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만난 가족 도로시의 모습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 옆에서 이혜영이 포즈를 취했다.(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2015년. 가수, 배우로 불렸던 이혜영에게 새로운 타이틀이 붙었다. 바로 화가. 본인의 이름을 내세운 ‘이혜영: 상처와 고통의 시간들이 나에게 준 선물’전을 통해 힘든 시간마다 자신에게 힘이 돼준 그림들을 전시했다. 다채로운 색감과 솔직한 감정이 묻어나는 작품들로 눈길을 끌었다.
그저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싶은 이벤트성 전시였을까? 두 번째 개인전 ‘뮤즈 오브 더 윈드(Muse of the Wind)’로 돌아온 그녀를 보면 그 이야기는 접어둬야 할 것 같다. 첫 전시에서 아픔과 상처를 이야기했다면, 이번엔 그 아픔을 딛고 희망을 좀 더 바라보려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 결코 일회성 전시가 아니라 꾸준히 작업 열정을 불태우겠다는 의지도 가득하다.
“첫 전시 때 선보인 그림들 중 제가 마음이 너무 아플 때 그린 것들이 많았어요. 아버지가 많이 아팠고, 제 반려견을 넘어서 딸이라고 할 수 있는 도로시도 아팠죠. 곧 죽음이 닥칠 듯한 슬픈 예감이 저를 한없이 무너지게 했어요. 그때 그림을 그리면서 버텼죠.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갑자기 그림을 그린 건지 궁금해 하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꿈도 화가였고요. 하지만 방송 쪽 길을 가게 되면서 제 그림을 보여줄 기회도, 많이 그릴 시간도 없었죠. 그러다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니 하루에 10시간 넘게 앉아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몰두했어요.”
▲이혜영의 두 번째 개인전 '뮤즈 오브 더 윈드'가 열리는 전시장 외부. 건물 외벽에 그물로 덮였고, 여기에 바람개비가 설치됐다.(사진=김금영 기자)
근래 5년 동안 그린 작품들은 거의 200점에 다다른다. 작품 수가 점점 늘어나다보니 이사도 해야 했다. 처음엔 집안 자그마한 방을 작업실 공간으로 이용하다가, 이 또한 가득 차자 이젠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이혜영만의 공간이다. 이 공간을 위해 가족들도 그녀의 열정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해줬다. 남편은 이혜영의 그림을 본 뒤 국내외 전시 여기저기에 이혜영을 데리고 가 많은 전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혜영은 “남편 덕분에 루브르 박물관도 몇 년 전에야 처음 가봤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처음에 “어설프다”며 이혜영의 그림을 보며 웃었던 딸이 이제는 손가락을 치켜세운다고.
이렇게 가족의 따뜻한 원조 속 자신의 작업 공간에서 그리던 그림이 세상에 공개됐다. 그녀의 작품을 본 미술 관계자들이 흥미를 보였고, 이혜영 또한 자신에게 힘이 돼줬던 소중한 그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 제안에 응했다. 첫 전시 타이틀이 괜히 이혜영인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의 가장 아팠던 경험을 털어 놓으며, 관람객들에게 손을 내민 것.
마음속 간절한 바람(hope)이
솔솔 불어오는 바람(wind)에 담긴 전시
▲구관 건물에는 이혜영이 첫 전시 '이혜영: 상처와 고통의 시간들이 나에게 준 선물'에서 선보였던 구작 위주로 작품이 구성됐다.(사진=김금영 기자)
첫 전시 때 “나는 이렇게 아팠어, 너는 괜찮니?”라고 이야기를 건넸다면, 두 번째 전시에서는 “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싶어, 네 꿈은 뭐야?”라고 이야기를 건네는 모양새다. 타이틀인 ‘뮤즈 오브 더 윈드’에서 바람엔 여러 의미가 있다. 실제로 솔솔 부는 바람(wind)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람(hope)이기도 하다.
“전시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바람 이야기가 나왔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도 맞닿는 부분이 많았죠. 더운 여름 날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잠시나마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 줘요. 기분도 좋고요.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 소망, 즉 간절한 바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아져요. 저는 그 따뜻한 느낌이 정말 좋아요. 이 따뜻함을 함께 느끼고 싶었어요.”
