 좀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괴물이나 좀비가 아니지만, 일상에 젖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그러기 쉬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 주위에서 너무나도 당당한 괴물이나 좀비를 보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런 줄 모르지만요. [9강 여행과 예술의 공통점; 호퍼의 ‘간이휴게소’에 그려진 ‘나’] 중에서
전박사의 핵심 메시지
최근 우리 대학들의 모습을 보면 대기업들이 사학의 주인으로 등장하면서 배움과 진리 추구의 전당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이윤 창출의 공간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대학 교육이 마치 취업 준비를 위한 학원으로 변모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 사회 곳곳에서는 인문학이 대단한 열풍을 몰고 있는 반면, 대학 내에서는 취업 준비에 밀려 인문학은 고사 위기에 있다. 어문 계열 기피, 취업률 저하로 예체능 계열의 폐과 움직임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아직 배움에 대한 열망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만나는 곳이 있으니 바로 이 책의 기반이 된 강의다. 새로운 것, 다른 것을 알아보고 창조해내는 능력이 마치 지식인과 천재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지지만, 저자의 강의를 통해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며, 예술을 대하는 인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가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문학자의 강의실에서 예술가의 창조적 영감을 통해 그동안 현실에 치이고 일상에 매몰돼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감각과 사고를 깨부수며 예술적 상상력을 회복시켜주는 비타민이 되어줄 것이다.
(정리 = 이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