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공연문화 넘보는 힙합] PART 1. “나도 잘 나갈 수 있어”
‘3포 세대’의 당당한 자기 선언
▲2015 ‘무도가요제’ 출연진. 특히 정준하와 아이유의 첫 랩 도전이 많은 관심을 모았다. 사진 = 벅스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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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금영 기자) 인기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정준하는 “아프지마 도토 도토 잠보”를 외쳤다. 감성 보컬 아이유도 박명수와 “티키타~ 리듬에 맞춰 스핀~”을 외치며 처음으로 랩을 선보였다. 지금 한국엔 힙합 열풍이 대세다. 과거 힙합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마니아틱한, 그들만의 장에 국한됐다면, 이젠 방송, 영화, 공연까지 아우르며 대중적인 콘텐츠로 그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본토인 미국에서 흑인들의 저항 의식을 담았다면, 한국에서는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에게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의 메시지와 더불어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하는 멋스러운 이미지로 자리매김 중이다.
올 7월 SBS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는 래퍼를 꿈꾸며 자퇴한 소녀 박가람의 이야기를 방영했다. 아이돌 또는 배우를 꿈꾸며 연습생 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흔했다. 그런데 이제는 래퍼를 꿈꾸는, 힙합이 대세인 시대다.
본격적인 힙합 전성시대는 대중음악 채널 엠넷의 ‘쇼 미 더 머니’가 열었다. 엠넷의 ‘슈퍼스타 K’, MBC의 ‘위대한 탄생’, SBS의 ‘케이팝 스타’ 등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이 경쟁할 때 ‘쇼 미 더 머니’는 래퍼들의 살벌한 랩 전쟁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출연자의 가슴 아픈 사연, 출연자의 노래 실력에 감동하는 심사위원들의 모습에 집중했다면, ‘쇼 미 더 머니’는 “네가 그렇게 잘났어?” “가식 떨지 마” “내가 최고” 식의 직설적인 대결의 장을 펼쳤다.
인기에 힘입어 올해 시즌 4까지 방송됐다. ‘쇼 미 더 머니’의 여자 편인 ‘언프리티 랩스타’도 시청률과 화제성 모두를 잡으며 순항 중이다. 1~3월 시즌1 방송 뒤, 현재 시즌2를 방송 중이다. 10월 방송에서는 ‘쇼 미 더 머니’와 ‘언프리티 랩스타’ 출연진이 함께 출연해 대결 구도를 펼치기도 했다.
▲‘쇼 미 더 머니’의 여자 편으로 현재 시즌2 방송 중인 ‘언프리티 랩스타’의 공식 포스터. 언더 래퍼부터 현역 아이돌까지 다양한 출연진으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 = 엠넷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언더그라운드 래퍼뿐 아니라 인기 많은 아이돌 스타들이 랩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어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는 것. ‘쇼 미 더 머니’ 시즌3엔 아이콘의 바비와 비아이가 출연했고, 최근 시즌4에는 위너 송민호, 빅스 라비, 몬스타엑스 주헌 등이 출연했다. 바비는 우승, 송민호는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2도 과거 시즌1에 AOA의 지민이 출연했던 것과 비교하면 현재 원더걸스 유빈, 피에스타 예지, 씨스타 효린 등 아이돌 가수의 출연 비중이 높아졌다. 음원 파워 또한 막강하다. 두 프로그램의 경연 및 발표 곡은 음원 차트 상위권을 도배하기 일쑤다.
꼭 두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힙합 음악이 각종 음원 차트에서 상위권에 오르는 건 낯선 일이 아니다. 최근 힙합 듀오 리쌍의 개리가 낸 ‘바람이나 좀 쐐’가 1위에 올랐고, 아이콘의 ‘리듬 타’도 음악 방송 1위를 했다.
1990년대 아이돌 전성시대 때는 노래 실력이 부족하지만 비주얼이 출중한 멤버에게 랩 파트를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힙합의 라임(각운) 없이 빠르게 가사만 내뱉는 경우가 많았다. 그 멤버에게 노래 연습을 병행시키면서 노래 분량을 조금씩 늘려가는 식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아이돌 그룹에서는 랩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담당하는 멤버가 꼭 한 명씩은 있다. 이들은 직접 랩메이킹을 하고, 프로듀싱에 나서기까지 한다. 힙합 그룹이라 정체성을 내세우며 데뷔한 빅뱅, 방탄소년단, 블락비 등의 활약도 눈부시다. 방탄소년단의 랩몬스터, 블락비의 지코는 언더에서부터 래퍼로 실력을 쌓아온 케이스로 유명하다.
노래에서도 랩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과거 보컬 중심에 랩이 피처링 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젠 반대다. 개리의 ‘바람이나 좀 쐐’에도 보컬 미우가 피처링으로 참여했고, 2014년 여름의 대표 히트곡인 ‘한여름밤의 꿀’에도 애프터스쿨의 레이나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래퍼의 노래에 피처링을 원하는 보컬도 늘어난 추세. ‘언프리티 랩스타’에서는 아예 씨스타의 메인 보컬인 효린이 현란한 랩을 펼친다.
