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가 깊고 꽃나무, 그 중에서도 앵두나무가 많아 봄나들로 유명했다는 명륜동. 우암 송시열의 집터가 남아있는 서울과학고등학교 인근의 한적한 주택가에 ‘명륜동작업실’이 있다. 명륜동작업실은 레지던시展 시리즈의 4번째로 소개했던 (사)캔파운데이션이 작년부터 운영하는 국내 창작 스튜디오다. 캔파운데이션은 중국 북경의 ‘P.S Beijing'과 독일 베를린의 'P.S Berlin' 등 국제적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해왔다. 여기에 더해 작년부터 서울, 그것도 중심지인 종로의 유서 깊은 지역 명륜1가에 작가들을 위한 창작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지난 12월 14일 명륜동작업실의 입주작가 결과전시 ’명륜동, 화‘가 진행 중인 캔 스페이스를 방문해 세 작가의 1년 결실을 만났다.
문성식 - 오래된 땅에 살아가는 야들야들한 생(生)
문성식의 대형 페인팅 ‘밤 - 오래된 풍경’ 속에는 딱딱하고 오래된 돌산 위에 야들야들한 동물들이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돌산의 각 봉우리들은 저마다 오톨도톨한 표면을 그대로 드러내는가 하면, 붓자국이 선명한 채로 각자의 원시적인 모습을 뽐낸다. "언제 솟아 올랐는지 알 수 없을만큼 오래된 땅과 그보다 오래됐을 검은 하늘과 밝은 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버티며 세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위를 짧고 격렬히 살다가는 생명의 모습은 어떤가? 그의 작품을 보면, 오랜 시간 그려 고민의 흔적으로 두텁게 쌓아올린 돌산에 비해 그 위에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한없이 작고 엷게 느껴진다. 문 작가의 대형 페인팅은 ‘따뜻하고 연약하며,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생명들이 딱딱하고 오래된 땅 위에서 벌이는 고군분투를 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작업의 시작이었다며, 이내 그 궁금증이 인간과 생명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살아있는 걸 죽여서 먹어야 하는 먹이사슬의 풍경은 한편으로 신비롭게 보인다”는 그의 표현처럼, 그림 속 생명들이 각자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처연한 동시에 숭고하게 느껴진다. 도시의 길고양이를 마주하면서 ‘과연 생(生)이란 뭘까?’라는 고민에 빠졌던 작가는 이 땅 위에 살고있는 모든 것에 연민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정고요나 - 타인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그리면서 공유하는 ‘리얼 라이브 페인팅’
프로젝터 한 대가 누군가의 집 거실을 벽면에 비추고 있다. 영상 아래로 캔버스천이 벽면에 붙어있고, 천 위에 이미 영상 속에 등장한 가구, 벽 등의 배경을 재빠른 필치로 그려져 있었다. 정고요나 작가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일반 가정집의 CCTV 영상에서 타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일상을 발견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그려낸다. 작가는 “마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듯, 인터넷 세상에는 자신의 집에 CCTV를 설치해 자기 일상을 실시간 송출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어느 나라에 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누군가의 일상을 정고요나는 전시장으로 끌어들이고 이들의 흔적을 따라 붓으로 기록한다. 퍼포먼스 ‘리얼 라이브 페인팅(Real Live Painting)’이라 이름붙인 이 실시간 드로잉은 작가 개인의 일상과 기억을 선택적으로 그려낸 이전의 페인팅 작업에서 한발 더 나아가며 일상 공유를 다른 차원의 문제로 접근한다.
레지던시에 입주한 올해 초부터 이 작업을 공개한 이후, 벌써 수차례 국내외 전시에서 선보인 바 있다. 정 작가는 리얼 라이브 페인팅 작업의 다양한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히며, 이미 예정된 내년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정승 - 화려한 미사여구의 무능력에서 벗어나 본질로
정승 작가는 가파른 선반에 태양열 전지로 고개를 까닥이는 인형들을 올려두고 강한 형광등 빛을 비춰 결국 인형이 하나둘 떨어지고 마는 설치작품 ‘스펙터클리스 콤플렉스(Spectacleless Complex)’로 잘 알려졌다. 까딱이는 시스템 속에서 소모되는 사람을 표현한 이 작업처럼, 부조리한 오늘날의 사회를 오브제나 설치작업으로 표현해온 정승은 이번 전시에서 3년간 공개한 적 없는 신작을 소개한다. 영상 설치작업 ‘다름의 파편들’은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과 얽힌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벗어두고, 그들 스스로 각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얼굴을 클로즈업한 영상과 인터뷰 중 반복된 단어나 문장을 추려낸 음성이 7채널로 재생된다. 작가는 명분과 이해관계에 의해 소외된 이들 개인의 삶을 유심히 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전시가 열린 캔 스페이스의 1층과 2층 사이 층계참에 경광등을 길게 이어붙인 정승 작가의 ‘경고된 나라에서 온 무지개(Rainbow from Warnedland)’도 만날 수 있다. 이상향인 원더랜드가 아니라 원드랜드(Warnedland)다. 경고된 나라에서 온 키가 큰 무지개는 비스듬히 벽에 기댄 상태로 일련의 규칙에 따라 빛을 깜빡였다. 작품 옆으로 이 빛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모스 부호 단서가 마련돼 관람객이 직접 그 의미를 해석해낼 수 있다.
명륜동작업실 - 고요한 산책길과 낮은 지붕의 집중력
정고요나-정승 작가 커플은 19평 크기의 긴 직사각형 작업실에 함께 입주했다. 작가들에게 지난 1년간의 레지던시 경험을 묻자, 명륜동작업실의 가장 큰 장점으로 산책로를 꼽았다. 두 작가는 작업실로 향하기 전, 인근 동네를 산책하고 갖는 차 한 잔의 여유가 작업의 활력을 더했다고 입을 모았다. 안 거쳐본 레지던시를 꼽는 게 빠를 만큼 국내외 레지던시 경험이 많은 정승 작가는 “미디어 매체의 특성상 (작품 판매 및 작업 공간 구축이 힘들기 때문에) 미디어 작가들은 이런 지원이 계속 필요한 상황”이라며, 자신도 “레지던시 지원을 통해 그동안 원활하게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성식 작가는 천장이 높지 않은 명륜동 작업실이 오히려 집중력을 높였다고 말했다. 주로 작업실에 들어가면 밤이 늦을 때까지 작업에만 몰두하는 문 작가는 조용한 동네와 자율성이 보장된 독립적인 작업실이 마음에 들었다. 접근성 좋은 서울 사대문 안, 이 같은 평화로운 동네에 작업실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캔파운데이션 측은 2016년 입주작가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소기의 성과를 토대로 내년 한 해 동안 공간의 정체성 확립을 목표로 삼았다고 밝혔다. 여기에 젊은 작가군의 지원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공간을 기존 스튜디오 2실에서 3실로 확장했다. 2017년 입주작가는 공모를 통해 △전환의 순간을 포착해 캔버스에 담아내는 박진아 작가(70년대생) △시대의 단상과 세대의 고민을 공간에 녹여내는 고재욱 작가(80년대생) △활자와 언어 위에 그려내는 드로잉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지희킴 작가(80년대생) 등 현재 화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70년대생 작가와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80년대생 작가 총 3인이 선정됐다.
캔파운데이션 측은 “명륜동작업실은 작가들의 프로젝트 스페이스 중심으로 운영되는 ‘작가 중심형’ 레지던시로, 입주기간 동안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에너지를 공유하며 작업의 모티베이션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명륜동, 화’ 전시는 12월 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