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목표? 그리는 방법? 메시지? 그런 거 없어요. 모든 건 정해져 있지 않아요. 만들어 가면서 교감하는 거죠.”
갤러리그림손에서 만난 이성현 작가에게 질문을 쏟아내자 “정해진 답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라는 건가 걱정이 됐다. 그런데 작가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렇죠” 하고 공감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성현은 정해진 답이 없이 자유로운 붓질을 이어가는 작업 방식만큼이나 유연한 태도와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갤러리그림손에서 5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4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이다. 수묵만을 이용한 이전과 달리 먹 사이사이에 다양한 색을 넣은 수묵채색도 선보인다. 주로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다. 하지만 화면을 보고 바로 자연의 형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전통 산수화는 산과 강 등의 형상을 대개 정확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성현은 반대로 산의 형상을 해체했다.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화면에 선으로 그어내는 것이 그의 산수화다.
“산에 가서 미리 스케치를 해오거나 사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 모습보다 그 경관을 보고 제가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죠. 아주 큰 형태는 머릿속에 생각하지만, 세부적으로 밑그림을 그리거나 정해놓지는 않아요.”
이런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어떤 풍경을 보거나 사물을 마주할 때 느끼고 보이는 것이 가지각색이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어떤 형상을 보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할머니를 예로 들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리울 때 사람들이 할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건 할머니와의 추억에서 연상되는 따뜻한 이미지다. ‘할머니 얼굴에 점이 여기 있었지’ 하면서 점이 없으면 할머니가 아니라는 식으로 외모를 상세히 따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 어떤 대상을 마주했을 때 드는 느낌, 그리고 서로 간의 교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제가 산을 보고 ‘이렇게 생겼구나’ 하면서 이야기하는 게 정답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아니야, 이렇게 생겼어’ 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 있죠. 그래서 제게는 명확한 형상이 중요하지 않았어요. 형상과 느낌을 작품에서 정형화 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나는 이런 느낌을 받았어’ 하고 보여주는 선에서 그쳤어요. 그리고 작품을 보는 이와 새로운 교감을 하는 거죠. 저와 의견이 다를 수도, 같아서 공감할 수도 있어요.”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건 기교 아닌 대상과의 교감에서
갤러리에 들어와 잔뜩 긴장해 작품을 보는 관람객이 더러 있다. 미술 지식이 부족해 ‘어떻게 봐야 하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가치관에서 관람은 시험 보기가 아니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답만 하면 돼) 식의 형태는 지양한다. 기법 또한 중요하게 이야기 되지만, 작가는 “기법이 작가의 개성을 전부 말해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림을 시작할 때 처음에 형태를 명확히 그리는 데 열중하고, 그 다음에는 기법을 연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기법이 아예 중요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교가 작가의 개성을 모두 말해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감정이 중요하죠. 수많은 감정 속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타인과 확연히 구분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 감정을 포착하라고 이야기해요. 이전에 강릉에서 강의를 하는데 학생들이 ‘서울 애들은 어떻게 그림 그려요?’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너희는 바로 설악산 밑에서 매일 그 풍경을 마주하면서 왜 서울이 궁금하냐’고 물었어요. 서울의 학생들이 보고 느끼는 것과 그 기법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너희만의 시선과 감정을 가지라는 것이었죠. 제가 늘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가 여러번 언급한 ‘교감’이 필수다. 작가는 “동양화에 물화(物化)라는 게 있다. 도가 사상의 일환으로, 타인의 입장뿐 아니라 하물며 물건의 입장이 되어 그 물건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즉 “생명이 없는 물건이라도 그 물건과 교감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물건 또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그래서 “서로 교감하고 반응할 준비가 항상 돼 있어야 한다”며 “종이와도 교감하는 작업이 필수”라고 작업 태도를 짚었다.
자유로운 방식을 추구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담는 틀, 즉 구조 실험은 꾸준히 이어왔다. 자유로운 사고방식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정작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 그래서 그가 만든 큰 틀은 층위 구조다. 화면에 선이 겹치고 겹치고 또 겹치는 층위 구조를 이루는 가운데 독특한 질감을 표현한다.
작가는 “각각의 셀로판지에 선을 긋고 이 모든 셀로판지를 한 데 포갰을 때 큰 규칙이 없다면 아예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뒤에 있는 화면에 밝게 색을 부여해 위로 끄집어내는 등의 방식으로 각 층에 큰 규칙을 부여해 다양한 형태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톤도 유지한다. 노란색이 전체적으로 깔린 화면이 있는가 하면, 붉은 톤 위주의 화면도 있다. 자유롭게 붓질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화면 밖으로 그의 감정이 뛰쳐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작가는 “붓을 잡고 30년 넘게 산수화를 그려왔지만 그릴 때마다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그래서 꾸준히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부부끼리 30년을 같이 살아도 속을 모르겠다는 말을 하잖아요? 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 때문이에요. 똑같은 사람, 풍경이라도 새로운 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보이던 대로 보이게 되죠. 감정도 획일화될 것이고요. 깊이 들어가야 안 보이던 게 보여요. 저도 지금 못 보고, 못 느끼는 게 있겠죠. 그래서 끊임없이 대상과 교감하려는 노력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