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 전시 - ‘박ㄹ혜뎐’]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풍자하는 작품. 박근혜 대통령이 마리오네트로 표현됐다. (사진= 김연수)
최근 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촛불 집회를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거나 참가하며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달라진 시위 문화일 것이다. 조금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던 가슴 아픈 예전 얘기와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가족 단위의 참석과 공연들 그리고 서로의 발언이 이어지는 축제로 여겨질 만큼의 질서 있는 시위 장면은 세계적으로도 이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로 꼽히며 수많은 해외 언론의 주목마저 받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해학과 풍자 그리고 유머가 일조한다. 최순실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변장해 시위에 참가한 사람, 대통령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나온 그림과 인형을 들고 나온 사람들을 보며 ‘그 옛날 시장 바닥에서 마당극을 통해 권력자들을 조롱하던 조상들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웃음으로 같이 어려운 시기를 조금 더 나누고 독려하며 극복하려는 마음, 그리고 그 웃음 뒤에 가려진 씁쓸함이 느껴지곤 한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 당시 작품.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대통령의 발언에서 비롯한 작품이다. (사진=김연수)
입체 작품이 된 만평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도 가장 격전지(?)는 청와대로 진입하는 골목인 경복궁 역 일대다. 마지막까지 남은 시위대와 경찰부대가 자정을 넘기며 신경전을 벌이는 곳 지척의 갤러리에서는 한 만평가의 전시 ‘박ㄹ혜뎐’이 열리고 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시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평가 양한모는 주간지 시사인에서 ‘캐리돌 만평’을 담당하고 있다. 기존의 만평이 만화 형식의 평면 작업이라면, 그의 만평은 인형으로 나타나는 입체 작업이다. 만평가가 마감 기일에 맞춰 만화를 내듯이 양 작가는 매주 하나씩 인형을 만든다.
갤러리 안에는 약 40~50개의 인형들이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들이다. 철사로 뼈대를 만들어 신문지를 뭉쳐 덩어리를 만들고, 색한지로 마감한 작품들은 뚝딱뚝딱 손쉽게 만들었다는 느낌이 나면서도 인물 특유의 표정과 소품 등의 섬세한 표현을 놓치지 않는다. 오랫동안 캐리커처를 하며 단련된 특징 잡기가 그대로 입체에 구현이 된 것 같다.
▲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 후, 국정 평가를 하며 만든 만평이다. (사진= 김연수)
그녀에 관한 기록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시작해 한 주에 한 번씩 연재한 작품들과 최근 사태에 들어서며 새로 제작한 작품들이 갤러리의 입구서부터 시기별로 놓였다. 취임 초기 미혼인 대통령의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말을 빌려, 웨딩드레스를 입은 대통령의 모습이 취임식에서의 대통령 취임 선서가 적힌 말풍선과 함께 선보인다. 작가는 “이 당시의 대통령 모습이 가장 예쁘게 표현된 것 같다”고 전한다.
취임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김기춘 비서실장이 ‘공안 정치’ ‘반공 방첩’ ‘구태 정치’ ‘유신 정치’라는 이름이 적힌 관들 사이에서 흡혈귀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입과 귀가 작은 열쇠 구멍으로 변해버린 안방마님의 모습이 됐다. 취임 1년 후엔 국정 평가에서 ‘종북 몰이’ ‘공안 통치’ 분야에선 100점을 받은 반면, 경제, 민주화, 인사 분야 등에선 빵점을 받은 시험지를 내팽개치고 책상 위에 엎드려 침 흘리며 자고 있는 여고생 박근혜의 모습이 그려진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한 발언이 되버린,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을 했을 때, 양 작가는 박근혜 대통령을 무당으로 묘사한 인형을 만들었는데, 그도 이 이미지가 이렇게 들어맞는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고 밝히기도 한다. 최근의 작품으로 오면, ‘K스포츠’ ‘미르재단’이름이 붙은 돈주머니와 돈을 앞에 가득 쌓아두고 침을 묻히며 돈을 세고 있는 최순실의 모습은 그녀의 상징처럼 된 선글라스를 벗기면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이다. 하나의 사람과 다름없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 밖에도 최순실이 조종하는 마리오네트 인형이 된 박근혜 대통령의 인형은 실제 마리오네트이기도 하다. 양 작가는 최순실 형태의 조형물에서 마리오네트를 분리해 직접 걷게도, 눈과 입을 깜박거리게 하는 시연을 해 주기도 했다. 그 짧은 공연의 배경음은 대통령이 대선 후보 등록을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면서 “대통령직을 사퇴하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실수였다.
▲박근혜 정부가 강행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만평. 위안부 소녀상 가슴에 억지로 현금을 박아넣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다. (사진= 김연수)
웃음은 분노를 넘어 나온다.
이번 전시는 양한모 만평가가 1년을 준비한 전시를 미뤄두고 주제를 변경한 것이다. 그는 광화문에 모인 촛불 민심을 보고 이 시기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광장에 등장한 인형 등의 각종 풍자물들을 보고 놀랄 때가 많았다고. 자신 역시 시사적인 주제를 다루는 작품을 하고 있지만, 그 표현들에서 배울 점이 많았고 무엇보다 “즐거움이 표현에 더 무게를 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한다.
한편, 작가는 이번 작업 과정이 꽤나 어렵고 고통스러웠다고 말한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원래 표정이 별로 없어 다채롭게 표현하기가 어려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게 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1년간 준비했다던 작품들의 이미지를 살짝 보여줬다. 한국 가요사 100주년을 맞아 만든 100명의 한국 음악인들 중 일부를 보여 줬는데, 그 특징과 표정들이 절로 웃음을 터지게 만들었다. 작가는 “다음 전시에는 존경과 위안의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고 밝힌다.
▲박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말한 '우주' '기운' '혼' 등 추상적 표현들이 이슈가 되자 만든 작업이다.
만평이라는 분야는 옛날보다 그 힘이 약해졌다. 그 이유는 인쇄 매체 시대의 아이템이라는 한계, 다르게 말하면 인터넷, 영상, 모바일 등의 다변화 된 언론 매체 때문일 수도 있다. 양 작가가 입체로 만평을 재현하는 것 역시 그런 변화에 발맞추는 시도 중 하나다. 하지만, 만평이 가지는 그 자체로서의 정체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만평은 시대 안에서 사건을 기록하는 스크랩 같은 역할을 넘어 풍자를 섞어 표현하기에 시대의 정서까지 담고 있다”고 전한다.
더불어, “나는 만평가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이기에 주제로 선정한 기사에 대한 댓글도 보고 아내와 아이들, 주변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종합하고 참고해 작품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혼자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나는 만평가도 같다고 생각한다. 심적으로 많이 힘들 때도 있지만 지치지 않고 생각을 펼쳐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전시는 창성동 갤러리 자인제노서 12월 31일까지.
▲군부 정권 시절의 권력자였고 박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다시 돌아와 무소불위의 권력이 된 김기춘 비서실장을 풍자한 작품이다. (사진=김연수)
김연수 breezeme@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