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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 - 정희석]부유하는 잎사귀의 자유와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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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40호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2015.07.23 08:48:03

▲정희석 작가.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이번에 정희석은 잎사귀들을 그렸다. 지난 수 년 동안 싹과 잎을 그려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2009년 개인전 이후 정희석은 줄기에서 돋아난 싹과 파릇한 이파리들을 그렸다.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화병(花甁)에 꽂혀 있지 않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돈된 건 더더욱 아니다. 이번에 그린 잎사귀들은 바람결을 타고 흐르듯 대기 중에 부유한다. 이전에 그린 싹들은 순백이나 흑암의 배경 위로 클로즈업됐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정희석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단서를 유추할 수 있다.

첫째, 그것들의 정체가 관상용, 곧 미적 대상으로서의 타자화된 정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희석에게 싹과 이파리는 단지 감각적 아름다움을 위해 선별된 대상, 곧 예술적 소재 이상이다. 정물미학(靜物美學), 즉 꽃대가 부러진 채 화병에 꽂힌 꽃을 그리며 아름다움을 논하는 태도는 이 세계와는 무관하다. 이 세계는 사물의 지각적인 차원, 형태와 색, 질감 같은 섬세한 세부를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는 일체의 조형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둘째, 그것들이 사물의 자연주의적 맥락 밖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것들이 아름답지만 유한하며 생(生)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파괴의 가능성이기도 한 자연 외의 다른 질서와 결부돼 있음을 시사한다. 생생한 빛깔이 열흘 가는 꽃이 없고, 생떼를 써도 10년 지속되는 권력이 없다 하지 않았던가(權不十年 花無十日紅). 자연이 미의 추구의 완료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결국 손에 쥔 권력을 유지하려 버둥거리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한 미의 추구가 종국에 제공하는 것은 자연주의와 심리주의의 교배가 낳은 감각적 위안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조형적 이파리가 아니라 안내자로서의 이파리

이 두 가지 점으로 미뤄볼 때, 정희석에게 싹과 이파리들의 의미는 그것들의 조형적 특성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시지각적 쾌(快)에 있지 않고, 그것들에 잠재한 상징성, 즉 그 너머의 차원으로 인도하는 능력에 있음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소망으로서의 싹, 마른 가지를 뚫고 피어오른 불멸의 꽃, 자연 너머의 세계를 소개하는 안내자로서의 자연…. 2009년의 작업노트에서 정희석은 참생명의 소박한 대리인으로서의 싹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정희석, ‘하늘 - 잎 1443’. 비단에 채색, 75 x 30cm, 2014.

“세상 모습들이 매 순간들이 위기의 연속이다. 상처와 부정과 절망만을 생각한다면 악순환은 끝이 없다. 그럴수록 하나의 작은 싹이 지닌 기적적인 생명력을 믿고 소망을 품는다면 그 위력을 체험하게 되리라.”

문제는 이제 막 돋아난 싹이나 여린 이파리를 어떻게 감각적 위안을 넘어 ‘기적적인 생명과 소망’의 담지체로 이끌어갈 것인가의 방법론이다. 이 점에서 정희석의 조형적 실현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인데, 4세기경의 신학자 존 카시안(John Cassian, 360~435)의 담론 체계가 그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카시안에 의하면 “모든 종류의 지식은 적절한 연쇄, 즉 논리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궁극적인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적절한 질서를 따라야만 한다. 카시안은 ‘궁극의 목표’로 나아가는 세 단계를 제시했는데, 그것을 재해석해 높은 수준의 미학과 예술적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크게 두 단계의 과정을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희석, ‘하늘 - 잎 1502’. 비단에 채색, 58 x 94cm, 2015.

그 첫 번째는 지상의 악(惡)함과 추함, 분열되고 퇴락한 것들과 그것들에 미혹된 욕망과 감각적 허영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멀리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이러한 것들에 집착하고 매몰돼, 욕망하고 또 욕망하다 스스로를 죽이고도 남을 오늘날의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

다음 단계는 첫 번째 단계를 거치면서 획득되는 정화된 이성을 동원해 지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도의 분별력을 훈련하고 계발하는 것으로, 그 정도에 따라 자연과 문명에 깃든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무상함과 덧없음을 깨닫고, 그것들에 그것들 너머의 세계에 대한 깊은 갈망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카시안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망이며, 그렇게 하기 위한 분별력의 성숙이다. 분별이야말로 ‘모든 미덕의 어머니며 수호자요 안내자’며, ‘몸의 등불이며 삶의 안내자고, 건강한 판단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정희석, ‘하늘 - 잎 1444’. 비단에 채색, 97 x 215cm, 2014.

