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표 상권으로 이름난 홍대 인근에 재능 있는 작가들에게 무상으로 작업실을 제공하는 레지던시가 있다. 아직 ‘아트 웨이브’란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부터 입주 작가들이 ‘(벌써 떠나기) 아쉬운 레지던시’로 불렀을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자랑한다. 쾌적한 공간에 월세는 물론 공과금까지 모든 것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레지던시인데, 현재는 2년이란 제한시간이 만료되기까지 불과 3달이 남았다. 지난 2월 2일 저녁 아트웨이브에 입주한 5명의 예술가의 작업실을 찾고, 그동안 예술가를 후원해온 젊은 벤처CEO를 만나 이들의 꿈과 비전을 들었다.
‘뼛속까지 예술가’ 5인의 작업실 방문기
신창용 “‘덕질’ 승화시킨 ‘덕화(畵)’로 소통하기”
미드 ‘왕좌의 게임’부터 ‘백투더퓨처’, 배우 이소룡 등의 이미지가 작업실 한 벽면을 빼곡히 메웠다. 작가 신창용의 작업실엔 그가 게임, 영화, 음악, 만화 등 다양한 장르를 ‘덕질(자신이 심취한 분야를 깊이 찾아보거나 모으는 행위)’한 흔적들로 가득하다. 덕후란 말이 통용되기 훨씬 전부터 덕질을 생활화한 신 작가는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보다 많은 이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왕 보여줄 거라면 보편적으로 아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친절한’ 마음 덕분에 익숙한 이미지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이현진 “팝아티스트 아니고 그냥 ‘덕후’입니다”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이현진 작가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픽션이었다”며 자신을 ‘픽션 덕후’라고 소개했다. 그만큼 자신만의 하고픈 이야기가 풍부하다. 작가는 자신을 닮아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분신들이 여러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상황을 포착해낸다. 디지털 드로잉, 회화, 피규어 및 애니메이션 제작 등 다양한 매체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이 작가의 장난스러우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곳 작업실의 작가들은 모두 덕질하다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에요. 가장 하위의 문화를 미친 듯이 파고, 쌓다보니 예술의 영역까지 다가간 경우죠”라고 말하며 팝아트 장르와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 지었다.
조문기 “한국의 가부장적 남성 이미지 그려요”
진지함과 위트가 적절히 섞인 조문기 작가는 양면이 모두 통유리인 작업실을 사용하고 있다. 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에서 보컬 조까를로스로 활동하며 뮤지션으로도 잘 알려진 화가 조문기는 친구, 연인, 가족 등 관계 속의 갈등을 옛 풍속화처럼 그려낸다. 젖먹이 아기부터 장례식의 상주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와해들을 4폭 병풍에 담은 작품 ‘평생와해도’가 그의 초기 작업세계를 잘 드러낸다. 최근 작업에는 종교적 모티프가 늘었다. 가까운 관계 속 충돌은 어느새 그 범위를 확장시켜 종교 및 과학의 맹신으로 아수라장이 돼버린 세상을 그리고 있다. 작업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그에게 애증의 대상인 한국의 가부장적 남성이다. 유머러스한 그림과 달리 오류를 피하기 위해 조심스레 말을 고르는 그의 태도에서 진중함이 느껴진다.
정지선 “눈이 현혹하는 이미지보다 판단을 정지시키는 이미지 만들고파”
거실 옆 주방이었던 정지선 작가의 작업실은 반원형 창이 특히 인상적이다. 정 작가는 쉽게 눈을 현혹시키는 화려한 이미지보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주제로 작업한다. 최근작 ‘딸의 딸(Daughter of Daughter)’은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삶을 여성의 시각에서 해석했다. 딸의 딸, 그 딸의 딸처럼 닮고 싶지 않아도 닮을 수밖에 없는 딸의 숙명과 반복되는 순환의 고리를 표현했다. 엄마의 옛 흑백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그림 속 얼굴이 자연스레 작가와 닮았다. 그는 “보편적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결국 자신의 이야기가 담길 수밖에 없다”며 “반복(되는 삶)이 주는 허무함을 극단적으로 표현할 때 나타나는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정선 “사물 하나하나가 내겐 물감이자 펜”
김정선 작가의 손을 거치면 오래된 다리미가 남산타워가 되고, 분홍색 실타래가 분홍색 튜브에서 막 짜낸 물감 덩어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쳐 가는 사물들이 작가의 눈에는 미술 재료가 되는 듯하다. 그의 작업실엔 조악하다 싶은 키치한 물건들부터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럴싸한 골동품들까지 다양한 소품들이 그득하다. 작가가 꼼꼼하게 골라낸 물건들이 손끝에서 분해되고 조립되면서 작가만의 이야기가 작품으로 완성되는 방식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뜻밖의 재료 조합만으로도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작가 5명에 공간과 미래를 후원”
정주형 (주)이모션 전 대표, 김남희 (주)오리지널웨이브 대표
풍요로운 작가군에 비해 한국의 미술품 컬렉터는 한 줌에 불과하다. 갤러리 숫자와 비슷한 기존의 컬렉터군을 빼고나면 한국의 미술시장은 거의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평소 디자인과 예술에 관심이 많던 정주형 (주)이모션 전 대표는 한 작가의 작품을 구매한 후 그 길로 컬렉터의 세계로 들어섰다. 대형 그림 2점을 첫 구입한 그는 첫째, 인테리어로서의 만족도가 높았고 둘째, 매일 아침 그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감이 ‘마치 매일 이자를 받는 것’만큼 멋진 경험이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그가 조언을 구한 지인 김남희 (주)오리지널웨이브 대표는 미술 작가 출신으로 4000여 명의 미술 작가 커뮤니티 ‘스튜디오 유닛’을 운영한 특이한 경험의 소유자다. 정 대표는 김 대표를 통해 작가들을 소개 받고 그 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젊고 재능있는 작가들이 창작할 장소와 환경을 갖출 수 없어 작품 활동을 그만두거나 생활의 어려움을 겪음을 알게 된 그는 작가들이 미술계 네트워크와 교류하면서 재료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홍대 인근에 작업실 장소를 선정하고 시설을 갖추도록 도왔다.
2002년 코스닥 상장을 이뤄낸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 (주)이모션을 일군 정 전 대표는, 서울대 산업디자인과 3학년 재학 중 창업했다. “대학 재학 중 경험한 디자인 아르바이트에서 많은 걸 느꼈다. 디자인으로 사업의 부가가치가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당시 디자이너 입지는 최하위 노동자였다. 난 그 환경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상황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하지 말고 경영도 하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작가가 작업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작업 공간, 또 하나는 작업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팬이다. 두 대표는 2년간 작업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이후 팬을 만날 기회까지 마련할 예정이다.
이들이 지원한 작가 5명의 전시 ‘룸 포 아트(Rooms for Art)’는 3월 4일부터 15일까지 (주)오리지널웨이브의 후원으로 삼성동 슈페리어 갤러리에서 열린다.