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0호 김금영 기자⁄ 2016.11.18 09:44:13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영화 ‘메멘토’ 속 주인공은 자신의 몸에 늘 문신을 한다.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는, 늘 만나는 사람과 벌어지는 일들을 기억하기 위해 처음엔 단서를 사진으로 남기고 메모를 하다가, 나중에는 심지어 자신의 몸에 문신까지 하며 기억을 더듬는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늘 기억은 상황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며 새로운 잔상을 남긴다. 그런데 이 모든 잔상들이 가짜라고만 할 수 있을까? 하나의 기억을 따라 생긴 잔상 또한 이 기억의 일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하린 작가는 어떤 존재, 그리고 그 하나의 존재에 드리워진 여러가지 잔상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으로 풀어낸다. 이 이야기를 푸는 매체는 꽃이다. 그의 화면에는 다양한 꽃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냥 예쁜 꽃이 등장하고 끝이 아니다. 꽃에는 빛이 쏟아진다. 그리고 이 빛으로 인해 꽃의 그림자가 생긴다. 빛의 세기에 따라 흐릿했다가 진해지는 등 그림자는 계속 변한다.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는 기억의 잔상과 닮은꼴이다. 빛, 꽃, 그리고 꽃의 잔상으로서 등장한 그림자. 작가는 이 세 가지 모두를 통해 꽃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저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고, 호기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니 자연이 보였죠. 자연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았는데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또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곤 해요. 그 신비함에 절로 눈길이 갔어요. 초반에는 이 자연의 모습 중 나무를 주로 많이 그렸어요.”
처음에 눈길을 사로잡은 건 자연의 외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느낌을 마주했다. 늘 하던 대로 주변의 나무들을 관찰하러 돌아다니다 남산을 걸어 올라가게 됐다. 유독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날 평소 보던 나무가 다른 느낌이었다.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대에 빛과 그림자가 뒤섞이고 여기에 공기의 흐름도 느껴지면서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 느낌은 정말 평온했고, 마치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을 다시 맛보고 싶어 비슷한 시간대에 그곳을 다시 찾아가 봤지만, 그때 느낀 것을 완전히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갈 때마다 또 다른 느낌이 찾아왔다. 그리고 하루가 지날수록 처음 느꼈던 그 기억도 조금씩 변해갔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똑같은 공간에 똑같은 나무가 서 있었지만 갈 때마다 빛이 쏘이는 양과 바람의 세기, 또 이에 따라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제각각 달랐어요. 이 모습에서 어떤 존재, 그리고 존재에 따라 생기는 잔상, 그리고 그 잔상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해졌죠.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그것이 굳건한 하나의 존재라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이 존재에는 무수한 그림자가 있어요. 빛이 쏘이는 방향이나 시간에 따라 짙거나 옅은 그림자, 크거나 작은 그림자가 무수히 생기는 것처럼요. 하나의 존재에 기반을 두고 생긴 이 다양한 그림자가 모두 허구라고는 할 수 없죠. 그 많은 이야기를 작업으로 풀어보고 싶었어요.”
기억의 잔상은 모두 가짜인가요?
나무에 이어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활짝 피었다가 시들고, 그러면서도 다시 땅에 뿌리 내리고 태어나는 꽃의 생명력이 작가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자연의 일부인 꽃에 사람들은 둘러싸여 있고, 이 꽃과 공생한다. 그리고 꽃에 특별한 의미를 붙여 꽃말을 지어주기도 한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꽃의 품종에 꽃말로 이미지가 주어지면서 꽃은 나름대로 또 다른 존재 의미를 갖게 된다. 이 모습이 사람과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어렸을 때부터 꽃을 좋아했어요. 향기도 좋고 예쁘니까요. 그런데 점차 꽃이 우리 인간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들은 각자의 캐릭터가 있는데, 꽃에도 꽃말이 부여돼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화면에 그냥 꽃이 아닌, 저를 대변하는 존재로 꽃을 그려 넣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하나의 꽃에 존재하는 많은 잔상을 통해 딱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죠.”
