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젊은 작가' '신진 작가' 등의 수식어로 통칭되는 80-90년대생 작가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왕성했다. 이른바 ‘신생공간’이라 불리는 예술가들의 자립적 전시공간 모색과 수많은 미술기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신진작가 공모들이 이를 안팎에서 이끌었다. 작년 초 서울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생긴 신생공간을 미술관 안으로 불러들인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울 바벨’전이 열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이들 젊은 작가들의 작업세계를 이전 세대들과 비평적으로 구분하기보다는 공간과 세대로 구분하기만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남았다. 각종 기금을 통해 젊은 작가들의 조형적-형식적 실험을 권장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작업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비평적 시도는 상대적으로 미진했다는 반성이 나오던 시점이다.
이런 가운데 80-90년생 회화 작가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비평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전시가 열렸다.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지난 12월 22일부터 전시 중인 ‘룰즈’의 젊은 기획자 최정윤 씨를 만나 새로운 세대적 비평이 필요한 이유를 물었다.
‘청년세대-신생공간-생존’이란 키워드 덜고 작품 들여다보기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계기에 대해 최 기획자는 “최근의 젊은 회화 작가들에 대해 ‘알 수 없는 추상을 그린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했다”며 “인터넷 세대나 88만원 세대 말고 다른 세대론을 제시해보고 싶었다. 젊은 작가들의 시도가 공허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이들을 내외부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추론하는 비평의 빈곤 때문이라고 느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내용적으로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 이번 전시의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젊은 회화 작가들이 지향하는 지점을 점검하기 위해 해당 작가들을 조사하고,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2015년 12월부터 2016년 2월까지 각종 미대의 졸업전시회를 살피고 주변을 수소문하는 등 새로운 작가 발굴에 꽤 오랜 시간을 들였다. 그래서 참여 작가 7명 중 대학을 벗어난 전시가 처음인 ‘생(生)’ 신인 작가 3명, 미술 제도권 공간에서 처음 전시하는 작가는 총 4명이다. 이 때문에 전시 초반부터 신선한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라고 입소문이 났다.
“작가를 모으고 오랫동안 지켜보며 이야기한 결과 작가들 하나하나 다 다른 규칙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 규칙은 그림을 보는 사람이 알아야 하는 규칙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만 작동하는 규칙이다. 폐쇄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이 만든 게임(의 규칙)을 화면 위에 구현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전시 포스터에서 7번 동일하게 반복되는 'Rules'처럼 작가 7명의 각기 다른 규칙들이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했다.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해보일 수도 있는 규칙이지만 작가에겐 창작의 원동력이 되는 듯 하다.
룰즈, 자기만의 규칙(rule)으로 통치(rules)하는 그림 속 유토피아
‘룰즈(Rules)’는1980-90년대 출생의 젊은 회화 작가들이 보이는 (추상에 가까운) ‘비재현적’ 경향의 작가 7명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다. 전시 출품작을 살펴보면 재현적인 형상은 없고 색과 선(또는 붓터치), 질감으로 표현된 모호한 이미지를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작품에 어떤 사회적 현상이나 개인의 서사를 반영하기보다 그림의 재료나 화면 구성 요소 등 작품 내부적 관계성만이 부각된 듯하다.
참여 작가 7인의 작업을 굳이 분류하자면 △감각이나 감정, 경험을 시각화하는 김미영, 최수인, 에이메이 카네야마 △회화의 구성요소(색, 선, 형태, 재료) 실험에 몰두하는 이환희, 고근호, 성시경 △회화 혹은 회화적 재료로 나름의 서사를 구축하는 이상훈으로 나눌 수 있다.
새큼한 레몬 커스터드를 한 입 가득 머금은 듯한 감각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김미영의 ‘레몬 커스터드’나 심리적 경험과 감정을 재빠른 붓터치로 담아 일종의 연극적 무대를 만드는 최수인 작가의 작품들은 굳이 설명하기보다 작품을 실제로 보고 느껴볼 것을 권한다. 에이메이 카네야마의 작품 역시 무의식에 축적된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담아낸다.
이환희는 주황색 형광펜, 살색(flesh color) 물감 등의 재료 및 선, 형태들을 작가만의 규칙으로 제어하며 작품들 간의 관계성을 이어간다. 화면에는 저마다 강렬한 특징을 가진 영역들이 분리돼, 관람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작가의 규칙을 해석해보는 것 역시 흥미로울 듯하다. 고근호의 경우 미리 지정한 하나의 벽을 최종 캔버스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계획한 회화 내부 요소로서 소형 캔버스 작업을 제작하고 이를 최종 배열해 작품을 완성한다.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마련하는 작은 구성요소들을 준비하는 그만의 규칙이 치밀하게 다가온다. 성시경의 경우 다양한 조형 언어를 자신만의 그리기 행위와 자의적 구상을 통해 이끌어나간다.
마지막으로 이상훈 작가는 그림 속 반복되는 도식 안에서 물감이란 상수를 변형하며 내부적인 유희를 이끌어낸다. 참여 작가들의 규칙은 이렇다지만, 실제로 해당 규칙들은 작가의 작업을 위해 존재할 뿐 관객이 굳이 이를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2030 작가들이 이렇듯 자신만의 규칙에 의거해 작업해나가는 이유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작가들과 같은 세대를 공유하는 최 기획자는 전시 서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작가들이 만드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 즉각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실현 가능한 형태의 소규모 유토피아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마치 하나의 게임적 가상 현실 속에서 유희적 태도로 온전한 창작의 즐거움을 누리는 듯 보였다. …이들은 작품이라는 스스로가 만든 가상의 공간 안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신이 만든 규칙대로 그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는 1월 2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