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상’ 화두로 지속된 예술세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작품과 함께한 황용엽 화백. 사진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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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왕진오 기자) “전시를 하면서도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려온 대로 갖다놓고 새로운 것을 일부 보태어 전시를 꾸렸습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완성된 그림을 그리지 못하지만, 그리는 과정을 전시로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림은 곧 화가의 삶의 증언이라고 믿으며, 인간답게 살고 싶어도 역사적인 시련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좌절의 쓰라림을 맛보는 이지러진 인간상을 여러 해에 걸쳐 끈질기게 추구해 온 화가의 말이다.
해방과 전쟁의 격랑 속에서 겪은 ‘인간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고민을 작품 속에 담아온 원로 화가 황용엽(84)의 화업 60년을 시대별로 조명하는 전시 ‘황용엽: 인간의 길’이 7월 25일∼10월 1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원로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 작가 시리즈 전시 중 하나다. 황용엽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치열한 예술혼으로 독자적인 회화 양식을 구축한 원로 작가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창작활동에 매진한 예술가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북한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월남을 강행하고, 국군에 입대해 6.25에 참전했으나 총상으로 제대한 후 전쟁터에 내동댕이쳐진다. 연고가 없던 남한 사회의 치열한 삶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홍익대를 졸업한 그는 당시 화단을 휩쓴 회화, 앵포르멜(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 단색조 회화, 극사실주의 등의 집단적인 활동이나 화단 정치와는 거리를 둔다. 그리고 ‘인간’을 화두 삼아 자신만의 독자적인 그림을 완성한다.
▲황용엽, ‘여인’. 캔버스에 유채, 65.5 x 80cm, 1959.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비극에 휩쓸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억압당했던 기억, 가족과의 생이별, 악마 같은 인간의 본능을 목격한 극단적인 체험은, 작가의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된 상처였다.
당시 해방과 전쟁 등 치열한 삶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의 대해 고민하던 작가는, 동기들의 전위적인 추상미술 운동 단체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형상 회화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참여했던 ‘앙가주망’(1961년 30대 전후의 청년작가들이 창립) 동인은 특정한 이념과 경향을 내세우지 않고 각자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인정하는 미술 단체였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표현주의, 야수파, 큐비즘, 앵포르멜 등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다양한 특징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상의 추구는 붓을 잡고 있는 한 나의 명제다”
이는 작가의 머릿속에 각인된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들을 외면화 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런 결과였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전반적으로 어둡고 탁한 색채, 두텁게 쌓아올려진 물감 층의 거친 바탕 위에 빠르고 단속적으로 그어진 붓 터치, 간략한 선으로 묘사한 여인의 형태 등이 특징적으로 등장한다.
▲황용엽, ‘어느날’. 캔버스에 유채, 130 x 162cm, 199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에 반해 1970년대는 전 세대의 표현과 대조적으로 회갈색 톤의 단색조 배경이 주를 이룬다. 당시 군부독재 치하의 암울했던 정치적 상황과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 불가항력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답답한 고립의 상황을 작가는 좁은 감옥에 갇혀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가면으로 가려진 수형자(受刑者)의 모습으로 상징화했다.
속도감 있는 빠른 선의 흐름이 강조된 표현적인 화면 속의 인물들은 해체된 고깃덩어리처럼, 피를 흩뿌리는 듯한 격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1980년대 초반 독재와 저항으로 점철된 시대의 무차별 폭력과 희생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표현으로 ‘인간상’을 제시했던 작가는, 이후 설화와 민화, 고분 벽화, 무속 신앙 등 민족 고유의 전통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인간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1989년은 황용엽의 작품세계에서 의미있는 한 해였다. 그룹 활동이나 ‘화단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작품에만 몰두해온 작가는 예술정신과 작품성을 인정받아 ‘제1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한다.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한 삶으로 예술혼의 상징이 된 이중섭의 예술세계는,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평생을 몰두해온 황 작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작가 나이 환갑을 맞아 새롭게 조망하는 ‘인간의 길’은 치열했던 반세기를 돌아본다. 숙명처럼 펼쳐지고 굴곡진 인간의 길이지만 이를 긍정하며 함께 끌어안고 가야 함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황용엽, ‘인간’. 캔버스에 유채, 50 x 45.5cm, 198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전까지 심리적, 정신적인 자폐로 인해 스스로 좁은 화폭 속으로 한없이 침잠했던 인간들은 이제 열린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호가 넘는 대작들 속의 인물들이다.
황용엽은 해방과 전쟁, 이산이라는 격동의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버텨내고 남과 북의 정치 체제와 미술계를 동시에 경험한 마지막 세대의 작가다.
절망과 고난, 치유와 회복의 감동적인 울림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의 비극에 휩쓸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억압당했던 기억, 가족과의 생이별, 생존의 본능만 가득한 인간들의 악마 같은 폭력을 목격한 체험은 작가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황용엽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화면 속에 토해내고 이를 용감하게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상실과 공포, 절망의 기억을 털어내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서서히 회복시켰다.
1950년대 말 이후 전위적인 추상미술 경향이 화단의 주류로 자리 잡았던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비극적인 현대사와 개인사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자생적인 형상회화를 제시한 작가의 예술세계는 드물고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또한 현대미술이라는 한정적인 영역을 넘어 역사적으로 소중한 ‘살아있는 증언’이기도 하다. 굴곡진 역사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버텨온 한 인간의 운명 같은 삶의 흔적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이른 현재도 꾸준히 작업을 지속하는 작가는 격동의 세월 동안 시도했던 다양한 형태의 인간상을 현재의 시선과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숙명처럼 펼쳐진 ‘인간의 길’을 감내하며, 묵묵하게 걸어온 노화가의 60년 예술 여정은 절망과 고난, 치유와 회복의 감동적인 울림을 준다.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