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4호 김금영 기자⁄ 2016.05.18 14:36:43
대표적인 아트테이너로 불려 온 조영남이 그림 '대작' 의혹에 휩싸였다. 이에 미술계, 특히 그림을 직접 그리는 작가들, 그리고 미술품 수집가(컬렉터)들은 격앙하는 분위기다.
김달진 관장 "안타깝고 화나"
김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은 18일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를 냈다. "미술계에 연예인 작가가 많이 들어오고 활동하고 있다. 순수 예술인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일까지 터져 안타깝다. 연예인 작가는 재능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름값으로 작품 가격이 올라가는 경우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미술의 대중화 측면에서는 기여도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런 일이 터지니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대적으로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조영남은 미술계에 유입 당시 미술계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책도 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미술계를 지적하던 사람이 미술계 관행을 운운하며 잘못이 없다는 태도엔 어폐가 있다"며 "A씨의 주장에 따르면 8년간 300점에 달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열정페이 식으로 노동력을 착취한 부분도 문제다. 그리고 조수라는 개념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같은 공간에서 작업을 하며, 직접 콘셉트를 이야기하는 과정이 기반이 돼야 한다. 원격으로 그림이 오가며 지시를 내리는 과정에서 어떻게 작품에 작가의 혼이 들어가겠는가. 그림은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작가의 정신적 수행의 숭고한 결과물"이라고 짚었다.
김달진 관장은 작업 과정에서의 투명성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앤디 워홀이 자꾸만 이야기되는데, 앤디 워홀의 팩토리는 워홀 자신이 알렸다. 하지만 조영남은 이 부분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었다. 사정이 이런데 자꾸만 미술계의 당연한 관행이라는 식으로 이야기의 논점을 흐리는 주장들이 안타깝다. 이번 사태가 미술계에서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들에게 또 한 번 박탈감을 안겨줄 것 같아 염려된다"고 격앙된 목소리를 보였다.
현업 작가 "붓 한번 들어보지 않은 평론가들, 함부로 관행 운운 말라"
현업 작가들도 이번 사태에 격앙된 분위기다. 현업 작가 B씨는 "매우 화가 나고 어이도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대다수 작가들이 조영남의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힘들게 작업하는 작가들에게, 단순히 취미를 고급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앤디 워홀과 제프 쿤스 등은 판화 작업 방식이 유명하다. 그런데 판화도 아닌, 붓을 드는 작업을 하는 조영남이 앤디 워홀을 감히 언급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건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인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의 생각을 그려달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또 붓 한 번 들어보지 않은 평론가들이 미술계 관행이라는 식으로 감싸고 도는 반응은 화가 나고 더욱 허탈감이 들게 한다. 미술계는 저렇게 돌아가는구나 식의 부정적인 인식이 대중에게 생길 것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한 미술 관계자는 시스템 차원에서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미술계에는 흔한 관행일지라도 일반 대중은 이런 관행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며 "미술계의 오래된 관행이라도 사회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관행을 대체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시스템 역시 없다. 그렇기에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서로 어찌할 바 모르는 채 목소리를 높이면서 논란만 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트테이너에 제대로 관행 알려줬나" 자성 목소리도
또 다른 미술 관계자는 아트테이너에 대한 시선에 우려를 보냈다. 그는 "조영남 등 아트테이너에게 미술계가 제대로 대우를 했는지도 짚어야 한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연예인으로서 그의 그림 작업은 '천재 화가'라는 식으로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포장됐다. 하지만 화려한 마케팅과 달리 작가로서의 작업에서 작업 방식, 관행 등에 대해 제대로 된 조언을 받았을지 의문이다. 아트테이너라는 위치에서 화려함만 부각되다 보니, 정작 본인도 미술계 관행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안타까운 부분"이라며 "원조급 아트테이너 역할을 해온 조영남이기에, 이번 사태가 아트테이너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으로 번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사기죄 성립 여부에 대해서는 법조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조영남의 이름값을 믿고 작품을 산 구매자들이 피해 배상을 요구할 경우 사기죄 성립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있다. 반면 조영남이 작품에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얼마나 제공했는지, 창조적 부분과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밝혀내기 쉽지 않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죄를 묻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고윤기 변호사 "자기가 그렸다며 판매했다면 사기죄 여지"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 작품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 현대미술, 조형에는 일반적이다. 