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아티스트 - 김유정] 외상과 독백으로써의 자기은유를 넘다
(CNB저널 = 글·홍경한 미술평론가) 참다운 내 것에 조타를 맞추고,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일수록 해주는 일 속에서의 행복’을 위해 볼테르(Voltaire)는 “인간은 자신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고 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손꼽히는 프레데릭 르누아르(Frédéric Lenoir) 역시 ‘행복이란 그 자체로서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이 그처럼 예측 가능한 계몽성을 띤다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을 철학하다(Happiness: A Philosopher’s Guide)’(2014)에서 르누아르는 우화 속 노인과 마찬가지로 행복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나,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사란 오히려 상처와 번민, 쓸쓸함과 고통의 나날이 눈부신 트라우마로 남아 지속되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진정으로 소유하고 잠재적인 존재를 드러내며, 상처 따윈 전혀 없이 더 실제적인 인간으로써의 행복을 이룬다는 건 매초, 매시 부딪히며 살아가는 인간에겐 이상화한 사르데냐(Sardegna)의 단지에 불과할 뿐이다. 짧지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인공자연을 구축하는 일과 진배없다.
어쩌면 그건 ‘즐겁다’, ‘기쁘다’와 같은 형용사를 주술처럼 읊조리는 공허함이며, 우린 단지 여신 베누스(Venus)가 곡물의 신 아도니스(Adonis)에게 반하여 그를 납치한 후 한순간에 지고 말 꽃으로 바꾸어 놓은 ‘아도니스의 정원’에 잠시 목말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실체적 삶과 큰 관련 없는 하나의 텅 빈 광주리 혹은 항아리일지도 모르고.
▲김유정, ‘Incubator - Ownerless’. 프레스코, 회벽 위에 스크래치, 120.0 x 120.0cm, 2015.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작가 김유정의 ‘정원’은 사람의, 현대인들의, 규격화된 일상을 관상식물로 치환해 욕망하는 식물로 ‘재번역’한 결과다. 그것은 작가의 말처럼 획일화된 일상이 강요되는 현대인들의 씁쓸함을 그들이 가두어 놓은 관상식물을 통해 반증하는 것이며, “공산품처럼 규격화된 우리들의 삶과 고민을 자연적인 물질로 승화시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즉, 삶에 관한 작가적 의식과 소고(小考), 일종의 회화적 렌더링(rendering)이 바로 김유정의 정원 시리즈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유정이 지정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삶이라는 단어 자체는 낯설지 않다. 많은 작가들이 삶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그러나 친숙함이 곧 정답을 가리키는 건 아니며, 이성에 의한 해석이 실체의 파악을 도모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삶이란 모호함, 그 자체일 수 있으며 혹은 매일 자신의 묘비명과 자서전을 써 내려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혹은 플라톤(Platon)의 주장처럼 무언가를 얻기 위해 잃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우리는 삶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아니, 늘 그 유무형의 무게에 억눌린 채 탈주와 속박을 오간다는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김유정의 정원은 그 삶의 중앙을 관통한다. 세월의 텃밭에서 자란 인연과 관계망을 통해 자신의 삶을 헤아리고, 나와 관계된 일상의 흔적들을 독자적 표상(생존조건)으로 재구성한다. 실제로도 작가는 삶이라는 단어 아래 나와 부대끼는 타인들과 사물들을 공유하며, 그 미세한 떨림과 전신적인 욕망과 수없는 물음을 그림이라는 매체로 여민다.
특히 삶의 다양성 가운데 자신을 중심으로 한 내용들을 일기처럼 펼쳐놓으며, 그것을 근간으로 관계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오늘의 우리를 소환한다. 따라서 김유정의 정원 연작은 ‘일상을 텃밭으로 자라는 상처와 치유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중략)
▲김유정, ‘B1’. 프레스코, 회벽 위에 스크래치, 113.5 x 162.0cm, 2015.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현실에 존재하고 서로 관련하면서 작용하는 개개의 존재(각각의 식물들과 사물들, 어둠과 밝음 - 덮음과 비워냄의 이중성으로서의 존재)를 정원으로 묶어 언급하는 동시에 ‘나는 이미 만인에 관여되어 있으며’ 현재의 내가 전체의 나일 수도 있음을 기술하는 전개를 밟는다.
또한 인간 존재와 인간적 현실의 의미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우리는 곧 가능존재라기보다는 보편적 실현존재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 표상은 언제나 종적의 이탈을 지시할 뿐 아니라, 일정한 구조 내에선 자유로움으로 도출된다.
작가는 그곳에 느낌과 감성, 일정한 스토리를 내재시킨다. 작거나 큰 화면에 공기처럼 빨아들이고 다시 밖으로 내뿜으며 둔탁하고 곱지 않은 결을 험하게, 허나 따뜻한 저의와 공통의 가치 아래 표상화한다.
둔탁하고 곱지 않은 결을 험하게, 허나 따뜻한 저의와 공통의 가치 아래에서의 표상화(인간사의 식물에의 대입, 자연의 인위적 이식과 전유, 감정의 내면성의 발화 및 확장)는 김유정만의 독특한 기법인 프레스코(fresco)로 구현된다. 그는 이 기법의 어원처럼 ‘신선하게’ 다룬다. 채 마르지도 않은 회벽에 주어진 시간 내 사물을 묘사하고 재현하기 위해 채색 대신 긁기를 선택한다. 이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외부로부터의 손상과 상실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옛 기법을 오늘에 재현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귀납하기 위한 장치이며(물론 작가적 변별력을 부여하는 기능도 없진 않다), 그의 말마따나 “긁기를 통한 관상식물, 인공적인 풍경들의 재현은 빛과 생명력을 얻어 곧 우리의 인생”을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생존 조건에 필요한 요소들을 배척하지 않은 채 공유와 공감-회생의 틈을 거듭 드러내 보인다. 즉, 피해갈 수 없는 경쟁과 복잡한 세상에 유기체로 살아가는 나와 우리네 삶의 아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지만, 세상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나아가기 위해, 상처받은 이들이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안락한 정원 - 상실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 역시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유정, ‘온기’. 프레스코, 회벽 위에 스크래치, 113.5 x 162.0cm, 2015.
마지막으로 그의 그림에서 중요한 건, 김유정의 정원 시리즈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미메시스적 욕구와 근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개념을 빌어 이해하자면 그의 정원은 여러 측면에서 삶의 본질을 모방(mimesis)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원은 보편적-사실적 정원이 아니라,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말처럼 인생의 사막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평화롭고 아늑한 시공을 개방해 놓은 확장의 정원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외상’에 대한 차가운 직시, ‘독백적인 자기 - 그리기로서의 은유’는 아닌 셈이다.
전시회: 획일화된 일상이 강요되는 현대인들의 씁쓸함을 그들이 가두어 놓은 관상식물을 통해 반증하는 작가 김유정(41)의 개인전 ‘생존조건’전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 도스에서 11월 25일∼12월 1일 열린다.
(정리 = 왕진오 기자)
홍경한 미술평론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