이 같은 카시안의 지식과 논리의 연쇄 과정은 왜 정희석이 새싹과, 투명한 대기를 타고 흐르는 잎사귀와, 깊게 노을 진 하늘을 그렸는가를 짐작하도록 도와준다. 그것들이 속성상 이 시대의 만연한 악과 추, 폭력과 외설, 탐욕과 허영에 대한 확고한 반정립(反定立)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투명한 안료를 사용하는 이유

이 반정립의 논리는 투명 미디움으로 반죽된 안료를 사용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이는 잎사귀들에 이면의 세계를 투과하는 반투명한 신체를 제공하는 과정이자 사물의 성향을 바꾸는 공정이다. 이에 의해 반투명해진 이파리들은 부단히 배경의 하늘을 투과시키는 변화된 성향을 갖게 된다. 시선은 그것들의 신체를 통과해 하늘과 대면한다. 이파리들은 이제 매개체요 안내자들이다. 그것들은 더 이상 그 자체로서 완료가 아니며, 궁극적인 미의 대상도 아니다. 조야한 정물미학(靜物美學)은 여기에 자리할 곳이 없다. 자연주의(自然主義) 예술론은 자연을 넘어서는 그리움과 갈망에 자리를 양보한다.

▲정희석, ‘하늘 - 잎 1520-2’. 혼합 매체, 110 x 48 x 48cm, 2015.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담론들은 참으로 덧없다. 동일하게 지상에 속하면서 다른 것들과의 단절에 의해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자체가 황당한 괴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맥락에서 정희석의 회화는 예술의 독립성과 신뢰성을 항구적으로 가정하는 모더니즘으로부터의 정당하고도 반가운 탈피가 아닐 수 없다.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예술을 감각적 대상으로만 제한하는 태도와는 더더욱 결별해야 한다. 그리로 나아가기 위해 정희석이 어떤 직접적인 비판이나 성토를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하는 일은 예술을 위한 예술, 감각을 위한 예술의 전통을 부인하고, 그로 인해 짓눌렸던 회화 공간을 해방의 공간, 계시의 공간으로 전면 대체하는 것이다.

▲정희석, ‘하늘 - 잎 1411’. 비단에 채색, 97 x 215cm, 2014.

정희석에게 하늘은 감상의 영역인 동시에 신비의 차원이다. 그것은 분명 태양, 구름, 수증기에 먼지까지 포괄하는 물질계지만, 그 구성물들은 하늘에 대해 극히 미미한 부분만을 설명해낼 수 있을 뿐이다. 우주의 피부며 창인 그것은 무한한 공간이자 시간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광활함이자 정지하지 않는 변화다. 표정은 시시각각 바뀐다. 인상은 순간순간 다른 것이 된다. 어떤 복잡수열과 순열도, 어떤 개념화나 도식화도 그 앞에선 무의미할 뿐이다. 하늘은 정의되기를 거부한다.

탁월한 예술도 존재의 누추함 감추지 못하지만…

반면, 그 광대함과 복잡성과 변화무쌍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지상의 그 어떤 것보다 단순하다. 그것은 신비지만, 풀리지 않는 난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해석을 허용하지만, 어떤 단순한 해석보다 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도록’ 돕는다. 지적으로 난해하지도, 정서적으로 모호하지도 않다. 그것의 지적 고상함, 정서적 풍요, 조형적 탁월성, 형이상학적 위대성에 대해서는 어떤 이견도 존재한 바 없다.

▲정희석, ‘하늘 - 잎 1521 부분’. 영상 가변 설치, 7분 55초, 2015.

또한 그것은 권력적이지도 엘리트적이지도 않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며, 어떤 타자도 그로 인해 억압되거나 소외되지 않는다. 그것이 포용하지 못할 지상의 어떤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이 지상의 시공을 넘어서는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 계시 앞에서 지상의 모든 것들은 비로소 자신의 성향에 대해 성찰한다. 지상의 어떤 것도, 자연도 그 숭고와 풍요와 고상함으로 묘사될 수 없다. 자연은 유한하고 지극히 불안정한 성향을 부단히 노정한다. 지상의 것들엔 예외 없이 야만적 성향이 깃들어 있다. 지상의 모든 권력은 잠재된 억압이고, 모든 지식은 소외의 씨앗이다. 가장 현명한 대화에도 오해가 깃들고, 최고의 평화마저 전쟁의 예고에 지나지 않는다.

▲정희석, ‘하늘 - 잎 1412’. 종이에 혼합 재료, 73 x 91cm, 2014.

가장 탁월한 예술도 존재의 작은 누추함조차 감출 수 없다. 하지만, 이 계시로서의 하늘은 무궁무진한 관용 자체다. 그 관용에 의해 지상의 가장 하찮은 것일지라도 신비와 초월성이 깃드는 작은 하늘이 될 수 있다.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이 피어나는 생명들’이 하늘의 무궁무진한 변화에 보조를 맞추는 협주곡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정희석이 모든 지상의 것들에 전하고 싶어 하는 ‘소망의 예술론’, ‘말라 버린 밑 등걸에서 돋아나는 싹’의 조형미학일 것이다.

정희석 14회 개인전
전시명: 바람
장소: 한스갤러리
기간: 2015년 7월 16일~8월 16일
초대일시: 7월 21일 오후 5~7시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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