조영남의 화투 그림은 순수예술이라기보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만들어진 팝아트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는 사기죄 성립이 어렵다"며 "다만, 자신이 직접 그렸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판매를 했다면 사기죄가 성립할 여지가 있다. 또한 법적인 문제는 없을지라도 도덕적인 차원에서는 이미 문제가 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B씨는 미술계의 자성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술계 전반에 조수를 써야 잘 나가는 작가라는 식의 인식이 깔려 있다. 실제로 갤러리에서 전시를 준비할 때 작품을 많이 찍어내기 위해 조수를 고용하라는 권유를 받은 적도 많다"며 "빨리 빨리 작품을 쳐내야 뜬다고, 오히려 조수 고용을 부추기더라. 작가가 아닌 공장 대우를 받는 느낌이었다. 힘이 없는 작가는 조수를 못 쓰고, 잘 나가지도 못한다는 인식이 더욱 이런 미술계의 소위 '관행'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되는 관행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 네티즌은 "이런 식의 논리라면 교수들 논문 표절도 관행이니 그냥 지나가자는 식인가"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네티즌은 "논란이 불거졌는데 오래된 관행이라서 잘못된 게 아니라는,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천재 화가 식의 이미지 메이킹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득을 취해 왔으면 논란이 불거진 것에 대한 사과가 우선 아닌가"라며 조영남의 태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진중권 "작품당 10만원은 너무 저렴"
이번 사태는 무명작가 A씨가 가수 조영남의 그림을 2009년부터 1점당 10만원 안팎의 돈을 받으며 대신 300여 점을 그려 왔다고 밝히면서 비롯됐다. 이에 춘천지검 속초지청은 16일 조영남의 서울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양측은 첨예하게 대립되는 입장을 보였다. A씨는 "작품의 90%를 내가 그려주면 조영남이 나머지 10%를 덧칠하고 사인한 뒤 작품으로 발표했다"고 주장했고, 조영남 측은 "A씨는 공백의 색칠을 도운 정도가 전부"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영남 측은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조수를 두고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많다. 이는 미술계의 관행"이라며 문제가 없음을 주장하며 맞섰다.
이와 관련해 진중권(53) 동양대 교수는 조영남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SNS에 "검찰에서 사기죄로 수색에 들어갔는데, 오버액션"이라며 "핵심은 콘셉트다. 콘셉트를 제공한 사람이 조영남이라면 별 문제 없고, 그 콘셉트마저 다른 사람이 제공한 것이라면 대작"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진 교수는 앤디 워홀의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앤디 워홀은 '나는 그림 같은 거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미니멀리스트나 개념미술가들도 실행은 철공소나 작업장에 맡겼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조영남이 작가에게 대가로 10만원을 전달한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저렴하다"고 지적하며 문제 삼았다.
진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번 조영남 대작 의혹은 미술계에 이미 오랜 세월 있어 온 관행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과연 관행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설득이 되느냐"는 반박 의견이 이어지고 있다.
조영남 "환불 원한다면 응하겠다"
'천재 화가' '대표적 아트테이너'로 불려온 조영남은, 1973년 첫 개인전 후 40년 넘게 꾸준히 전시를 열어 왔다.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그림을 그릴 때 도움을 받는 부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TV와 각종 인터뷰를 통해 그와 그의 대표 시리즈인 화투 그림은 숱하게 노출됐다. '바쁜 스케줄 속에서 전시회를 열 정도로 많은 그림을 그릴 시간이 있었을까' 하는 의혹만 있었을 뿐, 이에 대한 명쾌한 설명 또는 작업 공정을 딱히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조영남이 모든 작업을 100% 혼자서 해온 것으로만 알려졌다. 진 교수는 "욕을 하더라도 좀 알고 하자"고 짚었지만, 이번 논란을 통해서야 미술계 관행을 알게 된 대중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속았다"며 배신감을 느끼는 반응이 역력하다.
또 도움을 받은 과정도 A씨의 주장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고용된 조수가 아니라 외부하청 노동 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미술평론가 정준모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보통 조력자를 두면 한 공간에서 즉각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데, 조영남과 A씨는 원격으로 그림이 오갔다는 점이 문제다. 원작자의 통제 없이 그림을 그렸다면 관례라 하더라도 허용 범주를 넘은 것"이라고 짚었다.
논란이 거세지자 조영남은 17일 오후 일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조수를 기용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또한 태도에도 변화를 보였다. 처음엔 "미술계 관행. 문제가 없다"고 강경히 일관된 주장을 보이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작품의 환불을 요청하는 구매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그림을 바꿔주거나 환불에 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수의 도움을 받은 사실을 스스로 밝히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도 나에게 그런 사항을 묻지 않았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검찰은 조영남이 대작 작품을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팔았다면 사기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A씨가 그린 작품이 실제 판매됐는지를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가 어찌 나오든 '천재 화가' '대표 아트테이너'라는 조영남의 명성에는 이미 금이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