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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맞춰 독서 ③] 한국 국정교과서와, 일본 ‘와사비 테러’가 한통속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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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05호 최영태 편집국장⁄ 2016.10.14 10:33:53

일본의 친절 서비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요. 그런 일본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와사비 테러’가 일어났다고 시끄러웠습니다. 인기 스시집 종업원들이 한국인 고객이 오면 ‘개가 왔다’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거나, 야구공만한 와사비 덩어리를 던지듯 내밀고, 스시 속에는 평균보다 훨씬 많은 와사비를 넣어 한국 고객을 괴롭혔다는 얘기지요. 

‘서비스의 일본’이라는 명성이 무색한 일입니다. 한국인 고객이 안 오면 스시집에 손해가 올 텐데도 종업원들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일본의 잘못된 역사 교육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에 ‘국사 국정교과서’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KBS격인 NHK TV가 하는 양을 보노라면, “이 나라는 국정 국사교과서가 있는 것처럼 노는구먼”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이지의 영광’을 잊지 않는 건 일본 맘대로지만, 
또다시 한반도를 희생양 삼아 영광을 재현하고 싶다고?

NHK가 ‘국민’ 교육을 위해 한 최근 행동 중에는 2009~2011년 장장 3년간 방영한 글자 그대로 대하(大河)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이 있습니다. 2009년은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메이지유신이 마무리되어 메이지 천황이 헌법을 국민에게 ‘하사’한 1889년으로부터 12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 헌법 하사 이후 6년 만에 일본은 아시아의 역대 최강국 청나라를 굴복시켰고(청일전쟁), 16년 뒤에는 당시 영국과 함께 세계쟁패에 나섰던 초강대국 러시아마저 꺾어버렸으니(러일전쟁), 일본인들 생각에 메이지천황 등극(1867년) → 헌법 하사로 근대 국민국가 완성(1889년) → 청일전쟁 승리(1895년) → 러일전쟁 승리(1905년) → 조선 병합(1910년)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는, 일본이 쭉쭉 커나가는 청년기요, 유사 이래 일본이 가장 강건했던 시기로 기억하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 시기를 ‘메이지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NHK 대하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의 포스터.

메이지의 영광 중에서도 특히 러일전쟁은 일본인들이 절대로 잊지 못하는 대사건입니다. ‘바다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대영제국’을 육지를 통해 견제할 수 있는(러시아의 육지는 유럽부터 극동아시아까지 이어지므로) 유일한 나라로서 영국과 경쟁하던 당시 초강대국 러시아에 듣도 보도 못하던 작은 섬나라가 시비를 건 끝에 승리까지 거뒀다니, 당시 세계 모두가 놀랄 만 했습니다. 

일본을 혼내주려 했던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러일전쟁의 결과를 보고 친일파가 됐고, 이어서 측근인 윌리엄 태프트를 도쿄에 보내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는 유명한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었다고 일본 연구 전문가 김시덕 박사는 말합니다.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승리에 감탄한 사람들은 동-남 아시아에도 많았습니다. 버마 독립의 영우 아웅산과 네윈, 인도네시아의 루비스 등이 일본군이 만든 동남아 민족부대 출신이며, 이들은 ‘일본과의 협력만이 서양 열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도라 생각했다’고 만주 전문 연구가 한석정 교수는 저서 ‘만주 모던’에서 밝혔습니다. 

러일전쟁의 결과에 ‘맛이 간’ 것은 조선도 마찬가지지요. 러일전쟁 당시 무적의 러시아 발틱함대가 어서 동해로 와 일본의 연합함대를 격파해 주기를 학수고대하던 인물 중에는 조선왕 고종도 있었다고 합니다(와다 하루키 저 ‘한일 100년사’ 52쪽). 그러나 발틱 함대가 대패를 당하자 결국 고종을 포함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무릎이 풀썩 꺾이면서 결국 일본에 나라를 갖다 바치는 길로 나가게 됐다는 소리입니다.