배경-인맥 통하지 않는 곳에서 펼쳐지는 통쾌한 반전 매력
왜 힙합이 인기를 얻었을까? 신선한 충격이라는 해석이 있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깨끗하고 예쁜 말을 하는 것보다 거친 말을 하면 더 눈길이 가는 것 같은 현상이다. 가령 아이돌 스타 선후배인 유빈과 효린이 서로 디스 랩(상대를 비난하는 랩) 대결을 펼칠 때 대중은 환호했다.
통쾌함을 느낀다는 반응도 많다. 힙합 프로그램을 즐겨본다는 30대 김예은 씨는 “계급장 떼고, 하고 싶은 말을 통쾌하게 하는데 나도 모르게 해방감이 들더라. 인기 많은 아이돌 스타가 언더 래퍼와의 대결에서 당하는 등 평소엔 보기 힘든 상황이 연출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인즉슨 배경도, 인맥도 통하지 않는, ‘갑을’이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실력만으로 부딪히는 상황이 통쾌함을 준다는 것. ‘언프리티 랩스타’에서는 아직 데뷔도 안 한 연습생 수아가 훨씬 선배들에게 “언니 대접 받을 생각 말라”고 했고, 프로그램 출연 전에는 존재조차 희미했던 트루디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누르고 트랙 미션에서 1위를 두 번이나 거머쥐기도 했다.
▲씨스타의 메인 보컬인 효린(가운데)은 랩 서바이벌 경연 ‘언프리티 랩스타’에 출연 중이다. 사진 = 스타십엔터테인먼트
이런 과정 속에서 탄생한 힙합 스타들은 힙합 가사 같은 이미지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한국형 힙합’의 특색이다. 타블로, 버벌진트, 빈지노 등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래퍼들도 인기있지만, 초등학교 출신의 래퍼 도끼의 성공에 열광하는 지망생도 적지 않다. 힙합 레이블 ‘일리네어 레코즈’를 이끄는 도끼는, 과거와 같은 학력 사회에서는 성공하기 대단히 힘든 조건이었다.
하지만 컨테이너 박스에서 지독히 배고픈 시절을 보냈다는 도끼는 현재 부와 스웨그(swag, 힙합 뮤지션의 자유로움-자아도취), 성공의 상징이 됐다. 비싼 차와 집을 소유하고, 집에는 현금 다발을 전시해 화제가 됐다. 숨기기보다 당당히 자랑한다. 취업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이른바 ‘3포 세대’에게 역경을 딛고 화려하게 성공한 도끼의 모습은 ‘너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느끼게 하는 측면이 있다.
또 다른 힙합 스타인 산이 또한 미국에서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힙합에 대한 열정과 꿈을 놓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치타도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1에서 우승해 일약 스타로 떠오르며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됐다. 소속사 없이 활동해온 이노베이터는 FT아일랜드, 씨앤블루가 소속된 FNC엔터테인먼트에 둥지를 틀었다. 비주류로 취급됐던 래퍼들의 성공은 3포 세대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허세라 불리기도 하지만 한국형 힙합은 억압받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데서 오는 멋스러움과 당당함, 그리고 꿈에 대한 의지에 기반한다.
하지만 관심이 높아진 만큼 부작용도 나타났다. 자유로움은 좋지만 힙합은 무조건 거칠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은 오히려 논란을 일으켰다. ‘쇼 미 더 머니’에서 송민호가 선보인 “미노 딸내미 저격 산부인과처럼 다 벌러” 가사가 항의를 받았고, 블랙넛의 선정적 퍼포먼스도 뭇매를 맞았다.
그럼에도 힙합 열풍이 거세게 이어지며 판이 더 커지지 않을까 예상되기도 한다. 힙합을 마이너 음악이 아닌, 투자할 만한 가치 있는 사업으로 보는 움직임도 눈에 띈다. CJ E&M 음악사업부문은 래퍼 팔로알토의 힙합 레이블을 인수했다. 10월 16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힙합 레이블 ‘하이라이트레코즈’ 인수를 통해 소속 레이블의 음악 장르를 힙합까지 확대했다”며 “CJ E&M의 투자·유통·마케팅·글로벌 네트워크 인프라를 제공해 음악 제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이라이트레코즈엔 ‘쇼 미 더 머니’ 시즌 4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한 팔로알토를 필두로 비프리, 허클베리피, 레디 등이 소속돼 있다. 보도자료는 이어 “양사는 힙합의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성공적인 글로벌 진출을 추진하고자 보다 적극적인 협력 방안으로 기업 인수 방식을 택했다”고 밝혔다. 더 이상 마이너가 아닌, 메이저 문화가 된 힙합 열풍의 행보에 많은 눈길이 쏠리고 있다.
김금영 기자 geum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