작업을 위해 늘 거치는 과정이 있다. 기본 에스키스를 마치면 그에 맞는 꽃과 그림자들을 조사한다. 꽃의 꽃말을 공부하고, 직접 볼 수 있는 꽃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학교 대리석 벽면의 넝쿨 사진도 많이 찍었다. 사진을 찍을 때도 한두 번에 끝내지 않고 여러 번 찍는다. 아침, 점심, 저녁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들을 놓치지 않고 집중한다. 추상적이지 않은, 사실성에 기반을 둔 그림자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꽃을 공부하기 시작한 건 그냥 예쁜 꽃을 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 꽃은 저를 대변하는 존재이자, 또 다른 사람들을 대변하는 역할이기에 꽃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직 부족하지만 꾸준히 공부하고 있어요.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 꼭 그림자를 함께 찍어요. 변화하는 그림자는 부수적인 게 아닌, 제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니까요.”
이 꽃과 그림자는 화면에서 묘한 빛깔을 입고 나타난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는 장지가 아닌 광목천을 사용한다. 매번 작업을 할 때마다 어떤 천이 맞을지 찾아다닌다. 그리고 오리나무 열매를 우려서 황토빛 안료를 만든 뒤 그림자의 베이스 색으로 부드럽게 깔고 마지막에 분채로 마무리한다.
“예고를 다니면서 조소, 한국화, 서양화, 디자인을 경험했어요. 서양화가 물감을 두텁게 쌓는다면, 한국화는 물감이 떨어지는 순간 화면에 퍼지는 느낌이 저한테 새로웠어요. 노란색 위에 연두색을 뿌리면 처음과는 또 다른 색이 나왔고,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화면에 퍼져나가는 느낌이 좋았죠. 그래서 대학교 때 한국화를 공부했어요. 처음엔 종이에 먹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더 다양한 잔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고민했어요. 그러다 천을 택했죠. 천에 아교 작업을 하기 전 입자가 고운 돌가루를 뿌리면 천 사이사이가 메워져서 발색이 잘 되는 게 흥미로웠어요. 천에 그림을 그리면 붓도 빨리 상하고, 안료도 빨리 안 올라오지만, 질감 표현엔 효과적이기도 했고요. 저만의 특징을 갖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연구는 계속될 예정이다. 올해 졸업 전시를 마치고 다음해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그림 공부를 계속 이어간다. 존재와 잔상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한 그림자 작업도 계속 끌어갈 예정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들을 마주하고 스쳐 지나갑니다. 그 속에서 기억에 남은 이미지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잔상을 남기고, 이 잔상이 쌓여 또 다른 기억으로도 남아요. 저는 그림을 통해 제 나름의 기억 그리고 잔상을 남기려 해요. 지금 느낀 감정을 오롯이 그림에 담아도, 시간이 흐른 이후 다시 이 그림을 보면 또 새로운 느낌과 기억을 갖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잔상을 마주하는 일이 즐거워요. 꽃을 계속 그리되 그림자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면서, 실체와 잔상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계속 하고 싶어요.”
[이진민 숙명여대 미술대학장 추천사]
“그림자와 빛, 잔상으로 새 공간을 창출”
이하린 학생의 작업은 자연 공간 속에서 자신 감정의 잔상 이미지를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기억된 이미지에 투영해 조형화 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즉, 기억된 이미지에서 영감을 취해 그림자와 빛, 잔상, 그리고 여백의 운용을 통해 자신만의 또 다른 공간을 새롭게 창출하는 방법으로 연구된다. 무엇보다 소재로 등장하는 꽃을 비롯한 자연물은 집요한 묘사에 의해 생명감과 존재감을 더한다.
‘자연 공간 속 기억 된 이미지’의 시각화 과정을 통해 연출된 화면은 현대인의 삶 속에서 공감하는 ‘감성’을 유출했으며 빠른 사회 변화에서 오는 힐링(healing)을 위한 기억 행위를 반영함으로써 오늘날 현대인으로서 삶을 영유하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인식하기를 희망하는 학생의 의도가 충분히 표현됐다.
작품 표현력에서도 독특한 색감과 여백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살린 조형적 완성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나아가 한국화로서의 정체성을 전통에 근간을 두고, 현대적 재료 연구와 표현방법을 탐구하는 창작의 태도는 한국화의 발전 방향의 한 단면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