‘메이지의 영광’이 너무나 대단하기에, 쇠락해가는 21세기의 일본에 새 기풍을 불어넣기 위해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 나오는 러일전쟁의 영웅들을 TV 화면에 3년씩이나 등장시키겠다는 게 NHK의 원대한 기획이었지요. 

원작자는 끝까지 영상화 반대했지만, 
NHK는 끝내 드라마화에 성공하기까지

그러나 정작 원작자 시바는 살아생전에 이 소설의 영상화를 “전쟁 찬양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일본인이 사랑하는 소설가 시바의 역사관-조선관은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지만, 시바는 조선 도공의 후예 심수관으로부터 오랜 시간 이야기를 듣고 ‘고향을 잊기 어려운 계절’이라는 소설을 쓰는 등 조선 관련 정보를 접하면서 러일전쟁을 찬양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 자신의 신문 연재소설 ‘언덕 위의 구름’(1968~1972년 산케이신문 연재)을, 일본 연합함대의 러시아 발틱 함대에 대한 승리 직후 돌연 끝내버린다고 와다 하루키는 진단합니다. “시바가 일종의 구상의 파산을 느꼈기 때문일 것”(‘한일 100년사’ 55쪽)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끈질긴 NHK는 시바의 저작권을 상속받은 부인을 설득한 끝에 2002년 마침내 드라마화 허락을 받고 장장 3년간 저녁 8시 황금시간대에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러일전쟁 승전 스토리를 일본인의 가슴에 박아 넣으려 든 것이지요.

러일전쟁의 승리에 대해 대개의 일본인이나 학자들은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하지만, 일본의 양심적 철학자 츠루미 슌스케는 “러일전쟁 후 정부는 지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는 전쟁을 ‘대승리’라 칭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긴 게 아니라 가까스로 지지 않았을 뿐인 전쟁에 일본인과 세계인이 열광했다는 진단입니다. 

사실 당시 러시아는 혁명 전야로서, 지배층과 혁명파가 대립 중이었고, 서부전선에서 독일 등 유럽의 열강을 경계해야 했으므로, 멀고도 먼 극동까지 대군을 파견하기에는 힘에 부친 측면이 있었습니다.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을 보면, 일본군이 정말로 간고의 노력 끝에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하긴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국내 사정이 혁명 전야였고, 또한 너무나 먼 극동 지역에서의 전투인지라 러시아가 빠른 전쟁 종결을 원했을 뿐, 러시아와 일본이 전면전을 치른 건 아니라는 해석이지요.

그러나 이런 진단이야 어떻든, ‘악독한 서양’이 아시아 전체를 잡아먹으려는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아시아의 선한 리더’ 일본이 초강대국 러시아를 물리쳤다니, 사정을 잘 모르는 아시아 사람들,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에 시달리는 세계 여러 곳의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이 양손을 들어 환영할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아시아주의’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일본의 주장, 즉 일본이 리더가 돼 아시아 전체의 식민지화를 막겠다는 구호에 대해, 미국 듀크대의 프래신지트 두아라 교수(중국사 전공, 원래 출생은 인도)는 저서 ‘주권과 순수성 -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에서 “아시아인의 단결과 일본의 영도라는 모순된 요소를 갖고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아시아를 지켜주겠다는 오모테(表 = 겉모습) 아래 아시아를 혼자 집어삼키겠다는 혼네(本音=진짜 속마음)를 감추고 있었으니, 표리가 부동한 모순이라는 지적이지요.     

‘가까스로 지지 않았을 뿐’인 전쟁에 
일본인과 세계인과 일부 조선인이 열광 

문제는, 이겼든 아니면 지지 않았든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특히 일본군 상층부에서는 이상한 정신적 특징이 나타납니다. 러일전쟁 승리라는 혼이 나갈 정도의 놀라운 대박 경험을 한 일본 군부는 이후 ‘물리력과는 상관없이 정신력만 충분하면, 즉 일본의 무사도 정신으로 임하면 백전백승’이라는 이상한 전쟁관을 갖게 됩니다. 이를 야마무로 신이치 교수는 저서 ‘러일전쟁의 세기’에서 “무기의 좋고 나쁨보다도 무기를 가진 자의 정신에 관계되어 있음이 강조된 것처럼 러일전쟁 후에 나타나는 정신적 특징을 보여 줬다”(261쪽)고 설명합니다. 

