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현실은 잔혹 동화라고들 한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마냥 순수하고 평온하게 펼쳐질 것만 같았던 세상. 하지만 책임감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해 그 세상에 입장하게 되면 치열한 생존 경쟁 속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현실이다. 이 가운데 어른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동화적 감성의 전시들이 성인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이미 커버린 성인 관객에 심심한 위로와 동시에 세상에 대한 풍자를 던진다.
동화적 공간에 펼쳐진 판타지
‘테이크 미, 잇 미, 드링크 미 앤 하이드 미’전
복합문화 공간 앨리스80은 개관전으로 ‘테이크 미, 잇 미, 드링크 미 앤 하이드 미(Take Me, Eat Me, Drink Me and Hide Me)’전을 연다. 앨리스80은 공간 이름에서부터 동화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복잡하고 바쁜 도심 생활에 지친 현대인에게 예술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잠깐의 여유와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이 되자는 취지 아래 꾸려졌다.
전시명 ‘테이크 미, 잇 미, 드링크 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에 등장하는 대사다. 키가 커지는 쿠키, 다시 작아지는 물약을 먹은 앨리스의 모습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전시는 여기에 ‘하이드 미’를 더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진성 아트 디렉터는 “첫 전시로 무겁지 않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거기에 흔히들 아는 앨리스 이야기가 적합하다 생각했다”며 “‘하이드 미’는 전시 공간의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관람객에 보내는 메시지와도 같다. 동화에선 앨리스가 깊은 구덩이에 빠져 이상한 나라로 간다. 앨리스80은 키 큰 건물들이 밀집한 역삼동 지역 지하에 숨겨진 장소처럼 자리했다. 이 숨겨진 공간에 들어온 직장인이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껏 해방감을 만끽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말했다.
▲김상민, 김해경, 유지은, 이피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 갱잡(Gangjob)은 ‘테이크 미, 잇 미, 드링크 미 앤 하이드 미’전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에 등장하는 대사를 토대로 다양한 현대인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진 = 앨리스80
김상민, 김해경, 유지은, 이피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 갱잡(Gangjob)이 이번 전시에 참여한다. 이들은 공간 자체를 예술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소개한다. 작품 속 내재된 미학적 유희와 추상적 농담은 빨간 조끼를 입은 토끼가 돼 관람객을 이상한 나라의 판타지로 안내한다. 더 나아가서는 문학이 주는 동화적 감성을 넘어 상상의 즐거움을 극대화시키며 현실과 환상, 그 경계를 넘나드는 재미를 준다.
앨리스라는 동화 모티브 아래, 작가들은 순수한 감성을 자극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내면에 품을 수밖에 없는 욕망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드러낸다. 마냥 동화 같지 않은 현실이 재현되는 순간이다. 김상민은 욕망의 덧없음을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유지은은 잉크를 떨어뜨리는 행위에서 생기는 우연성과 즉흥성에서 욕망이 시작됨을 말한다. 김해경은 ‘체셔호랑이’에서 동화 속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체셔 고양이를 한국 민화의 호랑이로 탈바꿈시키며, 사라져가는 특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피는 어떤 행위와 이미지에 대한 고정관념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 이밖에 이번 전시를 위해 포스트 카드가 특별 제작됐다. 동화에서 폭군으로 등장하는 하트 여왕을 수호하는 카드 병정들이 절로 떠오른다.
김진성 디렉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태그들에서 영감을 받아 구성된 이번 전시에 많은 성인 관객이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며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앨리스처럼 많은 분이 전시를 보고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8일까지.
‘앨리스의 토끼’의 다양한 표정들
‘오늘의 방’전
김명선 작가의 개인전 ‘오늘의 방’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작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또 다른 신비로운 일상을 찾아 도자기를 굽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한 편의 동화를 작업한다. 손바닥만 한 크기부터 길이 90cm짜리 커다란 작품까지 다양한 크기의 도예 작품들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안내하는 토끼에 주목했다. 그냥 봤을 때 토끼는 마냥 귀엽기만 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심상치 않다. 시크한 표정의 토끼는 도도해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 그런 ‘척’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동화 ‘빨간 망토’의 소녀처럼 망토로 온 몸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기도 해 궁금증을 준다.
갤러리 엘르 측은 “이번 전시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 속 잃어버린 환상과 동화적 상상력을 찾고자 마련됐다. 현실과 환상의 이야기가 다양한 도자에 담긴다”며 “작가는 현실 속 숨어 있는 환상을 통해 더 큰 의미의 현실을 찾으려 한다. 환상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토끼,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소녀를 사용하는데, 이 둘을 함께 대치시켜 환상과 현실의 결합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김명선, ‘욕망의 항아리들 시리즈’. 슬립, 고화도 안료, 캐스팅, 에어브러쉬, 재벌소성, 10 x 10 x 15cm, 2015. 사진 = 갤러리 엘르
이번 전시 주제는 ‘오늘의 방’으로, 현대인이 품고 있는 불안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작업노트를 통해 “정해지지 않은 미래는 불안하다. 미래가 현재가 되더라도 또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에 불안하다. 그래서 오늘을, 지금을 즐기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과 함께 오늘의 방 안에서 나갈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도도해보이면서도 약하고, 망토로 온 몸을 가린 토끼의 모습은, 불안에 떠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위로의 손길을 건넨다.
총 20피스로 제작된 ‘꿈+변해가다’는 짙은 네이비부터 하얀색까지 그라데이션을 주는 형태다. 깊은 잠에 들어 환상의 세계에 빠졌다가 점차 깨어나면서 현실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총 27개의 ‘욕망의 항아리’ 시리즈는 작은 항아리마다 사연과 이야기를 품었다. 유쾌하고 위트 있어 보이는 토끼의 모습은 웃음을 주지만, 그 일면에 상처받고 불안한 현대인의 모습을 빗대어 씁쓸함을 주기도 한다. 전시는 12월 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