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5호 김금영 기자⁄ 2016.08.05 13:42:45
(CNB저널 = 김금영 기자) 1888년 영국 런던. 평화롭던 이곳에서 살인 사건이 났다. 그런데 한 번으로 끝이 아니다. 매춘부들이 차례차례 살해됐지만 범인의 종적은 좀처럼 잡히지 않아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다.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섰지만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살인마를 이렇게 불렀다.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라고.
이후 네 번째 희생자 캐서린의 스카프에서 검출된 DNA를 통해 잭 더 리퍼의 정체가 이발사 아론 코스민스키였다는 주장이 2014년 새로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 잭 더 리퍼는 희대의 살인마로 각인됐다. 결국 아직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대표적인 미제 사건으로 기억된다.
잭 더 리퍼의 이야기는 다양한 콘텐츠의 소재로 쓰였다. 그 중 하나가 뮤지컬 ‘잭 더 리퍼’다. 2009년 초연된 이 작품은 체코 원작의 라이선스 뮤지컬이다. 국내에서는 왕용범 연출의 손을 거쳐 국내 관객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줄거리, 노래 등이 대부분 재창작됐다. 미해결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려는 강력계 수사관 앤더슨과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 또 한 인물이 등장한다.
부패한 수사관 앤더슨은 돈과 특종을 쫓는 기자 먼로와 뒷거래를 통해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추적한다. 하지만 좀처럼 살인마가 누구인지 그 종적조차 찾을 수 없을 때 느닷없이 "내가 범인의 정체를 안다. 그의 이름은 잭 더 리퍼"라고 주장하는 의사 다니엘이 등장한다. 다니엘은 잭 더 리퍼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글로리아를 포함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계속 저지르고 있다며, 그를 막기 위해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다니엘의 협조에도 또 다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야기는 충격적인 반전으로 흘러간다.
살인마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기에 극은 자연스레 무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뮤지컬 ‘잭 더 리퍼’는 여기에 화려한 이미지를 더해 차가움과 따뜻함의 양면성을 극대화 시킨다. 극에 등장하는 매춘부 여자들이 살해 당하기 이전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채 밝게 웃으며 춤을 춘다. 춤 또한 배우들이 숨이 찰 정도로 격렬하다. 조명도 화려하게 펼쳐지고 노래는 흥겹다. 그래서 살인이 벌어질 때 서늘한 파란 조명 아래 분위기가 상반된 무대가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너무 우울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밝지도 않게 양극을 조절하며 관람객이 지루하지 않게 극을 따라오게 한다.
끊임없이 회전하며 여러 시공간을 오가는 회전 무대도 눈길을 끈다. 뮤지컬 ‘잭 더 리퍼’는 장소의 변환이 많다. 다니엘이 잭 더 리퍼, 그리고 글로리아와 처음 만났던 과거의 시간부터 현재 영국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의 시점까지를 끊임없이 오간다. 복잡할 수 있는 이 구성을 무대가 회전하면서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한다.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현장의 양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무대다.
극 속의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
살아가는 현재 이 공간이 잔혹동화인데?
등장인물들에게도 양면성이 존재한다. 한없이 밝고 아름다우며,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희망을 꿈꿨던 글로리아는 화재 사건을 겪으면서 매우 공격적으로 변한다.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 모습은, 과거 그녀가 밝은 것 같으면서도 매춘부인 자신의 현실을 비탄하는 어두운 모습에서도 언뜻 느껴졌던 바다.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 이 어두웠던 본성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다니엘은 장기이식을 연구하는 의사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장기이식을 연구하는 중이다. 그는 어떤 어두움에도 침식당하지 않고 깨끗한 마음을 지킬 것만 같다. 하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장기를 얻기 위한 뒷거래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글로리아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자 그도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어쩌면 본래 있었지만 미처 자신이 알아채지 못했던 내면의 또 다른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극의 시대적 배경은 1888년이지만 이런 다니엘과 글로리아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사람의 양면성은 현 시대에도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주제다.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자신이라는 가면을 쓴 현대인의 이야기. 그리고 이 양면성 속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 사건도 바로 현 시대의 일들이다. 떨어지는 성적을 다그치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다음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등교한 학생, 평소엔 조용했다가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서 무차별로 칼을 휘두른 남자 등 이 현실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 벌어지는 요즘이다.
극 속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잭 더 리퍼의 이야기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의 사이코패스와 연결된다. 관객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보러 뮤지컬 공연장을 찾지만, 공연을 보면서 점차 무대 위와 자신의 현실 사이에 맞닿는 지점이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이 공연은 참 흥미롭고 유쾌하기도 하지만, 또 처절하고 비극적이며 씁쓸하기도 하다. 잔혹동화 속을 살아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배우 엄기준, 김예원, 박성환, 테이, 김대종의 열연은 이 처절한 현실을 더욱 가슴에 다가오게 한다. 베테랑 배우 엄기준은 다니엘 역할을 마치 실제 자신인 듯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뮤지컬계 신예 김예원은 안정된 가창력과 연기, 그리고 역할에 맞는 사랑스러운 비주얼로 소화한다.
박성환은 처음엔 비열했다가 충격적인 사건의 진실을 마주하고 방황하는 수사관 앤더슨을 보여주고, 처음부터 끝까지 특종과 돈에 눈이 먼 김대종의 먼로는 비열하지만 가장 현실적이기도 하다. 가수로 데뷔해 이젠 뮤지컬 배우로서 계속 입지를 다지는 중인 테이의 잭 더 리퍼는 섬뜩하지만 섹시한 매력이 있다.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음까지 원만히 소화한다. 공연은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10월 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