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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가 - 이쾌대 전]잊혀진 월북작가에서 한국 대표작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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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41-442호 왕진오 기자⁄ 2015.07.30 09:22:13

▲이쾌대 작가. 사진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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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왕진오 기자)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으로 불리며 백남준(1932∼2006)과 함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는 이쾌대(1913∼1965) 작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은 대중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왔다.

하지만 ‘이쾌대’라는 이름 석 자는 35년간 금기어로 불리며 화단과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힌다. 6.25 전쟁 이후 1953년 월북을 했기 때문이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이름조차 금기시되다 1988년 해금이 된 이후에야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동안 그 존재조차 가려져 왔던 화가가 오늘에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그림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정서를 담고 있다. 또한 민족과 전통에 대한 자긍심과 신뢰에 기반하고 있어 시대를 초월해 강한 울림을 준다.

▲이쾌대 작가가 부인에게 준 예물함 목록. 사진 = 왕진오 기자

이쾌대는 경남 창원의 당시 시장이랄 수 있는 현감을 지낸 세도가의 자손이다. ‘3만석꾼’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잣집의 막내아들이었다.

엄친아로서 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당시 모던 보이들처럼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야구를 즐겼다. 암울한 시대였지만 어느 것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느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일본 주도의 조선미술전람회(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공모전)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신미술가협회(1941~1944년 활동한 서양화가 단체)와 조선미술문화협(1947년 좌익 미술 운동 단체들이 불법화되자 조선조형예술동맹에 속했던 미술가들이 탈퇴해 결성한 단체)같은 미술 단체를 설립해 민족정신이 담긴 미술을 건설하려 했다.

해방기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예술가의 사명을 붓으로 끌어안았던 화가 이쾌대의 궤적을 대표 작품과 미공개 작 등 400여 점으로 조명하는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이 7월 22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에서 막을 올렸다.

시대를 초월한 강한 울림의 민족 화가

일제 식민지 시기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에 어울리는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하고, 해방 후에는 새로운 민족 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했던 화가 이쾌대. 그의 이름이 다시금 세상에 빛을 본 것은 1991년 신세계미술관의 ‘월북 작가 이쾌대전’ 을 통해서다. 남한에서는 그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반면, 그가 선택한 북한에선 1998년 이후 그의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덕수궁 미술관에 전시된 이쾌대 작가의 ‘군상’ 시리즈. 사진 = 왕진오 기자

그는 6.25 당시 북한군의 강요로 공산 치하의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 부역을 한 이유로 국군에게 체포돼 부산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그가 북한을 택한 이후 남겨진 그의 가족들은 월북 작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시와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88년 월북 화가들의 해금이 단행됐고, 어두운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그의 그림들은, 막내아들 이한우가 미술품 수복 전문가에게 복원을 맡기면서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쾌대는 좌우 이념 갈등이 극으로 치닫던 1945∼1953년 해방공간에서 시대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예술의 방향을 수립하고 대작을 발표하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해방의 감격 속에서 이쾌대는 새로운 민족미술의 건설 방향을 고민했다. 일제의 잔재를 벗은 새로운 미술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 미술의 시급한 과제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만든 ‘군상’ 시리즈는 수십 명이 한데 엉켜 있는 작품으로, 그동안 그가 쌓아온 인물화 기량과 조형 감각이 유감없이 표현됐다.

해방 직후 ‘군상’ 제작에 몰두한 그는 1948년부터 조선미술문화협회에 ‘해방고지’, ‘창공’, ‘조난’, ‘군상’ 등을 발표했다.

▲덕수궁 미술관에 설치된 이쾌대 작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사진 = 왕진오 기자

‘군상 Ⅳ’에는 절망에 빠져 있거나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대화를 나누는 듯 한 두 남성, 흰 천에 싸인 채 남성에게 들려 가는 여성 등 다양한 인물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의문을 자아낸다.

그러나 해방 공간의 혼란한 틈을 타 언젠가 찾아올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은 그림임이 확실하다는 것이 미술사가들의 중론이다.

대부분의 인물이 벌거벗고 있어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실존성이 더 강하게 부각된다. 인체 묘사력과 해부학적 지식이 뛰어났던 그의 역량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표작이다.

전통 화법과의 융합을 통해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

당시 화단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이후 많은 화가들이 일본, 프랑스, 미국을 통해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쾌대처럼 새로운 시대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화가는 드물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회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관념적인 동양화의 구습을 벗고 서구 미술의 모방을 넘어 동서양의 미술을 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53년 남북한 포로 교환 때 그는 북한을 택했고,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부인과 네 자녀는 남한에 남겨졌다.

정치가들의 초상화나 정치 포스터를 그리는 등 선전 미술에만 몰두하는 북한 미술을 보고 크게 실망한 그가 남한의 가족을 두고 돌연 북한을 택한 이유는 정확치 않다. 이쾌대는 북한으로 건너간 뒤에도 화가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건설성 미술제작소 미술가로 조선미술가동맹 평양시 자강도 현역 미술가로 활동하면서 작품을 발표했다.

▲이쾌대 작가가 그린 부인 유갑봉의 드로잉. 사진 = 왕진오 기자

하지만 1961년 국가미술전람회에 ‘송아지’를 출품한 것을 끝으로 이후의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친형 이여성이 김일성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1958년 무렵 종파분자로 숙청됐고, 이후 학문적으로도 매장당하면서, 1961년 이후 화가로서 그에 대한 공개적 거론이 금지된 것으로 유추될 뿐이다.

남북한 양쪽에서 금기 화가로 낙인찍히고, 한때 역사에서도 지워졌던 화가 이쾌대는 북한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1965년 2월 20일 위천공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이쾌대는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그림을 팔아 자식들을 보살피라 당부했지만, 그의 그림은 가족에 의해 보관되어왔다.

덕수궁미술관에 공개된 그의 작품들은 휘문고부터 제국미술학교 재학 시절인 ‘학습기’(1929∼1937), 귀국 후 신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는 ‘모색기’(1938∼1944), 그리고 해방 이후 탁월한 기반으로 한국적인 리얼리즘 미술 세계를 구현한 ‘전성기’(1945∼1953)로 나뉘어 작품 세계를 조망한다.

1988년 해금 이후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가려져 왔던 월북 화가와 북한 미술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진행됐고, 그와 함께 활동했던 화가들의 자료가 공개되면서 한국 근대 미술사 전반에 대한 연구도 진전을 보였다.

이쾌대의 유족은 작품뿐만 아니라 300여 점에 이르는 드로잉, 앨범과 스크랩북, 화가들과 주고받는 서신과 전람회 자료, 수집한 각종 엽서와 도록 등 그가 남기고 간 자료들을 고스란히 보관했다.

이번 전시는 반세기 동안의 잊고 싶은 어두운 과거,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소명이라는 두 가지를 일깨워준다.

지금까지 화가 이쾌대는 지나치게 리얼리즘의 대가, 비극의 예술가로만 조명되어온 나머지 그가 모색한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은 간과됐다. 이제는 그의 시대와 예술, 인간 이쾌대를 조용히 마주해야 할 때이다. 앞 시대의 왜곡된 시선과 오류를 걷어내야 하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월북 이후의 행적과 예술까지 더해 그의 시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그의 궤적을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는 11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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