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윤기 법률 칼럼] 징벌적 손해배상, 민사소송법 개정돼야 효과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사업이사
(CNB저널 =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사업이사) 요즘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피고 측 대리인으로 수행했던 사건에서 상대방이 보낸 손해배상 소장의 내용 중 ‘징벌적 손해배상’을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소장을 보면서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원고 측이 ‘얼마나 손해 액수를 증명하기 어려우면 저런 내용을 서면에 넣었을까?’ 하는 피고 측 대리인으로서의 안도감도 있었지만, 언젠가 나도 이런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불안감도 생겼습니다.
변호사 입장에서도 우리나라 손해배상 조항은 상당이 어렵고 까다롭습니다. 특히 원고가 손해의 발생, 손해와 피해간의 인과관계, 피해액을 전부 증명해야 합니다.
우선 상대방인 피고 쪽에 중요 입증자료가 있는 경우에는 이를 법정에 끌어내기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손해와 피해의 인과관계가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그 피해액을 산정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사실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승소’ 판결이 아니라 적절히 손해를 배상받을 수 있는 ‘금액’을 받게 하는 판결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전보배상(塡補賠償)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보배상’이란 이행에 갈음하는 손해의 배상을 뜻하는 법률용어입니다. 즉 채무가 이행되었다면 채권자가 얻었을 이익의 전부를 배상하고, 이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손해배상 소송이라도 원고가 승소해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액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입니다.
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18세기 영국에서 법 위반 행위에 대한 ‘처벌’에 주안점을 두고 인정되기 시작한 제도입니다. 말 그대로 돈으로 ‘징벌(懲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같이 전보배상을 원칙으로 하는 대륙법계 국가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 장점이 부각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논의 끝에 2011년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처음 도입된 후, ‘기간제 및 단기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도 규정됐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35조에 따르면 “원사업자가 법 규정 중 기술자료 유용금지, 부당한 단가인하금지, 부당한 발주취소금지, 부당한 반품행위금지와 관련된 조항을 위반하면 손해의 3배를 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배상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법률은 처음에는 기술자료 유용행위만 규정했으나 나중에 부당한 단가인하, 부당한 발주취소, 부당한 반품행위에 대한 배상조항을 추가했습니다.
기간제 및 단기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13조 제2항도 노동위원회가 사용자의 차별적 처우에 관한 손해배상액을 정하는 경우, 손해액을 기준으로 3배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배상을 명령할 수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위 조항들을 영미법계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의 손해배상 체계를 벗어나는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위 두 가지 법 이외에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을 목표로 한 각종 법률안이 제출돼 있는 상태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이 6월 5일 서울 시민청에서 LED 촛불로 가습기 살균제 희생자 숫자인 266을 만들며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손해배상 액수를 증명하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서 우리 민사소송법은 제202조의 2에서 “손해가 발생한 사실은 인정되나 구체적인 손해의 액수를 증명하는 것이 사안의 성질상 매우 어려운 경우에 법원은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의 결과에 의하여 인정되는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금액을 손해배상 액수로 정할 수 있다”는 규정을 신설했습니다.
제도 보완할 추가 개정 이뤄져야
이 조항은 개정 이유에서 “손해발생 사실은 인정되나 구체적 손해액 산정이 어려운 사건에서 손해의 공평·타당한 분담원리를 지도 원리로 하는 손해배상 제도의 이상과 기능을 실현하고자 손해액 증명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조항은 2016년 9월 30일 시행됩니다.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이 도입된다면 이 민사소송법 규정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전면적으로 도입되기에는 많은 진통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증거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민사 소송법에서는 상대방이 제출하기 전에는 원칙적으로 이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도입된다고 해도 승소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 영미법 계통에서는 ‘디스커버리(discovery)’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증거개시’ 제도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재판이 개시되기 전에 당사자 서로가 가진 증거와 서류를 상호 공개해 쟁점을 명확히 정리하는 제도입니다.
쉽게 말하면 양쪽이 가진 증거를 모두 드러내놓고 소송 절차를 시작하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는 형사소송에서 이 증거개시 제도가 일부 도입되고 있지만, 아직 민사소송에서는 도입되고 있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증거개시 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큰 효용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여론과 법률 개정의 추이를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정리 = 안창현 기자)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사업이사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