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연 큐레이터 다이어리]시간과 공간 교차하는 ‘사이공간’전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정혜연 스페이스 비엠 디렉터) 서울대학교 조소과 동문들을 주축으로 설립한 작가들의 커뮤니티 ‘현대공간회’의 그룹 기획전 ‘사이공간’을 7월 4∼15일까지 준비하며 갤러리 기획자로서의 과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전시 제목, ‘사이공간’은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Homi Bhabha)가 ‘사이 (in-betweenness)’라고 부른 상태를 참조했다.
호미 바바는 오늘날 ‘문화가 자리한 위치’를 혼종성 과정이 생산되는 사이-내 공간, 제 3공간이라고 지칭했다. 제3의 공간은 기존 문화의 정체성을 깨뜨려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억압되고 보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됐던 것을 보이게 하며, 보이지 않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창조하는 활동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작가들은 이 ‘사이의 공간’에서 경계, 전이 혹은 그 둘 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할 수 있다. 즉, 떠나온 장소와 이주한 장소에 대한 감정적 연결 고리를 유지하면서 이주한 장소의 물리적 환경과 문화적 기후를 이용해 새로운 혼성적 정체성을 서서히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는 “신시대를 증언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새로운 조형언어로써 참신한 공간을 창조한다”는‘현대공간회(Modern Space Club)’의 창립 선언문과 맥락을 함께한다.
▲조태병, ‘리커버15-6’. FRP, 유리 섬유, 120 × 40 × 80 cm, 2015. 사진 = 스페이스 비엠
올해로 48주년을 맞는 이 느슨한 듯하면서도 팽팽한 커뮤니티에는 40여 명의 작가들이 결속돼 있다. 이 중 29명의 작가들이 이번 ‘사이 공간’ 전시에 참여한다. 몇몇은 같은 장소를 공유했고, 또 몇몇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기본적으로 참여 작가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작품들은 형태적, 의미론적 제약에서 자유롭게 제작됐다.
느슨하면서도 팽팽한 커뮤니티
기획자가 제시한 간단한 가이드라인은 다음과 같았다.
△자신의 창작 방법론을 지향, 혹은 변이를 근간으로 한다. △형태적 문제로 제한하지 않는다. △‘사이 공간’은 의미론적 개념이며, 이를 구현하는 매체/크기의 문제에서 자유롭다 △‘사이 공간’전의 모든 작품은 무채색(black and white, 또는 neutral color)으로 한다 △참여 작가들의 작품을 ‘시간의 사이’와 ‘공간의 사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시간의 사이’에는 권석만, 김건주, 김승환, 김진석, 류훈, 박영철, 박찬용, 신년식, 조태병, 안경진, 옥현철, 이동재, 황영애 작가가 참여한다. ‘공간의 사이’에는 김민억, 김용진, 서동화, 신경진, 안병철, 오창근, 유승구, 윤주, 이범준, 이상길, 이성민, 이수정, 이윤석, 이훈, 하도홍, 홍승남 작가가 함께한다.
전시장 안으로 하나 둘씩 들어오는 작품들을 보며 기획 단계에서 참여 작가들의 예전 작업들을 보며 나눈 두 개의 카테고리가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물리적 공간과 비물리적 시간을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에 시간의 개념을 개입시키거나 시간의 개념을 공간으로 풀어내는 식이다. 사실, ‘공간’은 태생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지리적 개념에 뇌의 인지 작용이 더해진 인식(cognition)된 장소(place)이기 때문이다.
즉, 공간은 평면적 차원의 장소 개념 위에 기억, 경험, 시간 같은 추상적 개념이 더해진 입체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진 대표적 작품들을 예로 들어본다.
▲오창근, ‘Portrait VIII – transition’.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가변 설치, 2012. 사진 = 스페이스 비엠
조태병 작가는 지나간 시간을 다시 끌어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리커버 15-6’ 작품을 선보였다. 그가 입던 모시메리 내의에 심어진 잔디가 그가 평소에 앉던 의자에 설치되어 자라고 있다.
작가에 따르면 전시 기간 동안 잔디가 자라거나 죽거나 하는 모든 과정이 작품의 일부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 이 작품은 시간과 생명의 소멸을 얘기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전시장 창문 밖에 설치돼 있는 결과물은 의자에 앉아 있는 작가의 자화상으로 보이며, 관람객은 그의 존재가 여기 실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렇듯 작가는 그만의 공간을 창조해 놓고, 그의 존재 일부분을 이 공간에 남겨놓음으로써 관람객과 시간을 공유한다.
카테고리 무의미하게 만든 작품들의 힘
오창근의 실시간 영상 설치 작품 ‘Portrait VIII – transition’은 카메라에 포착된 관객의 모습이 일정한 시간 속에서 중첩되다가 사라져버리는 역설적 상황을 표현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더 먼저 공간 속으로 사라지고, 움직이지 않는 사물들은 그대로 남는다. 움직이는 사물의 잔상과 멈춰 있는 장소는 흑백의 카메라 화면에 실시간으로 기록돼 큰 화면으로 변환돼 보인다. 이처럼 오창근의 작품 또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시간을 기록하면서 새로운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서동화의 작품 ‘의자 같은’은 의자가 아니며 아무도 앉을 수 없다. 계란 2개 무게인 283g에 불과하고 매우 연약하며 천정에 매달아 설치됐다. 의자는 주기적으로 회전하면서 공기를 움직이고 시공간을 점유한다.
▲김승환, ‘유기체2015’. 혼합 재료, 14 × 14 × 108 cm, 2015. 사진 = 스페이스 비엠
김승환의 작품은 퇴적층에서의 생성된 가로 방향의 겹쳐진 무늬들을 재현한다. 그것이 순식간에 혹은 오랜 시간 동안의 퇴적물 적층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형태에서 작가가 조형적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적층되거나 풍화 작용에 의해 일부분만 남아 서 있는 형상들은 자연이라는 마술사가 마술을 부린 결과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적당하겠다. 이 작품은 그러한 무한의 시간을 상당히 가볍고 부서지기 쉬운 재료로 형상화 했다.
이처럼 29명의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각자의 추상의 공간을 배회하다가 비로소 전시장이라는 장소에 정착했다. 그리고 개인의 기억들이 장소에 축적되면서 집단의 기억이 형성됐다. 그 기억들이 겹겹이 쌓여 역사가 될 것이고 새로운 혼성적 정체성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마치 ‘사이 공간’전이라는 올해의 역사가 나무의 나이테처럼 ‘현대공간회’라는 커다란 나무에 한 줄 새겨지듯이 말이다.
(정리 = 왕진오 기자)
정혜연 스페이스 비엠 디렉터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