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이게 갤러리인가 재활용 분리수거의 현장인가 싶다. 자동차 엔진필터부터 튜브, 냉각기, 라디에이터, 터진 포탄탄피, 보일러 점화장치, 녹슨 수도파이프까지. 사용 용도를 다한 산업 잉여물들이 공간을 떡하니 채운다.
그런데 각 개체는 스피커를 장착한 채 독특한 소리를 낸다. 그리고 동시에 6대의 소형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통해 인간이 벌인 황폐한 전쟁과 사건 이미지가 무한 반복 재생된다. 묘한 현장이다.
그리고갤러리가 산업 잉여물을 예술품으로 재탄생시키며 인류사를 이야기하는 정하응 작가의 개인전 '어떤 신호들'을 10월 7일~11월 3일 연다.
어둡고 좁은 밀실에 설치된 지구본 오브제 위로는 칼 세이건의 비디오가 상영된다. 비디오는 '단 하나의 지구를 위하여' 에피소드를 다룬다. 핵무기 경쟁이라는 광란에 직면한 지구에 우주적인 관점이 절실하다는 TV선언이 화면에 나온다. 그리고 전시장 중앙 벽면은 투사된 신문 스크랩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전시장 바닥의 오브제들과 반복되는 영상, 그리고 투사된 이미지까지 각각은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 같다. 작가는 이 각각의 존재들을 교차시키면서 연속된 한 순간으로 잇는다.
작가는 처음엔 소리를 수집하는 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녹음기라는 미디어에 한정된 작업에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라디오의 주파수 소리나 생방송 뉴스 같은 소리를 첨가하는 등 현실감 있는 현재의 소리들을 구현하는 데 관심이 확장됐다. 나중엔 아예 현장 주변에서 수집한 사물들까지 사용했다. 일종의 신호를 전달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소재들을 택했고, 그 결과 자동차 배기관, 파이프 등이 손에 잡혔다.
그리고 그 소리들의 중심엔 사회가 있었다. 특히 작가는 보스니아가 내전을 겪을 당시 참혹한 전쟁 속 한 관현악단이 잔해더미로 가득 찬 극장에서 오케스트라연주를 한다는 기사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쟁과 사고를 겪은 공간의 잔해와 파편, 그리고 그곳의 현장을 담고 있는 소리들은 작가의 손을 통해 한자리에 모였고, 그 현장을 전시장에 재현해 냈다. 온전히 그 현장을 가져올 수는 없지만 소리와 이미지를 통해 관람객들은 현장 감각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작가는 특히 현대문명이 폐허가 된 현장에 주목한다. 전쟁과 파괴는 허무함을 가져온다. 이 가운데 이 시대의 현장을 살아가는 한 사람, 그리고 작가로서 반성과 회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선택과 태도를 취해야 할지 물음을 스스로 되뇌며 작업으로 풀어간다.
그리고갤러리 측은 "정하응은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산업 잉여물을 모으고 전쟁과 사건, 사고의 이미지와 자료를 수집하고 소리를 제작했다. 그 안에서 이뤄진 작품이라는 개념을 찢고 분해하고 조립했다"며 "그 찢는 행위가 마침내 중단된 전시장 안에는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조각의 형태를 한 오브제와 그 오브제 안에서 선명하게 울리는 특별한 소리들이 남았다. 이번 전시에서 그 소리들에 귀 기울여 보길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