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괴물신인 박소담, 연극 ‘렛미인’도 삼켰네
연약·파괴적 뱀파이어 소녀의 이중매력 살려
▲오스카(왼쪽, 안승균 분)의 피를 보고 뱀파이어의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일라이(박소담 분)의 정체가 탄로난다. 사진 =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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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영화 ‘검은 사제들’ 상영 극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었다. 처음엔 강동원과 김윤석을 이야기하며 극장에 들어가지만, 나오는 이들은 대개 박소담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퇴마 영화의 전설 ‘엑소시스트’의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악령 빙의 연기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증거다.
연극 ‘렛미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보인다. 박소담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순진한 눈망울로 소년을 쳐다보다가, 난데없이 자신보다 몸집이 큰 사내를 덮쳐 피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충격을 안겼다. 뱀파이어 콘텐츠야 지겹도록 봤지만, 이 어린 배우가 보여주는 성장세가 놀랍다.
연극 ‘렛미인’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과, 이를 바탕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영화는 2008년 스웨덴에서 개봉됐고 2010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됐다. 연극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2013년 첫선을 보였다.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결손 가정의 외로운 10대 소년 오스카, 옆집에 새로 이사 온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 그리고 그녀의 곁을 항상 지키는 중년 하칸의 이야기를 그린다. 외로움을 간직한 세 명은 각각의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하칸은 그녀를 먹일 피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하고, 일라이와 오스카는 서로의 외로움을 인식하며 가까워진다. 모스 부호로 비밀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사탕 가게에서 몰래 도둑질을 한다. 이 모습만 보면 평범한 소년소녀의 사랑 같지만, 오스카가 일라이의 잔혹한 면을 알게 되면서 핑크빛 사랑에 핏빛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연극은 ‘충무로 괴물 신인’ 박소담 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다. 그녀가 주역 일라이 역을 맡았다. 하지만 연극을 꼭 봐야겠다고 점찍은 건 원작 영화가 준 강렬한 인상 덕분이었다. 특히 스웨덴 영화 속 리나 레안데르손이 연기한 일라이의 오묘한 매력을 잊을 수 없다. 검은 흑발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모호한 중성적인 얼굴로 순진하면서 잔인한 뱀파이어를 연기했다. 그래서 연극 소식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과연 원작의 매력을 잘 살릴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극장을 나오면서 기자의 입에서도 “박소담이 연극까지 집어삼켰네”라는 독백이 흘러나왔다.
▲연극 ‘렛미인’은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와 10대 소년 오스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사진 = 신시컴퍼니
첫 등장 장면에서는 말투가 혼자 튀는 듯했다. 그러나 극이 전개될수록 그 말투와 행동에 설득력이 더해진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소녀로만 살아온 뱀파이어의 삶은,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튈 수밖에 없었다. 박소담은 이 점을 잘 캐치했다. 소녀이기에 순수한 면도 있지만, 오랜 세월의 흐름은 그녀를 영악하게도 만들었다. 이중적인 면모를 오가며 계속 일라이에게 눈길이 가게 만든다.
또 주목되는 부분은 연극 ‘렛미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무브먼트(movement)’다. 극 중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말이 아닌, 마치 춤처럼 보이는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최근 방송된 MBC ‘라디오 스타’에서 박소담은 연극 오디션 때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를 표현하기 위해 바닥을 혀로 핥았다고 했는데,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움직임이 마찬가지로 예사롭지 않다.
레플리카 프로덕션으로 원작 무대 한국에…
내면세계를 말 아닌 움직임으로 거침없이 표현
놀이터의 정글짐을 날아다니는 듯이 오가고, 나무에 오르는 등 몸 움직임이 가볍다. 그 움직임이 극대화되는 게 극의 마지막 부분이다. 수영장에서 갈등이 폭발하며 뱀파이어의 초인적 능력이 발휘되는 이 장면이 영화에서는 매우 고요하게 표현된다. 반대로 연극에서는 역동적인, 신들린 듯한 몸 움직임과 조명 사용으로 새로운 장면이 탄생됐다.
배우들이 무대에서 신나게 누비도록 한 배경에는 ‘렛미인’이 시도한 레플리카 프로덕션이 있다. 원작 프로덕션의 모든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했고, 존 티파니 연출을 비롯, 무브먼트 디렉터 스티븐 호겟, 무대 디자이너 크리스틴 존스 등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 팀이 직접 한국에서 오디션을 진행하고, 무대를 구현했다. 공연 제작사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예술감독은 “오리지널 연극을 그대로 서울로 옮겨서 하는 것 또한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뮤지컬엔 흔한 방식이지만, 연극엔 그렇지 않아 과정이 힘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연극 문화 형성의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무대 배경의 주요 테마는 조용한 숲이다. 살인이 일어나기도, 일라이와 오스카의 만남이 이뤄지기도 하는 공간이다. 영화 속 나무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피를 빼는 장면도 무대에 거침없이 구현된다. 그런데 바닥에 깔린 새하얀 눈에 새빨간 피가 흩뿌려지는 잔인함과 아름다운 이미지가 함께 한다. 무대 전환이 많진 않지만, 소품을 적절히 사용해 공간을 해치지 않고 수많은 공간을 창조해낸다. 공연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2월 28일까지.
김금영 기자 geum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