이런 광증이 결국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지나, 영국에 싸움을 거는 동남아시아 싱가포르-말레이시아-미얀마 침공, 그리고 급기야는 영국에 이어 세계 패권을 장악한 미국에 먼저 싸움을 거는 태평양전쟁으로 뻗어나가다가는 1945년 원자폭탄 투하라는 인류사의 대비극을 겪고 나서야 쇼와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는 패망의 끝을 향해 달려 나가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 연구가 중 한 사람인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가 볼 때, 일본이 미국의 흉내를 내 조선의 개국을 강요한 강화도사건(1875년)부터 시작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과 그리고 패전에 이르기까지 장장 70년 동안 일본은 끊임없이 거짓과 사기(1875년 강화도에 치밀한 계획 아래 쳐들어가 놓고는, ‘일본 군함 운요호가 물을 얻으러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국제법에 무지한 조선군이 대포와 총을 마구 쏴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강화도를 공격해 점령했다’는 거짓보고를 세계 여러 나라에 보내는 등)로 일관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메이지의 일본은 정의로웠는데, 쇼와 후반기의 일본은 이상했다’는 정말 이상한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나카츠카 아키라는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 - 그의 조선관과 메이지 영광론을 묻다’라는 재밌는 책에서, 일본에 뿌리내린 이런 잘못된 역사관을 문제 삼습니다. 일본의 국민작가 격이었던 시바 료타로는 생전에 “전전(戰前: 1945년 이전)의 쇼와는 매우 싫다, 그러나 메이지는 매우 좋다”고 말했습니다. 메이지의 영광은 너무 좋지만, 쇼와 천황 시대(1926~1989년)의 후반기, 특히 관동군의 계략으로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만주사변(1931년)부터 일본 패전(1945년)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아주 싫다는 말이지요. 

한국인 입장에서 볼 때는 강화도사건부터 원폭투하까지의 70년간 일본은 한 길을 달려왔습니다. 스스로 근대국민국가로 일어선다는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이웃나라 조선을 잡아먹고 중국인들을 학살하며 괴롭히다가 패망한 역사였죠. 헌데, 대부분의 일본인은 ‘강화도사건부터 만주사변 이전까지는 영광스러웠는데, 만주사변 이후 패전까지(70년의 침략 기간 중 이 기간만 쏙 뽑아내 일본인들은 '15년 전쟁'이라고 부르지요)는 치욕스럽다’는 이상한 기억을 하도록 NHK 등으로부터 교육받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이런 일본인의 상식이 있기에, 맨앞에서 얘기했던 것 같은 식당 종업원의 한국인 고객에 대한 ‘와사비 테러’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무시받을 만한 기록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조선의 후예로서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흔히 한반도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한반도를 ‘중국과 맞서 싸운 땅’으로만 곧잘 기억합니다. 이런 식이죠. 전설 속의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숙적 신라에 쳐들어가 굴복시키고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한반도에 설치해 통치했고(학술적으로 완전 창작임이 대부분 드러났지만, 많은 일본인이 아직도 믿고 있는 전설) → 백제 멸망 시기엔 백제군을 도와 초강대국 당나라 군을 백강 전투(663년)에서 맞아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고 → 임진왜란 당시 망한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를 마침내 2차 평양성 전투(1592년)에서 처음으로 꺾었고(일본인이 생각하기에 백강전투 이후 1천년 만에 중국에 대한 일본의 사상 첫 승리이자 설욕전이 되는) → 청일전쟁에서의 승리(1895년, 임진왜란 이후 300년만의 중국에 대한 또 한 번의 승리)로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지금 일본 우익은, 미국의 힘을 빌려 중국에 대항하고, 그래서 다가올 중국과의 4차 전쟁에서도 이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미일한 군사동맹이니, 집단적자위권 보장이니, 사드배치니 하는 게 다 이런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야 전설이라 쳐도, 임진왜란 때 멸망 직전까지 갔던 조선이 300년 뒤에 또 다시 똑같은 꼴로 일본에 또 도륙당하고 결국 나라를 갖다 바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이르러서는, 그리고 독립-해방 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정치에서는 친일파가 문제가 되면서 자체 반목만 일삼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투명 나라’ 취급하도록 우리가 잘못한 점이 분명 있다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제2차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이 명군을 무찌르는 모습을 그린 그림. 당시 전투는 조선-청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졌는데, 그림에는 조선 군의 존재는 '투명인간'으로 처리되고 있다. 한반도를 일본 세력권 안의 '투명 나라' 취급하는 버릇은 일본의 오랜 전통이 되고 있다.