이 콘셉트에 맞춰서 전시 공간이 꾸려졌다. 일단 화랑 건물 외벽 전체에 흰색 그물이 걸렸다. 여기에 바람개비가 달려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날갯짓을 하는 듯 회전한다. 꼭 전시장을 하늘로 데려갈 것 같은 느낌이다.
▲신관 건물 1층. 부부리가 주인공인 '바람의 뮤즈'가 눈길을 끈다. 뒤에 이번 전시를 위해 그린 신작들도 전시됐다.(사진=김금영 기자)
구관 건물엔 이전 전시에서 주로 선보였던 작품들을 전시했고, 신관 1~2층엔 신작 위주로 작품을 구성했다. 특히 2층의 공간엔 정원 분위기를 조성해 눈길을 끈다. 인공 잔디를 바닥에 깔고 전시 공간에 음악이 아닌 곤충과 새소리가 들린다. 의자도 마련됐는데 여기에 앉으면 진짜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이혜영의 삶이 오롯이 느껴지기도 하는 공간이다.
인기 스타 부부리도 다시 등장한다. 이혜영의 작업에 영감을 주는 존재로, 첫 전시 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아버지와 도로시가 세상을 떠나고 이혜영에게 새로운 가족으로 온 반려견이다. 이혜영은 부부리를 딸이라 부른다. SNS에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 사진에는 항상 이혜영의 곁을 맴도는 부부리의 모습이 보인다. 힘든 시기 이혜영의 곁을 지켜주고, 그림에 대한 열정을 더욱 불태울 수 있도록 도와준 존재다.
‘바람의 뮤즈’에서는 비너스로 탄생한 부부리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바람의 뮤즈’는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바라보는 여성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은 생각 속 떠오른 ‘비너스의 탄생’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비너스의 모습을 부부리로 대체해 재미있게 연출된 작품이다. 기존 화랑에 설치돼 있던 쿠사마 야요이 조형물의 옆에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부부리의 조각상이 걸렸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쿠사마 야요이 작업에 대한 존경심을 표함과 동시에, 기존 조형물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머리를 모았다.
설치 및 조각 작업에 첫 도전
프리다 칼로 떠나보내며 이혜영 그림 그리기도
▲신관 건물 2층은 정원을 방문한 듯한 콘셉트다. 바닥에 인조 잔디가 깔렸고, 곤충과 새소리가 전시장에 울려퍼진다.(사진=김금영 기자)
이처럼 이혜영은 이번 전시 때 기존 많이 선보인 그림 외에 조각과 설치 작업에 도전해 눈길을 끈다. 갤러리 외부 설치작 및 내부 연출과 영상 제작은 5명으로 구성된 펀더맨탈 크리에이티브 그룹과 협업했고, 조각상은 신동호 신인 조각가와 협업했다.
“그림 뿐 아니라 설치 작업에도 정말 관심이 많았어요. 신동호 작가는 화랑 측에서 소개를 받았는데, 조각상의 아이디어부터 구현 작업까지 함께 했어요. 정말 흥미진진한 작업이었어요. 펀더맨탈 그룹은 원래 알던 사이였어요. 설치 작업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들어보니 재미있겠다며 같이 해보자고 흔쾌히 응해줬죠. 설치 작업에 대한 욕망은 항상 있어요. 앞으로도 좋은 기회가 닿으면 꾸준히 도전하고 싶어요.”
이혜영이 영원히 마음속에 품을 도로시도 이번 전시에 등장한다. 이혜영은 도로시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간신히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전시장 1층 다채로운 빛깔로 표현된 작품 ‘꿈속의 도로시’가 있다. 꿈속에서 만났던 도로시를 표현한 작품이다.
