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삶 산 인목대비·인현왕후·혜경궁 홍씨 유물 등 전시
▲드라마 ‘화정’에서 선조가 세상을 떠나는 장면. 강보에 싸인 아기(영창대군)와 외동딸 정명공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목대비가 울부짖고 있다. 그리고 침통한 표정을 자리를 지키는 광해군. 공식적으로 어미와 자식인 인목대비와 광해군은, 이후 평생 이어지는 반목, 보복-살해의 여정을 걷는다. 사진 = MBC 드라마 캡처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최영태 기자) 요즘 한국에 ‘배신의 정치’란 말이 유행이지만, 선조-광해군-인조 연간을 산 인목대비 역시 이 말을 들으면 “그래, 남자 정치인들은 다 배신해!”라면서 치를 떨 듯하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마련한 ‘조선의 왕비와 후궁’에는 수적으로는 많지는 않지만 인목대비의 통한을 보여주는 일부 유적들이 전시돼 눈길을 끈다. 인목대비는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화정’(MBC)에서도 중요 인물 중 하나다.
인목대비의 삶은, 우유부단한 남편(선조), 자신보다 9살이나 나이가 많은 양아들의 왕 등극(광해군), 백성들의 동정을 받는 왕비를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고 버린 정치인들(인조와 서인세력) 등에 의해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배신을 당하는 그것이었다.
그녀의 기구한 삶은 19살 나이에 선조의 계비(제2 부인)로 간택돼 비 오는 날에 51세의 임금에게 시집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왕비가 된 뒤 4년만인 1606년 선조가 그토록 바라던 ‘적자 왕자(영창대군)’를 낳지만, 이미 세자로 지정된 광해군의 나이가 34살로 완전히 장성한 상태였으니,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영광을 누릴지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다.
1차 배신男 - 즉위시켜줬더니 외아들 죽인 광해군
아버지 선조라도 오래 살았으면 늦둥이 아들이 그나마 빛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야속한 선조는 늦둥이 아들이 겨우 만 2살밖에 안 된 1606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선조는 이미 세자로 봉해진 광해군을 파하고, 적자(본부인이 난 아들) 영창대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싶어했고, 이른바 ‘소북파’의 관리들도 이를 지지했지만, 적자의 나이가 너무 어린지라 고민 끝에 “세자(광해군)의 나이가 장성하였으니 전위(임금 자리를 물려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하는 것도 가하다”는 헷갈리는 전위교서를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당시 영의정)에게 준 뒤 숨을 거둔다. 광해군을 왕으로 올리라는 건지, 아니면 영창대군을 왕으로 하고 인목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라는 건지, 아리송한 유언이 아닐 수 없다.
▲‘서궁일기’. 인목대비가 겪은 고난의 세월을 증언한 글이다. 종이에 먹, 34.2 × 24.9cm, 홍기원 소장. 사진 = 국립고궁박물관
이 문제 많은 유언장을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그러나 선왕의 지시를 실행하지 않고 인목대비에게 달려가 “두 살배기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해 언문으로 “대신들은 성상의 명을 순순히 따르라”며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그녀로서는 합리적 단안을 내린 것이지만, 이 결정으로 그녀는 이후 죽을 때까지 광해군의 배신에 치를 떠는 삶을 살게 된다.
광해군은 똑똑한 왕자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여차하면 명나라로 넘어가겠다”며 국경 도시 의주로 도망갔고 전국이 왜군의 칼날에 도륙되는 상황에서, 광해군은 조선 팔도 곳곳을 돌며 임시 왕의 역할을 하고, 일본에 대한 군사적 저항을 지도했다.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이 근왕병을 모집하는 의무를 띄고 함경도에 파견됐지만 하라는 일은 않고 가는 곳마다 부당한 물품 요구만 하다가 결국 성난 백성에 의해 포박돼 왜군에게 넘겨진 것과 비교한다면, 광해군의 뛰어남이 그대로 드러난다.