일본이 한반도를 '투명나라’ 취급하게 만든 데는 
한반도 사람에게도 책임있다
 
그러나 이런 자책과 함께, ‘와사비 테러’를 보면서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일본은 ‘메이지의 영광’으로부터 시작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멋진 최근세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반면 한국은 역사책을 읽으면 열폭하게 되는, ‘아름답지 못한 구석이 너무나 많은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웃나라에는 모두 역사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삽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새역모(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가 생겨 자기들 생각에 ‘아름다운 일본 역사’를 자랑하는 역사 교과서를 만들었고, 한국에서는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관이 생겨 패배주의-종북의 오염을 뺀 ‘아름다운 한국 역사 교과서’를 만들고야 말겠다며 국사 국정교과서가 현재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잘난 역사를 갖고 있는 일본과, 못난 역사를 많이 갖고 있는 한국이 경쟁하면, 과거가 잘난 일본이, 비록 부도는 났지만 과거에 대성해서 밑돈이 더 많은 일본이, 역사-문화에 프라이드를 가진 일본이, 역사를 부끄러워하기 쉬운 한국인에게 당연히, 100% 이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세사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느냐가 두 나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최근세사의 출발점으로 일본인들은 흔히 메이지유신과 그에 이어진 ‘메이지의 영광’을 추억합니다. 다시 그 시기와 같은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베 신조 총리의 꿈이며, 국영방송 NHK가 ‘언덕 위의 구름’을 특별방송 하는 게 다 그런 흐름입니다. 

▲신라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정벌의 주인공 진구황후(위)와 그녀의 신하 다케우지노 스쿠네(아래)가 한반도를 뒤덮은 모양을 그린 그림. 타케우지노 스쿠네는 '200년이 넘도록' 관직에 있으며 신라 정벌 등에 공을 세웠다는 게 고대 일본의 기록이니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지만, 많은 일본인이 이를 믿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반면, 논자마다 관점은 다르겠지만 저는 한국사의 최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동학농민운동을 꼽고 싶습니다. 동학농민군은 당시 양반 지배층에 의해 폭도로 규정되고, 이들 지배층이 불러들인 일본군에 의해 우금치에서 피가 강이 되는 처절한 패배를 맛봤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있었기에 그 뒤 3.1운동, 상해임시정부, 4.19, 6월항쟁,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 흐름이 이어지면서 오늘날 아시아에서 민주화가 가장 앞섰고, 2차대전 당시의 식민지에서 독립해 선진국 반열에 바짝 접근한 세계 유일의 나라로 꼽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러일전쟁에서 시작되는 ‘메이지의 영광’의 길은, 아무리 일본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한다 해도, 결국 원폭투하로 연결되는 잘못된 노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 같은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안타까움입니다. 반면 동학농민운동의 진보성을 오늘날 되살린다면 국민 개개인에게 더 공평하게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올바른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동군의 계략에 질질 끌려 아시아 전역과 태평양을 피로 물들인 전쟁에 끌려들어간 일본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민중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했기에 21세기 오늘날에도 아베 총리 등 극우파가 이끄는 ‘잘못된 길’로 속절없이 끌려가는 측면이 있지만, 실패했지만 그래도 동학농민운동이라는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한민족은 그래도 올바른 길이 뭔지는 알고 있다는(현실은 비록 실패와 혼돈 투성이지만) 점에서 위안을 얻어봅니다.

