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기 - ‘스카이 아파트’전] 살갑던 아파트가 사라지기 전에…
▲거주민이 모두 떠나고 폐허가 된 스카이아파트. 이웃들이 서로 잘 알 수 있는 구조다.(사진=오제성)
“거기는 뭐가 좋냐. 첫째는 공기 좋지 인심 좋지, 아무래도 밥도 주고 다 줘. 얼마나 좋다고. 아프면 서로 먹을 거 갖다주고. 못 먹으면 먹으라 그러고. 얼마나 인심 좋다고. 시방도 그려. 아 그런 게 아파트 사람 냄새 나. … 배밭골 인심이 참 좋아요. 나중에 거기 집 지으면 각시 데리고 거기 가서 살어래잉.” (노복순 할머니의 인터뷰 영상 중)
배밭골의 고급 아파트
이제는 몇 개 남아있지 않은 서울의 고령 아파트들 중 하나가 철거를 앞두고 전시회를 개최하며 고별인사를 전했다. 11월 25일~12월 1일, 국민대학교 생활관 1층 전시장에서 열린 ‘굿바이 스카이 아파트’전은 47년간의 한국 현대사를 간직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정릉3동 스카이아파트를 추억하는 전시였다.
예전에는 배밭골이라 불리던 정릉 3동 현재 스카이 아파트 자리엔 대규모 판자촌이 조성돼 있었다. 스카이 아파트는 1969년 판자촌이 철거된 자리에 준공됐다. 그 배경에는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의 급진적인 도시 계획과 1968년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있었다. 서울의 요새화 계획으로 청와대를 보호하기 위한 북악스카이웨이가 건설됐고 판자촌 주민들의 대규모 이주 정책이 시행됐다.
총 4층 5개 동 140가구 규모로 지어진 아파트는 처음 들어설 당시엔 최고급 아파트로 손꼽혔지만 90년대 부동산 투기가 과열되면서 재개발 추진위원회가 등장했고, 2008년 시행된 안전진단으로 한 동이 강제철거 되며 대피 명령이 내려졌지만, 이주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주민들이 집단으로 반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올해 9월 마지막 거주민이 이전하기 전까지 약 14가구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카이 아파트 건축 모형. 4개 동이 땅의 모양에 맞게, 모두 다 다른 모양으로 지어졌다. (사진=오제성)
▲현관 문에서 떼어 온 손잡이들이 모두 다르다. (사진=오제성)
사람 냄새가 났다
성북구 지역의 대학생 및 청년예술가 20여 명이 공개 모집을 통해 참여한 이번 전시는 아파트 공간 특성을 기록한 사진과 그림, 공간 실측 도면과 모형, 주민 인터뷰 영상 그리고 김도준 감독과 최현호 촬영감독이 만든 독립 영화 ‘불영선인’ 등으로 구성됐다.
전시장의 입구에 있는 파티션은 각 가구들의 집에서 떼어 온 달력으로 덮여 있었다. 시간은 그곳에 살던 주민이 이전할 무렵의 날짜에서 멈춰있었다. 각각의 가구에 남아있던 집기들로 재현한 방의 모습은 오랜 세월이 묻고 또 묻어 체취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자개장과 80년대의 고급 TV 등은 당시 주민들의 삶이 꽤 유복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2008년 이주대책위원회를 결성해 피켓 제작법을 배우고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을 찾아가 시위를 하던 과정이 ‘춥고 창피했다’며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일기도 보인다. 마지막까지 거주하던 할머니들의 인터뷰는 먹을 것을 나눠먹으며 이웃과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 냄새 나던 아파트’를 회상한다.
▲주민들이 남기고 간 집기로 방을 재현했다. (사진=오제성)
▲입구를 장식한 주민들이 남기고 간 달력들. (사진=오제성)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곧 철거가 시작되는 아파트의 구조를 직접 보면 이웃들끼리 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단지들이 삼각형으로 서로 마주보게 돼있어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는 데다가 1층 가구들은 집의 앞뒤에 모두 시야가 확보되는 현관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빈 땅을 놀리지 않고 부지런히 텃밭을 가꿔 놓았다. 지금은 텅 비어버린 옥상에는 장독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고, 텃밭에도 장독을 심어놓곤 했단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건축법이 그리 엄하지 않아 모든 집의 구조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각 가구가 삶의 방식에 맞게 공간을 쪼개거나 넓히고 현관문도 집 주인의 구미에 맞게 나무문도 달았다가 철문도 달았다가 하며,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할 독특한 인테리어와 외관을 가지게 됐다. 이 아파트의 구조와 위치상의 장점은 싱크대 앞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민들은 설거지를 하며 볕이 잘 들도록 낸 싱크대 앞의 창문을 통해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북악산의 절경을 볼 수 있었다.
공포 영화의 배경으로 쓰일 만큼 폐허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실제로 공포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막상 방문한 스카이 아파트는 지금이라도 주민들이 나타나 이야기를 나눌 것만 같은, 익숙하고 따뜻한 거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국 현대사를 차치하고서라도 주민들을 오래 지키며 변형돼왔던 아파트는 인간의 흔적이 아름답다 여겨질 정도로 희귀하고, 살아있는 증인과 같은 것이었다. 철거된 스카이 아파트 자리엔 SH 행복주택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문과 창문틀의 색이 모두 다르다. 주민들은 각각의 개성에 따라 집을 개조하며 살았다. (사진= 오제성)
김연수 breezeme@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