전쟁 통에 임금의 집인 경복궁이 불타고, 임해군의 사저도 불탔지만, 광해군의 집만은 무사했다는 것도 증거가 된다. 이런 광해군의 활약에 명나라는 “광해군은 부왕의 실패를 만회해 나라를 보전하고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전쟁 준비를 다시 갖추도록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침략을 당해 우왕좌왕한 선조의 임금 자격을 실질적으로 박탈하고, 광해군이 왕 역할을 하라는 지시였다.
▲인목대비가 쓴 한시 ‘민우시’. 종이에 먹, 144.3 × 59.7cm, 보물 제1220호, 강릉 오죽헌 시립박물관 소장. 사진 = 국립고궁박물관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조선의 선비들은 “선조 임금은 하야하라”는 상소를 잇달아 올린다. 서자 출신으로 열등감이 많고 우유부단하지만 동시에 교활하기도 한 선조 임금은 이런 분위기를 묘하게 이용했다. 하야 상소가 올라오면 선조는 실행할 의지도 없으면서 짐짓 “그럼 물러나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신하들은 “안 되옵니다”며 통촉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광해군은 아버지의 질시어린 시선을 피하기 위해 대전 앞에 엎드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읍소해야 했다. 임진왜란이란 난리통 와중에만 선조가 15번이나 ‘양위 소동’을 벌였다고 박찬영은 저서 ‘화정’에서 밝혔다.
서자 출신의 아버지 왕(선조)에 이어, 역시 서자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고통을 겪은 광해군은,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합리적 판단’으로 양아들인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인목대비와 그녀의 적자 영창대군을 핍박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즉위 5년만에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보낸 뒤 아궁이에 불을 지나치게 때 타죽게 만들었다.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자신의 친형 임해군도 죽이고, 인목대비의 대비 직위를 박탈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킨다.
자신을 채찍 맞는 늙은 소에 비유한 민우시
외아들을 빼앗기고,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갇힌 인목대비의 한맺힌 삶을 증언하는 기록이 ‘계축일기’다. 계축일기에는 ‘쌀을 일 바가지가 없어 소쿠리로 쌀을 일었다. 내인들은 솜도 없이 칠팔 년 동안 겨울을 지냈고, 우연히 면화 씨가 섞여 들어와 그걸 심어 씨를 냈다. 두세 해째에는 면화가 많이 피어 옷에 솜을 넣어 입을 수 있었다. 햇나물을 얻어먹을 길이 없었다. 가지와 참외와 동아 씨가 짐승의 똥에 들어 있기에 그것을 심고 길러 나물 상을 차렸다. 담이 무너져도 고칠 수 없어 내인이 담을 쌓았고…’ 등의 기록이 나온다.
▲혜경궁 홍씨가 짓고 쓴 한시. 개인 소장. 사진 = 국립고궁박물관
‘쓰레기를 버릴 빈터도 없어 지저분했고, 더러운 물건이 마구잡이로 쌓여 악취나 나고, 나인들이 불을 질러 인목대비와 정명공주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기록이다. 명문대가에 태어나 왕비가 되고, 왕의 아들까지 생산한 여인이, 상민만도 못한 생활을 한 것이다. 광해군의 배신의 정치에 철저히 능욕당한 현장 기록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그녀가 서궁유폐 당시 쓴 ‘민우시’(憫牛詩: 불쌍한 소의 시) 붓글씨도 공개된다.
늙은 소가 논밭갈이 힘쓴 지가 이미 여러 해 (老牛用力已多年)
목둘레 가죽은 찢기고 뚫어져도 잠은 즐거워라 (領破皮窄只愛眠)
쟁기질 써레질 끝나고 봄비도 넉넉한데 (梨耙已休春雨足)
주인은 어찌 괴롭게도 또 채찍을 휘두르나 (主人何苦又加鞭)
이 시에 대한 해석으로는, 가죽은 서궁을 의미하며, 잠과 봄비는 ‘서궁 생활에 겨우 적응했는데’라는 뜻이고, 채찍은 ‘영창대군의 죽음’을, 주인은 광해군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 있다. ‘가죽이 터지는 곤궁한 삶에도 자족하며 겨우 단잠을 청하려는데, 주인은 채찍을 계속 휘두른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 대해 인목대비의 외동딸 정명공주의 남편 홍양호는 “말마다 뼈를 찌르는 듯하고 글자마다 마음을 부러뜨리는 듯하니 이 글을 읽는 사람치고 책을 덮고 울지 않는 이 있으리오”라고 통탄했다.