▲기존 화랑에 설치된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오른쪽) 옆에 날개를 단 부부리의 조각상이 함께 전시됐다.(사진=김금영 기자)
“도로시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동안 단 한 번도 꿈에 나오지 않다가 드디어 나타난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하늘에 두둥실 떠 있어서 만질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더니 영롱한 색을 띠면서 하늘로 날아갔어요. 아침에 눈을 떠서 바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화면에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을 보고 저도 ‘그림을 안 배워서 못해’ ‘예술은 나 같은 사람이 못하는 거야’ 등의 핑계를 대지 말고 일단 시작부터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붓도 없이 손으로 막 마음 가는대로 화면에 그렸어요. 손톱에 물감을 찍기도, 물감이 저절로 흘러내리게 하기도, 손바닥으로 마구 화면을 휘젓기도 했죠. 그렇게 탄생한 이 그림을 저만 좋아할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따뜻하다는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자신에게 행복을 줬던 도로시가 떠나면서 아픔도 줬지만 이혜영은 도로시가 이젠 아프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그림을 그렸다. 그 바람의 기운이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들어준 것은 아닐까.
이혜영은 자신이 ‘미술 문외한’이라 고백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특별한 기술을 배워야 할까 고민을 하기도 하다가 스스로 정보를 찾아 물감을 조합하면서 나름의 방식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다가 물감을 확 잘못 쏟거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혜영은 이때 “이건 사인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식이다. 의도치 않은 방향대로 흘러가도 여기서 또 새로운 희열을 느끼는 것. 첫 시작의 발판이 된 프리다 칼로도 이젠 떠나보냈다. 정말 좋아하는 작업이지만, 따라 그리기 식이 아니라 이혜영식의 그림을 그려보자는 포부가 섰다. 제대로 배우면 기술적으로 더 잘 그릴 수는 있었겠지만, 원하는 대로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단다.
미술계 시선? 그림 보러 와주는 관람객 발걸음이 더 소중
“이혜영도 하는데 나도 못하겠냐” 이혜영식 응원
▲이혜영, '부부리와 나의 가족(Bubulee and My Family)'. 캔버스에 오일, 117 x 117cm. 2013.
쏟아지는 시선에도 두려움이 없다. ‘아트테이너’(아트+엔터테이너의 합성어로 그림을 그리는 연예인을 보통 칭함)의 작업에는 세간의 관심이 쏠린다. 유명세를 이용해 그림 값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지적이 있기도 하고, 기존 미술인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혜영 또한 첫 전시 때 많은 관심을 받았다. 유명 디자인과의 컬래버레이션도 많이 해온 그였기에 호기심의 시선과 동시에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혜영은 “솔직히 미술계의 시선이 내게 중요하지 않다”는 돌직구를 날렸다.
“첫 전시 때 높은 언덕 위에 있는 공간에서 전시를 했었는데 높은 하이힐을 신은 어떤 관람객이 힘들게 언덕을 올라와서 제 작품을 보고 또 힘들게 언덕을 내려갔었어요. 또 지방에서 올라와서 작품을 본 학생들도 있었고요. 저는 미술계에 대해 잘 몰라요. 미술계의 권위자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하죠. 그런데 저는 제 그림을 보기 위해 그렇게 애써서 와준 관람객 한 분 한 분이 더 소중해요. 팔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들과 그림을 통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제겐 의미 있어요.”
▲이혜영, '올라잇, 올라잇(All Right, All Right)'. 캔버스에 오일, 91 x 73cm. 2013.
이처럼 시선은 중요하지 않지만 대표적인 아트테이너가 되고 싶다는 꿈은 있다. 유명세나 이미지가 중요해서가 아니다. “이혜영처럼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란다. 본인이 고백했듯 미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지만 꾸준한 열정으로 차근차근 사람들과 소통하려 다가서는 중이다.
“제 전시를 보고 ‘이혜영 그림 안 배웠는데 그래도 열심히 그림 그리네? 안 배워도 열정적으로 그림 그리는 거 부럽지 않니, 우리도 그냥 하고 싶은 거 다시 시작해볼까’ 하고 생각해볼 여지가 0.0000001%라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사람들에게 그런 도전 의식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어요. 지금은 막연한 바람이라서 이뤄질 수 있을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럼에도 꿈꾸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잖아요?”
이혜영이 “네 꿈은 무엇이니?” 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제 관람객이 답할 차례다. 전시는 진화랑에서 9월 30일까지.
▲이혜영, '스카프를 훔친 부부리'. 캔버스에 아크릴릭, 120 x 120cm.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