젊어서 너무 대박 경험했기에 늙어서도 정신 못차리는 
‘초년 성공의 덫’이랄까? 

이런 비유도 가능하겠지요. 40대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20대 초반에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대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그 성공의 아주 초반에 이웃집을 괴롭히고 그 집에서 훔쳐 나온 황금이 종자돈이 됐다는 걸 이 사람은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대성공 끝에 또한 실패 또한 세계가 놀랄 정도로 크게 낸 이 사람은, 원래 재주가 좋고 또 몰래 모아놓은 자금도 빵빵해 옛날 방식으로 한 번 더 세계적 대박을 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물론 두 번째 대박을 치려면 당연히 옆집을 한 번 더 짓밟아야 합니다. 그게 가장 확실한 대박의 비결이라는 게 과거의 경험으로 증명돼 있으니까요. 과거의 성공이 너무나 대단했기에, 이번에는 주변 이웃들이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과거와는 달리 이웃집들도 단단히 근육을 키워놨다는 것을 이 사람은 깜빡깜빡 잊습니다. ‘초년 대성공의 덫’이라고나 할까요…?

반면, 옆집 사람은 40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초대형 성공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럭저럭 먹고는 살지만, 이날 이때까지 온갖 행패와 수난을 당해왔으며, 특히 옆집에게 몇 번이나 두들겨 맞고 황금을 빼앗긴 아픈 기억을 생생하게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이래도 이 사람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온 일을 줄곧 해왔고, 그 과정에서 많이 얻어터지기도 했지만 지금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묵묵히 참아내며 해내고 있습니다. 

▲일본의 '새역모'가 만든 역사 교과서의 표지. 역사에 분칠을 하고 왜곡을 하겠다는 이런 시도를, 한국에서 정부가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분칠을 해도 '백투더 퓨처'로 과거에 돌아가 역사적 사실 자체를 없애기 전에는 절대로 역사적 사실은 없어지지 않으니 이런 노력은 그저 스스로를 추악스럽게 만들 뿐이지요.

두 집 중 어느 집이 앞으로 더 크게 될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악하다고 망하는 것도, 선하다고 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디테일 속에 숨어 있는 악마’를 보지 못하고 패망이 예정돼 있음을 경험한 길을 다시 한 번 더 걸으려는 사람보다는,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길을 비칠대면서라도 걸어가는 사람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역사에 대한 치장(=왜곡)에 대해서는 2013년에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내서 공분의 대상이 됐던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그는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뛰어난 일본 철학자(일본 국내보다는 미국 등지에서 먼저 이 사람의 저작에 주목하고 영어로 번역되면서, 한국 문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를 보면서 ‘사이에 서는 일의 치열한 아름다움을 그에게서 본 이후로 나는 사이에 서는 고독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상처는 부정하거나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끌어안는 쪽이, 상처받은 이를 훨씬 강인하게 만들고 남의 상처에도 민감하게 만들어주는 법이다. 안 보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고 보면서도 초연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가는 것만이 진정한 상처의 극복이다.(‘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44쪽)
 
역사의 상처를 부정하거나 잊어버리려 하는 쪽은 누구이고, 내 상처를 끌어안기 때문에 남의 상처에도 마음이 짠해질 수 있는 쪽은 누구인가요? 상처를 부정하거나 잊어버리려고 역사에 분칠-왜곡질을 하는 마음 약한 사람보다는, 내 상처와 남의 상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초연의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는 그럴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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