이번에 전시된 인목대비의 ‘민우시’ 붓글씨는 인목대비의 친필을 모사한 것이라고는 해도,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 선조와 딸 정명공주와 마찬가지로, 인목대비 역시 뛰어난 서예 솜씨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힘있는 글자체는 선조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선조는 당대의 명필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이여송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선조의 글씨를 얻고 싶어 했다고 전해진다.
2차 배신男 - 반정의 명분으로만 이용한 인조
인목대비의 이러한 곤궁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포함됐던 서인(西人)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내는 데 좋은 명분이 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임금 자리를 빼앗은 서인 세력이 광해군의 죄목으로 든 것이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였기 때문이다.
▲읍혈록. 1795(정조 19년)~1806년(순조 6년)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1735~1815년)가 쓴 회고록인 통칭 ‘한중록’의 20여 종 이본 중 하나다. 사진 = 국립고궁박물관
정변에 성공한 능양군(인조)은 광해군을 이끌고 인목대비의 거처인 서궁으로 가 대죄(待罪: 죄인이 처벌을 기다림)를 청한다. 그러자 인목대비는 “옥새를 나에게 넘겨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반정 군의 이귀는 “내 머리를 줄 수는 있어도 옥새는 절대 줄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래도 능양군은 “옥새를 대비에게 드리라”고 명했고, 대비는 옥새를 품에 안은 뒤 “역적 혼(광해군의 이름)을 죽이고야 말겠다”며 광해군의 36가지 죄를 들먹인 뒤에야 옥새를 능양군에게 전해 인조로 즉위하게 조치한다.
인목대비가 “광해군과 그 아들인 세자의 머리를 가져오라.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후에 책명을 내리겠다”고 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인조를 필두로 하는 반정 세력은 △광해군이 뚜렷한 실정을 저지른 것은 아니고 △광해군과 세자를 죽이면 자신들도 보복을 일삼는 광해군과 똑같은 무리로 매도될 수 있다는 이유로 대비의 요구를 거절하고 광해군을 서인으로 강등시킨 뒤 강화도로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인조반정 성공 뒤에는 인목대비가 부귀영화를 누렸나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인조 6년 유호립이란 사람이 역모를 꾀한 것으로 드러났을 때 서인 세력들은 인성군뿐 아니라 인목대비를 이 사건에 연루시켜 “인성군이 인목대비의 밀지를 받들어 역모 세력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위협했다.
광해군이란 ‘배반의 정치인’에게 말못할 굴욕을 겪은 뒤 겨우 살아나 인조를 세웠더니, 이번엔 인조 중심의 서인 세력이 ‘배반의 정치인’이 된 셈이다. 결국 인목대비는 남자 정치인들에게 정치적 명분 용으로만 이용만 당한 셈이 된다.
그녀는 1632년(인조 10년)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외아들을 죽인 남자로서, 그녀가 그토록 미워했고 죽이고자 했던 광해군은 그녀가 세상을 뜬 뒤로도 9년을 더 살았으니, “광해군의 살점을 씹겠다”던 그녀의 원한은 결국 미완인 채로 끝나고야 말았다. 남자의 세상을 살다간 여자의 한이라고나 할까.
이번 전시회에는 인목대비뿐 아니라, 유별나게 여러 여자를 상대해 장희빈이란 희대의 여인을 탄생시킨 숙종의 정비 인현왕후, 사도세자의 부인으로서 한맺힌 삶을 살았던 혜경궁 홍씨 관련 유물도 일부 전시돼 ‘궁중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최영태 기자 dallascho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